[다산로에서]다산과 혜장 그리고 차
[다산로에서]다산과 혜장 그리고 차
  • 강진신문
  • 승인 2006.07.28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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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 다인회장.전 중앙의원 원장 김영배

“다산(茶山)과 혜장(惠臧) 그리고 차”

동백꽃이 굵은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어느 날 만덕산 산자락에 자리한 백련사를 찾아 그곳 왼쪽 동백나무 숲에서 산자락 사이로 찻잔처럼 잔잔하고 아담한 바다를 바라보니 수백 년 전의 다산과 혜장이 대좌하여 차를 마시던 모습이 회상된다.

술병이나 일찍 요절한 아암 혜장은 백련사에서 바라보이는 저 바다를 술잔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혜장은 다산에게 차의 참 맛을 처음으로 깊이 알게 한 선사이다.

반대로 다산은 백련사 주지였던 혜장이 만든 차에  홀딱 반한 사람이었다. 다산이 혜장을 만난 사연은 해남 대흥사에 있는 혜장선사 탑 비문에 적혀있다. “아암공탑명이라”하는데 다신이 지은 글이다.

신유년(1801)겨울에 나는 강진으로 귀양을 왔다.

그로부터 5년이란 세월이 지나간 봄 아암이 백련사에 와 살면서 나를 만나려고 했다. 어느 날 시골 노인의 안내로 백련사에 가서 신분을 감춘채 혜장을 찾았다. 그리하여 혜장과 한나절 동안 대화를 하였으나 그는 나를 알아  보지 못했다.

작별하고 대둔사(대흥사) 북암에 이르렀는데, 해질 무렵 아암이 헐레벌떡 뒤 쫓아와 머리를 숙이고 합장하여 말하기를 “공께서 어찌 저를 속이십니까? 공이 바로 정대부 선생이 아니신지요? 빈도는 오래전부터 공을 사모하고 있는 처지입니다.”하였다.

그리하여 두사람은 다시 백련사로 되돌아 가 아암의 방에서 밤을 함께 하게 되었다. 밤새 차를 마시며 주역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는데 혜장은 입에서 구슬이 구르듯, 도도하게 물이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혜장은 일찍이 대둔사로 출가하여 30세에 “두륜회”(학승들의 학술대회)의 맹주가 될 만큼 불교와 유교에 도통한 승려였다.그러나 혜장은 유학에서는 다산의 깊은 학문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날 밤 늦어서 혜장이 처량하게 탄식하였다.

혜장은 20년이란 긴 세월동안 주역을 배웠으나 모두가 헛된 거품 이였다. 우물 안 개구리요. 술 단지 안의 초파리 격이니 스스로 지혜롭다 할 수 없었다. 이때 혜장은 34세요, 다산은 44세였는데 이후 두 사람은 “다우”로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혜장은 다산이 거처하던 강진 동문 밖의 초라한 노파의 밥집에서 우두봉에 있는 풍치 좋고 고요한 “고성암”요사로 옮겨 독서도 하고 차도 마시게끔 하여 혹독한 국문으로 생긴 지병이 낫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고성암 요사에 “보은산방”이란 편액을 걸었다.


혜장은 백련사 부근에 자생한 질 좋은 차 잎으로 차를 만들어 보은산방에서 그곳 승려들에게 주역을 가르치던 다산에게 보내곤 하였다. 어느덧 차를 즐기게 된 다산은 혜장에게서 차가 오지 않으면 차를 간절하게 보내 달라는 시를 지어 보내기도하고, 한때 혜장의 제자 색성이 죽었다하여 차를 보내주지 않으므로 그를 원망하는 말을 하여 차를 주도록 끝까지 요구하였다는 긴 제목의 시를 남김은 혜장이 만든 차의 맛이 예사롭지 않음이 짐작된다.

 혜장의 호가 아암이 된 연유는 이렇다. 타협할 줄 모르고 자존심이 강한 혜장에게 다산이 어느 날 “자네도 어린 아이처럼 유순할 수 없겠나” 하고 충고하자 혜장은 그날로 호를 아암(兒菴)이라 불렀다고 한다.

혜장은 죽을 무렵에 혼잣 말로 “무단히 무단히”라고 중얼거렸다 한다. 이는 불학에서는 일가를 이루었으나 부처에는 이루지 못한 자신의 삶이 부질없다는 회한이었으리라. 다산은 혜장이 죽자 만시를 지어 조문을 갔다. 다산의 만시는 혜장을 다비하고 나자 비가 내렸던 모양이다.

한줌의 재마저 비에 씻겨 사라지는데 그것이 서러워 어린 사미승들이 통곡하고 있구나, 혜장과 작별하는 다산의 심사는 애처롭기만 하다.

다산이 인정한 유물에 통달한 천재였음에도 술병이 나서 40세에 요절한 혜장의 삶이 아쉽기만 하다.
아쉬움을 달랠 겸 백련사 다실에서 투명한 유리잔에 노란 빛깔의 “달빛 차”를 한잔 마시고 백련사를 나오는데 자꾸만 동백나무숲에 눈길이 멈춘다.

낙하한  동백꽃들이 죽기 전의 혜장처럼 “무단히 무단히”중얼거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차를 마시게 함으로서 다산의 건강을 되찾게 한 혜장의 삶이 “무단히”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혜장의 차가 없었더라면 과연 다산이 몸을 추스르고 건강을 되찾아 18년의 긴 강진 유배에서 수백 권의 책을 집필 할 수 있었을까? 혜장은 어두운 밤하늘의 혜성처럼 짧지만 눈부시게 살다간 선교의 거목이자 유학의 대가였다.
2007.7.
의학박사 김영배(강진군 다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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