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배 탐사단 6일 새벽 4시 재출항
떼배 탐사단 6일 새벽 4시 재출항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6.06.05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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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대로 9일 강진 도착 가능할 듯

떼배는 제주도민들과 강진향우회 회원들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오후 2시 50분 화북항을 출발했다.

출항식장에는 이번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무소속으로 도지사에 당선된 김태환당선자를 비롯해 제주시장 당선자, 북제주군수 당선자등 지방선거 당선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강진향우회 회원들도 20여명이나 참석했다. 300여명의 참석자들은 화북항을 떠나는 떼배탐사단을 위해 오색풍선을 날리며 환송해 주었다.


떼배는 예인선의 도움을 받으며 서서히 포구를 빠져나갔다. 안개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파도도 보통이 아니었다. 큰배에게는 그리 높은 파도가 아니였으나 거의 바다와 수평으로 움직이는 떼배에게는 산같은 파도가 따로 없었다.


▲ 떼배를 환송하는 제주 주민들.
대원들의 흰 옷은 순식간에 바닷물로 흥건이 젖어 버렸다. 여기저기서 불어오는 바람은 뗏목위로 바닷물을 사정없이 퍼부어 댔다. 안개도 오리무중이었다. 부두에서 그래도 몇백미터는 돼보이던 시야가 50여m도 안되게 급변하고 있었다.


채바다 대장은 대원들에게 돗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배위에 걸쳐있던 잡다한 깃발들도 내려졌다. 조금이라도 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출발 10여분 정도 되어서 마중나온 민간배들이 모두 항구로 되돌아 갔다. 제주의 기자 10여명도 마감시간이 바쁘다며 서둘러 뱃머리를 항구로 향했다. 이제 바다에 남은 민간인은 탐사단 5명과 기자가 전부였다. 해양경찰 경비정과 제주도청 행정선 3척은 떼배 주변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기자는 제주도 행정선인 삼다호와 탐라호를 번걸아 탄 후 최종적으로 해양경찰서 경비선으로 옮겨 탔다. 해경 경비선이 가장 가까이서 떼배를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은 계속 불고 파도는 떼배 위를 끝없이 덥치고 있었다. 안개는 점점 짙어갔다.


가장 먼저 안전을 걱정하고 나선 것은 해경이었다. 해경쪽에서는 완도쪽 바다도 안개가 심하다는 보고를 받고 있다며 회선을 검토해야 할 시기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행정선 사람들도 해경의 최종 판단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항해는 잠시 중단됐다. 해경과 채바다 대장이 항해여부를 협의중이었다. 


아주 오래전 떼배를 타고 이 해역을 지나던 우리의 조상들은 이렇게 안개나 파도를 만나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지금은 해경과 제주도 행정선이 떼배를 지켜주고 지리정보시스템이 배의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지만 말 그대로 떼배에 몸을 의지해 있던 시절에는 그져 자연에 목숨을 맡길 도리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어디 떼배 시대 뿐이었을까. 칠향에서 옹기를 싣고 제주로 가던 강진상인들도 뱃길에서 바람을 만나 생명을 잃은 경우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이 정도는 태풍에 견줄바 못되지만 보통 바람이 이정도이니 정말 태풍급 바람이면 어느 정도 였을지 덜컥 겁부터 났다.


▲ 노를 저으며 앞으로 진행하고 있는 떼배.
채바다 대장이 자신의 논문 ‘고대탐라국과 탐진의 역사적 재조명’에 제주인의 표해록이란 책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제주뱃길에서 일어났던 표류의 사례를 적은 내용이다.

-1470년 8월 김배회 등 7명이 제주에서 진상품을 싣고 한양에 갔다가 제주로 돌아 오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나 13일만에 중국 절강성으로 표류하여 돌아왔다.


-1477년 2월 김비의등 8명이 제주에서 진상하는 감귤을 싣고 추자도에 이르렀을 때 폭풍을 만나14일 동안 바다를 떠돌다 유구국(일본 오키나와)으로 표류하여 3명만 살아 남고 2년4개월 만에 일본을 거쳐 돌아 왔다.


-1487년 최부(崔溥)는 9월 추쇄 경차관이 되어 제주에서 일을 보던 중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급히 고향으로 돌아 가던 중에 폭풍을 만나 중국에 표류하였다. 온갖 고초를 격어 북경을 거쳐 한양에 돌아 왔다.

-장한철은 제주 사람으로 1771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육지로 나가다가 폭풍을 만나서 유구국에 표착하였다. 이밖에도 이방익도 제주 사람으로 만경 현령을 지낸 아버지 이광빈을 만나러 출륙하다가 중국 팽호에 표류하여 1797년 윤 6월에 북경을 거쳐 서울에 돌아 왔다.


제주와 전남 연안을 따라 완도, 청산도, 여서도, 추자도 등지를 거치는 동안 제주 연안에 도착하기 전에 일본 오도(五島), 대마도 이끼섬으로 표류하는 사례들도 드물지 않게 벌어졌다.


이러한 사례들은 국가의 녹을 먹는 사람들이 기록에 의해 남겨진 것 이지만 이 보다 앞서 표류해 실종된 알려지지 않는 사례들과 그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채 대장은 부연하고 있다. 항로탐사팀과 해경은 바다에서 한시간 정도 정박한 후 항해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시간은 3시 5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벌써 출항한지 1시간이 넘었다. 경비정안에서 양측의 협상을 초조하기 기다리던 기자는 정박시간이 길어지자 탐사대원들이 얼마나 걱정이 될까하는 생각을 하며 경비정을 돌아 떼배가 있는 쪽으로 가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채 대장은 걱정하나 없는 얼굴로 접시에 간식을 담아 먹고 있었다. 대원들은 낚시를 하고 있고, 한 대원은 햄이라는 무선통신을 통해 다른 사람과 무언가 열심히 통신중이었다. 걱정이나 두려움 따위는 찾을 수가 없었다.


탐험이라는게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파도는 이겨나가면 그만이고, 안개는 헤쳐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태초의 원형을 간직한 떼배는 자연에 순응해야 했다. 결국 배는 회항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안개가 도저히 항해를 강행할 수 없게 하고 있었다. 배는 다시 예인되어 화북포구로 되돌어 왔다. 배가 포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정각이었다.


채바다 팀장은 자연이 탐사대원들에게 조금 더 쉬어갈 것을 명령한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이런 일을 자주 겪어봤기 때문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이럴때는 자연에 순응하는게 가장 알맞은 방법이라는 말도 했다.


기자는 포구로 되돌아 오며 숙소를 정해 차분히 쉴 참이였다. 해경경비정과  행정선들도 모두 되돌아 갔다. 대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포구에 돌아온 대원들을 보며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탐험대원들은 한번 배가 출항하면 육지에 내리지 않는다며 떼배에서 밤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출발시간은 6일 새벽 4시로 결정됐다. 기자도 떼배 주변에서 하룻밤을 보내야할 참이다.

▲ 회항하고 있는 떼배탐사단. 주변에 안개가 자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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