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三百年 앞을 내다본 고산 윤선도의 지혜
[기고]“三百年 앞을 내다본 고산 윤선도의 지혜
  • 강진신문
  • 승인 2006.07.0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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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척사업으로 식량자원 확보
                        민간경원 조성으로 삶의 정서와 자연환경보전
                        보길도의 洗然亭 현대조경사의 효시

대대로 전라도의 康海南에서 세거(世居)해온 해남윤씨는 호남의 명문이자 전국에서도 명성이 있는 성씨이다.

해남윤씨 가문의 뛰어난 학자인 고산(윤선도)은 16세기(1587~1671)때 인물로 글재주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생활의 기초분야인 의.식.주, 천문, 지리, 조경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겸비하였으며(그 사실은 해남읍 연동리 녹우당의 국보급자료가 근거의 뒷받침)1633년(인조11년) 47세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참의를 지냈으며 효종임금의 사부로 사후 忠憲(충헌)이란 시호까지 받게 되었다.

고산 윤선도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보길도의 유배 은둔생활시 오우가, 어부사시사, 산중신곡등 빼어난 시조단가 작품을 쓴 조선중기의 학자로만 기억될 수 있지만 그의 진면목은 수백년 앞을 예견한 간척사업과 민간경원(조경)사업에 대하여는 세간에 모르는 이가 많아 언급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최근 조경학을 공부하면서 보길도는 수차례 진도의 굴포리와 완도의 노화도 석중리에 한차례씩 들렸는데 현지탐방 후 놀라움과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길도의 부용동 세연정(洗然亭), 세연지(洗然池)는 1637~1668(31년간)에 조성되었으며 연지(然池)내의 거대한 평암석(平岩石)의 구도배치와 인공섬축조, 연지내 물의 유입과 유출의 과학적 석보(石洑)축조기법, 주변경관 조성등 현대 조경사에서도  흉내낼 수 없는 근대조경의 효시이자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우리나라 3대민간정원중 “별서(別捿)정원”으로 으뜸을 꼽는다.


그리고 진도의 굴포리와 노화도 석중리 간척사업은 각각 300정보(약200만평)의 규모로 지금으로부터 350여년전 아무런 기계기구도 없는 순전한 원시적인 농구와 육신의 피땀으로 이거대한 간척사업을 일구었다는 것은 초인간적인 의지와 집념 그리고 식량자원의 애착에 대한 철학이 없이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당시의 大役事라 지칭해도 미흡한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와 지금의 사정을 비교해보면 ‘새만금간척사업’에 버금가는 대역사가 아니였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그리고 또 한번 놀란 것은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소나무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을 때 잘생기고 웅장한 노송(해송) 한 그루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350여년동안 만고풍상을 다 겪으면서도 어느 가지하나 병충해와 공해에 오염되지 않고 우람한 자태를 뽐내는 기상은 고산(윤선도)의 기계(奇計)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아니고서는 그 고달픈 울력 상황에서도 먼 훗날을 예견하고 기념식수를 하였다는 그 사실 자체만 보더라도 식량안보와 환경보전을 그 당시부터 머리 속에 그리셨다는 말로 풀이 된다.

현재, 현지주민들로부터 그 고마움에 대한 보은으로 정월대보름날이면 사당에 고산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 별서(別捿)정원이란? : 사회의 부귀영화를 저버리고 농경을 하면서 자연을 벗 삼아 살기위해 벽지에 터를 세워놓은 소박한 주거정원>
윤형순
<대구면수동출신/전 농림부, 농협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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