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록]아버님을 회고하며
[강연록]아버님을 회고하며
  • 강진신문
  • 승인 2006.05.0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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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 선생의 3남 현철씨의 아버지 회고담

다음은  지난 4월 29일 열린 영랑문학제 개막식에서 영랑 선생의 3남 현철씨가 '아버님을 회고하며'란 제목으로 설명한 영랑문학제 특별강연 내용입니다. 현철씨는 현재 미국 프로리다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오늘 제 1회 영랑 문학제를 맞아 고향 분들을 이렇게 많이 뵙게 되니 그 반가움 이루 표현 할 길 없습니다.
저는 강진 중앙초등학교 제 37회 졸업생입니다. 나이는 올해 일흔 둘, 나이가 많은 죄로 유가족 대표가 되었습니다.


33년이라는 긴 세월을 해외에서 살고 보니 이렇게 원고지를 봐야만 길게 얘기할 수 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주최 측으로부터 국제전화로 아버님에 관한 회고담을 요청받았을 때 아버님 자랑이나 늘어놓는 듯해서 얼른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직계 유족들의 나이들이 머지않아 이 세상을 모두 떠나야 한다는 진리 앞에서는 더 이상 주최 측의 요청을 거부할 길 없어서 오늘 이 자리에 서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또 생존 유족 중 아우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님을 잃었기에 회고담을 공개 할 수 있는 자식은 그나마 열여섯 살 까지 아버님을 옆에서 모셨던 저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도 저를 이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우선 제1회 영랑문학제를 이토록 성대하게 열어주신 강진군 황주홍 군수님을 비롯한 김상수 과장님, 영랑기념사업회의 윤창근 회장님, 이효직 사무국장님, 송하운 간사님, 시와 시학사의 유자효 선생님, 김재홍 교수님, 이경 교수님의 노고에 유가족들을 대신해서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버님의 문학제를 위해 멀리 서울, 대구 등 각지에서, 또 고향 전역에서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 문학제를 이토록 빚내주신 여러분께 아울러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특히 김남조, 고은선생님, 오세영, 윤호병, 이가림, 허형만, 신달자, 강미정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그동안 제1회때부터 지금까지의 영랑문학상 수상자 송수권, 고 김남주, 이준관 시인 그리고 이번의 김남조 선생님께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버님을 기억 할 때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육중한 풍채와 우렁찬 목소리, 흰모시 바지저고리, 검은색 두루마기, 광적인 서양클래식 음악과 국악 애호가, 가야금, 거문고, 북, 양금연주, 술, 풍류, 한량, 항일, 민족주의자등이며 그분이 싫어 하셨던 음식은 밀가루 음식과 떡으로 평생 입에 대지를 않으셨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56년이 흘러 자잘한 기억은 거의 잊혀습니다만 제 생각나는 대로 성의껏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이번 기회가 아니면 유가족들이 여러분께 아버님에 관련된 내용을 알려 드릴 기회가 없겠기에 회고담과 함께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제 3자들이 아버님을 뵈었을 때 건장한 풍채와 우렁차고 맑은 목소리 등 겉모습대로 호탕한 성격을 지니신 분으로 쉽게 간파 하실 수 있었습니다만 그 분의 깊은 내면에는 외모와는 걸맞지 않게 무척 섬세하고 감성적인 면이 강하게 들어나시곤 하셨습니다.


슬픈 일을 당하실 때면 남들이 느끼는 슬픔의 정도 보다 훨씬 강하게 느끼셨고 아름다움을 발견 하셨을 때도 남달리 그에 심취하시는 경향이 강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예가 있겠습니다만 공개된 내용을 말씀드리는 게 여러분께서 이해가 빠르실 것 같습니다.
일본 청산학원 유학 당시 프랑스의 미뇽이란 미인의 사진이 배경이 된 그림엽서를 구하셨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인 청순하고 애틋한 미뇽의 미모에 많이 우셨다고 합니다.
미인의 모습을 보고 우시다니...


다른 분 같으면 기껏해야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고 가벼운 탄식까지는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버님처럼 우시는 경우는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아버님께서는 미뇽의 미모에 심취하신 끝에 그녀의 사진 뒤에 직접 시를 쓰셨는데 그 중 첫 두 구절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달밤에 이슬 아침에
내 미뇽을 안고 울기를 몇 번이던고
청산은 내 청춘을 병들게 하였거니와
오히려 향내를 뿌리워 준다.

시를 외우던 때 시적이던 때
눈물을 누물로 맞으려던 때
그 때 이미 내 청춘은 병들었으나
한그릇 향훈은 늙지를 않네.....

또, 1935년에 처음으로 발간된 영랑시집 겉장을 넘기면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라는 뜻의 영문 시 구절, 즉 “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ever" 라는 키츠의 시가 인용되었음을 여러분께서도 아실것입니다.
이는 아버님이 유미주의파 시인이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여리셨던 아버님이신데 유독 자식들에게만은 너무도 강하고 엄격하셨습니다.


생가의 사랑채 넓은 마루위에 대나무 의자에 앉으셔서 기도하시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시상에 젖어 계신 것을 훔쳐보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아랫마을의 친구들이 그리워 아버님 눈에 안 뜨이도록 몸을 낮게 굽히고 안집에서 나와 사랑채 앞을 쏜살같이 달려 탈출을 여러 차례 시도 했었으나 영점 5초도 안되어 아버님께서는 그 우렁찬 목소리로 “현철아아...” 하고 크게 부르시는 바람에 단 한번의 탈출도 성공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저를 부르신 후 제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호된 매가 저를 기다리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죠.


아버님께서는 밖에 나가 놀면 나쁜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으니 마음에 드는 친구들을 전화로 불러 우리 집에 와서 놀라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60년 전 당시 강진읍에서는 모두 백여대의 전화가 있었고 우리 집 전화번호는 34번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동네 아이들이 재미있게 뛰어 놀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합니다.


봄철에 숨바꼭질할 때면 폭 5-6미터, 길이 20미터 이상 길게 뻑은 두개의 밭에 백여 그루의 모란꽃 나무들이 있었는데 그곳에 들어가 숨는 바람에 술래는 골탕을 먹기가 일수였습니다.

아버님이 만취하셔서 집에 돌아오실 때면 자식들 전원이 대문 앞에 서서 영접을 해야지, 하나라도 빠지고 없으면 그 자식이 화장실에 있다가도 그 자리에 나타날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으시고 없는 자식을 계속 찾으시는 바람에 밤 외출이란 자식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식들이 저녁 해가 지고 어두워진 후에 집에 들어오면, 고등학교에 다니던 누나도 형도 예외 없이 종아리에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오는 길에 친구 집에 들렀다가 생후 처음으로 책상 위에서 화투짝 공산을 보고 하도 그림이 예뻐서 친구에게 “이게 뭔지 참 예쁘다”라고 했더니 “이건 화투의 공산 이라는 거야, 너 갖고 싶으면 가져 가”해서 집으로 갖고 와 책상위에 놓았는데 아버님이 지나시다 이를 보시고 화를 많이 내시면서 이 화투짝의 출처를 추궁 하시자마자 불이 활활 타고 있는 부엌의 아궁이 속에 던져 넣으시며 “두 번 다시는 이런 걸 손대면 안 된다”고 꾸짖으셨습니다.  


그 후 60년이 흐른 지금 까지도 저는 화투의 1월부터 12월까지 순서를 모르고 살아온 바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너무 엄격하신 나머지 어느 자식도 아버님께 안겨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묵은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저를 안고 계신 아버님을 뵙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쯤은 안긴 적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님은 앞마당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지셨습니다.


마침 할아버님이 멀리서 보고 계셨을 때였죠.
방안에 계시던 아버님이 빠른 걸음으로 마당에 내려 오셨습니다.


어머님을 일으키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어머님 앞에 서신 채 “왜 그래? 괜찮아?” 하시며 우두커니 내려다보고만 계셨습니다.
어린 제 생각에는 왜 좀 손잡아 일으켜 주시지 않을까? 하고 이상히 여겼습니다.


후에 어머님께 여쭤 본 결과, 아내도 자식들에게도 어른이 옆에 계실 때는 아버님이 손을 잡아 주거나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유교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여즈음 남편족들이 그랬다가는 이혼 당하기 십상이겠죠?


아버님은 도꾜 음악대학 성악과에 진학을 희망 하셨으나 “큰아들이 광대가 될 수없다. 성악가가 되려면 학비는 못 대주겠다”는 할아버님의 강경한 자세 때문에 성악가 되기를 포기하시고 문학을 통해 정열을 불사르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성악가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아버님은 평생 음악 속에서 사셨습니다.


당시 겨우 3분이면 끝나는 에보나이트 레코드판 SP판 또는 LP판이라 부르는 축음기판들이었죠. 이 레코드판에 실린 서양고전 음악과 각종 국악을 통해 음악 감상은 하나의 일과가 되셨고, 거문고, 가야금, 북, 양금 등, 국악 악기들의 연주 실력은 당시 전문가 뺨치셨습니다.


당시 김소희, 박귀희, 박초월 등 훗날 국창이 된 국악의 대가들이 아버님 초청으로 우리 집에 오셔서 창을 하실 때는 고수를 대동하지 않고 그냥 오셨고 이분들은 전문가 고수 뺨치는 실력을 지닌 아버님의 북에 장단 맞추어 창을 하셨습니다.


이어 아버님의 거문고나 가야금 독주가 끝난 후에는 이 분들은 아버님의 연주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4살 경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아버님은 어린 저를 무릎 위에 앉히시고, 브람스, 베토벤, 모차르트 등의 고전 음악과 거문고 산조, 춘향전, 흥부전, 쑥대머리, 육자배기 등 국악을 감상 하시는 바람에 당시에는 호랑이같이 무서운 아버님의 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어린마음에 안달을 했으나 지금 생각하면 결과적으로는 서양 고전음악과, 우리의 국악에 귀가 열리는 계기가 그 때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불과 3분이면 끝나는 레코드판 이었기에 교향곡 한 곡, 특히 베토벤의 9번 교향곡 같은 경우는 20장 가까운 레코드판이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랑채 방 안에는 이 고전 음악판 앨범이 벽 한 쪽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야 했습니다.


서울에 러시아의 세계적인 바리톤 가수 샬리아핀 또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등 공연 때는 물론이고, 도꾜에 세계적인 교향악단이 오거나 당시 세계 최고의 테너가수 엔리코 카루소 같은 거장들이 왔을 때도 논 밭을 팔아 부산에서 정기선으로, 시모노세끼를 거쳐 도꾜에 가시곤 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비행기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할 때였으니까요.


많은 학자 또는 문단 후배들의 논평대로 아버님의 시가 음악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아버님 자신이 광적일 정도의 음악 애호가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휘문의숙시절인 16세 소년 당시 아버님은 삼일운동에 가담하신 탓으로 대구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시다 6개월 후 출옥 하신 기념으로, “영일대사전”을 구입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영한사전이 없었으니까요. 이 책의 표지를 넘기면 “대구 감옥 출옥기념” 이라는 여덟글자와 함께 당시의 날자가 씌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6.25 동란으로 책 한권 남김없이 가재도구와 함께 모두 약탈당하고 말았음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식들이 해방 전에 아버님 때문에 학교에서 계속해서 선생님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제 누님과 큰형님은 당시, 광주와 서울에서 유학중이었는데 각자 그 반 학생 가운데에서 일본 성으로 창씨하지 않고 우리 한국 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학생들이었습니다.


기숙사에 있다가 방학 때가 오면 선생님은 어김없이 누나와 형을 불러 “이번에도 창씨하지 않으면 새 학기에 학교에 못 돌아온다고 아버님께 말씀 드려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창씨를 하지 않는 이유를 전혀 알 길 없는 자식들은 집에 돌아 와, 이번에도 창씨 하지 않으면 학교에 못 돌아 간다고 아버님께 울며 보챘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응, 다음에 창씨 한다고 그래라”하셨고 이 말을 들은 자식들은 이러한 아버님이 두고두고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강진 경찰서의 일본인 형사가, 사랑채 대문 옆에 부쳐놓은 순찰함에 아버님이 집에 계심을 확인하는 도장을 찍었습니다. 혹시 경찰 몰래 집을 나가 독립운동 대열에 합류 하시지 않았나, 경계하는 일본경찰의 조치였습니다.

일본형사는 순찰함에 도장을 찍고는 사랑채에 들어와 아버님을 두고두고 협박했습니다. “내일은 일요일인데 전체 일본 국민이 일주일에 한번씩 신사참배 하는 날이니, 꼭 참석 하시오” 그러나 아버님은 여니 때와 마찬가지로 “고질병인 배병으로 하루에 수차례씩 설사 하는 사람이 그 거룩한 신사에 가서 설사병이 도지면 나를 또 감옥에 보낼 것이요?” 하고 대꾸하셨고, 일본 형사는 의례히 같은 대답이 나올 걸 알았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띠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전체 일본 국민이면 모두 복종했던 일본정부의 삭발명령 마저 거부하셨던 아버님의 긴 머리는 해방직전에 있었던 할아버님 회갑축하 잔치 기념사진에서도 그 모습을 분명히 뵐 수 있습니다.


해방 되는 날까지 일제의 신사참배, 창씨개명, 삭발명령 등에 불응하셨던 아버님께 일본정부는 직장을 허락할 이 없었고 본인 역시 출근 때마다 일장기에 절을 해야 하는 직장을 바라지도 않았기에 우리 집의 가산은 일제 36년간 있는 재산을 하나씩 곳감 빼먹듯이 빼먹어 차츰 기울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목메 기다리시던 조국의 해방 소식을 접하신 아버님은 만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고, 사랑채 골방 문갑 깊숙이 감추어 두신 태극기를 꺼내셨고 가족들과 이웃 몇 분들은 아버님의 지시에 따라 크레용으로, 서투르게나마 수 백장의 백지 위에 태극기를 그려 해방을 축하하는 강진 동포들의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아버님의 기억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역시 술일 것입니다.


아버님은 술에 강하신 분이었습니다. 두주불사라는 말이 어울렸습니다.
그래서 당시 친구분들은 “영랑은 술 한말을 등에 지고 다니지는 못해도 배 속에는 담고 다니는 분”이라고 아버님의 주량을 빗대어 말씀들 하셨다고 합니다.


하루는 저녁 어두워지기 직전 술에 만취하셔 집에 들어오셨는데 항상 술을 드시면 그러하셨듯이 이날도 기분이 좋으셔서 양팔을 들어 춤추시며“비제”의 오페라“칼멘”중 “투우사의 노래”.“도레야 돌돌 도래야돌”을 원어로 우렁차게 노래하시고는 잠깐 부엌에 들어가신 어머님께 뭐라고 말씀하신 걸 어머님께서 못들으셔서 대답이 없으시자 “당신 어디 갔어?”하고 고함을 치심과 동시에 마루에 있던 연초록색 사기요강을 힘껏 발로 차 내던지셨습니다. 60년 전의 당시에는 어느 집에나 밤에 먼 화장실에 가지 않고 마루위에 요강을 비치해 소변을 보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죠.


이렇게 마당에 떨어진 요강은 모두들 깨진 줄 알았는데 사기가 어찌나 두꺼웠던 지 멀쩡했고 그 후로도 우리가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오랫동안 사용했었습니다.
휘문의숙 시절 축구선수였던 아버님은 강진 제1의 연식 정구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늘의 테니스 공 보다 훨씬 부드러운 아주 말랑말랑한 공을 사용했기에 연식 정구라고 하죠? 서울을 거치지 않고 도꾜에서 직수입한 정구 기술로 우리 집 사랑채 동쪽 끝에 자리 잡은 정구 코트에서 아버님은 당시 이형욱, 김현문, 김현장등 친구 및 후배들과 틈나시는 대로 정구를 즐기셨습니다.


그런 인연 때문인 지 그 후로도 강진 새 중앙의원 원장이었던 김영배박사가 학생 시절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두 차례나 우승을 하는 등 당시 강진 선수들의 정구 실력은 전국에서도 인정받을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한 손에 흰 서류를 든 백발노인 한분이 사랑채 마루에 앉아 계시는 아버님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저는 호랑이 같은 아버님께는 감히 여쭤 보지 못하고 안집으로 들어가 어머님께 그 이유를 여쭤 봤습니다.


어머님은, 그 노인이 20년간 우리 집의 논 네 마지기 800 여평을 농사지어온 소작인인데, 이제 아버님이 땅의 법적명의를 그 노인 앞으로 바꾸어, 등기필증을 넘겨줬기 때문에, 고마워 아버님께 큰 절을 올린 것 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 후로도 이런 일은 가끔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20년이 넘는 소작인들에게는 이렇게 무료로 농지를 넘기셨던 것입니다.


해방이 되자 아버님은 새 조국 재건사업에 일익을 담당하시기를 열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대 제헌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으나 민심 파악에 서투셔서 실패하셨습니다.


당시 당선된 후보자는 서울의 모 대학에 유학중인 대학생 아들과, 그 친구들을 동원해서 강진군 전역으로 보내 선거운동을 벌였는데, 민심을 제대로 파악 하지 못하셨던 아버님은 그당시에 서울 친척이 내려 보낸 호화판 자가용을 타시고 군 내 각 지역을 순회강연을 하셨으니, 대부분 투표권자들인 가난한 농민들이 지주출신이오, 호화판 자가용 차마저 타고 다니는 후보자에게 표를 줄 이 만무였을 것입니다.


나라 잃은 설음을 시로 간접 표현해 오시던 아버님은 해방 후 그 정열을 애국하는 일에 쏟으셨습니다.
아버님은 당시 우익 단체였던 대한청년단 강진 지부장 직 외에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국민운동의 모체가 되었던 대한독립촉성회 같은 단체에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우익단체에서 활동하는 아버님은 남로당 계열 등 당시 좌익단체들의 테러대상이 되셨습니다.


1948년 봄 어느 날, 생가의 정구코트 뒤쪽과 안채 뒤의 대나무 밭 등 두 곳에서 방화용으로 추정되는 도구들이 아버님을 경호하던 청년단원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도 이 도구들이 방화용임을 확인해 줬습니다.


이제 아버님은 생가의 방화와 자신 및 가족들의 신변 위해까지도 각오 하셔야 하는 긴박한 처지에 놓이셨습니다. 당시 많은 좌익계 인사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는 반면, 우익계 지도급 인사들도 좌익계의 테러에 번번이 희생되던 민족비극의 시대였습니다.


전 가족이 서울로 이주 하도록 만든 또 다른 동기는, 자식들의 교육 문제였습니다.
평생 직장 한번 갖지 못 했던 아버님은 서울에 유학 중인 두 자식들의 하숙비에 압박을 받아 오시던 중, 설상가상으로 셋째인 저마저 형들이 다니던 학교에 입학 하게 됨으로써, 더욱 재정적인 압박을 받게 되셨습니다.


드디어 아버님은 저의 중학교 진학을 두 달 앞두고 서울 이주를 결정 하셨습니다.
평생 사랑하셨던 고향 강진 집을 양모씨 에게 파시고 서울 신당동 집으로 이사하신 것이 1948년 여름의 일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서울 이주 후에도, 지금의 예총전신이었던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등 문화단체에서 열심히 일을 하셨고, 당시 문우들인 김광섭 시인, 문학평론가 이헌구선생, 시인 박목월 선생, 시인 서정주 선생등 여러분과 거의 매일 교우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자 댁으로 아버님을 찾아오는 문인들의 수가 차차 늘어났습니다.
그 중에는 일제 때 친일행각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던 분도 끼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님이 아버님께 여쭤봤습니다. “아무게 선생은 친일문학 작가로 알려 져 있는데 아버님께서 그런 분과 교류하셔도 좋습니까?”대충 이런 내용의 질문이었습니다.


아버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네 말의 뜻을 알겠다. 그러나  일제 시대 때 친일 하지 않고는 밥을 먹지 못할 처지인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분들까지 제쳐 버린다면 친일파 아닌 항일 문인수가 몇이나 되겠느냐? 그 보다 악질 친일파가 아닌 한 되도록이면 많은 문인들을 껴안아서 새 나라 건설에 함께 노력할 기회를 주는 게 나라를 위하는 길일 것이다.”


이러한 아버님 말씀에 형님은 불만스러워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떴습니다. 실로 당시 친일을 하지 않은 문인들의 수는 손가락으로 헤일 수 있을 정도의 극소수에 불과했으니 이제 생각하면 아버님의 말씀이 옳았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비서였던 시인 김광섭 선생님은 아버님의 막역한 친구로, 아버님께 정부에 들어와 새나라 건설에 힘을 모아달라면서, 공보처차장 직과 출판국장 직등, 두 자리를 놓고 양자택일 해주도록 요청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역시 막역한 사이셨던 문학평론가 이헌구 선생님이 공보처 차장 직에 호감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고 이 선생님께 차장 직을 양보 하신 후 자신은 출판 국장 직을 택하셨습니다.


아무 자리건 조국재건에 이바지 하는 길이라면 만족 하신다는 게 당시 아버님의 소신이셨습니다. 그러나 소신껏 일을 하려는 아버님의 뜻에 반해, 당시 공보처장은 출판행정에 일일이 간섭함으로 써 평생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사셨던 아버님은 끝내 상사와의 타협을 못하시고 재직 7개월 만에 그 자리에서 물러 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출판국장 재직 시 제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중앙청과 제 학교가 가까운 관계로, 학교가 끝나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거의 매일 아버님이 근무하시던 중앙청에 들려, 아버님과 퇴근시간이 맞을 때는 아버님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때 저의 눈에 비친 아버님의 복장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항상 중앙청 공무원 중 유일하게 한복 두루마기 차림이셨습니다.


또 출판국장 취임을 축하하는 전 직원 야유회가 당시 뚝섬 광나루에서 열렸는데 지금은 이 자리가 서울의 중심지로 변했지만 그때는 집한 채 없는 자연 그대로의 강과 백사장과 허허벌판 뿐이었습니다.

전 직원이 수영과 게임 등으로 야유회를 즐기는데 계장급 이상 20 여명의 직원들이 아버님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아버님께 노래 한 곡 들려주십사하고 요청을 했습니다. 저 역시 술에 취하신 후 한 두 두 구절 노래하시는 걸 들어 봤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노래하시는 걸 들어 본적이 없었기에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아버님께서 노래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들 공무원 대부분도 당시 유행했던 가곡이나 대중가요를 기대했겠지만 아버님 입에서는 예상 밖의 시조가 흘러 나왔습니다. 은은하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청산리 벽계수야” 하고 시조가 점잖게 시작되자 청중들의 표정은 놀라움과 실망의 표정으로 변했습니다. 해방 후 4년밖에 안되었을 때니까 일본 노래에 젖어 있던 분들로서는 아마 시조 같은 것은 들어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분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또 아버님 처지에서 보면 당시 대중가요나 가곡을 접할 기회가 전무 하셨고 서양고전음악이나 국악 밖에는 아시는 게 없었으니, 당시 선비들의 세계에서나 통하던 시조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요샛말로 하면 서로가 코드가 안 맞은 것이었습니다.


1950년, 바로 6.25가 터지기 두 달 전인 4월 어느 봄날 씨나리오 작가 석영 안석주 선생이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장지에서 마지막으로 묘에 때를 입힌 후 문우 10 여명이 묘를 둘러앉아 소주 한잔씩을 기울이셨습니다. 고인의 살아생전 미담으로 꽃을 피우던 이들은 갑자기 “자, 석영을 따라서 이 세상을 하직해야할 다음 차례는 우리 중에 누구인가?” 하고 질문을 던지는 어느 분의 말에 이 자리는 일시적으로 숙연 해졌답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른 후 아버님은 맨 먼저 입을 여시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다음은 바로 내 차례일세”하시더라는 겁니다.

그러나 좌중은 풍채 좋고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는 아버님이셨기에 모두들 이 말을 믿지 않고 농담으로 받아 들이셨더랍니다. 그 후 불과 5개월이 좀더 지난 9월29일, 아버님께서는 예언하신 대로 안 선생님의 바톤을 이어 받아 이 세상을 뜨심으로 써 안 선생님의 장지에 참석했던 문우들을 놀라 게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20년 전, 한때 강진의 고향 분들 사이에서는 강진군에서 생가를 사들여 기념관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유품들이 유가족의 비협조 때문에 단 한점이 없다는 소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지방신문에, 저의 친척어른의 말을 인용해서 그와 비슷한 기사가 보도 되었다는 사실도 들은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유가족들의 실정을 너무 몰라서 온 오해였습니다.
1950년 6.25 직후, 우리 가족들이 살던 서울 신당동 집은 인민군들이 아버님과 가족들을 납북할 목적으로 민간인 경비원을 우리 집 정문 앞에 배치해 24시간 우리 가족들의 출입을 감시하고 납치 할 시기를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기 직전에 이미 피신하신 후였기에 아마 혹시 밤에라도 잠시 아버님이 집에 들르시지 않을까하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유가족 역시 이 감시원이 혹 점심이나 저녁 식사하러 잠시 자리를 뜨지 않을까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만반의 탈출 준비를 마치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감시원이 점심때에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전 가족이 탈출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님이 계시는 친척 집으로 가족들이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애당초 아버님은 당시 공보처 차장이었던 이헌구 선생님과 6월27일 낮 2시에 우리 집에서 만나 함께 이 선생님 차로 남하하시기로 이 선생님과 굳은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 지 나타나기로 되어있던 이 선생님은 밤이 늦도록 나타나지 않으셨고 이 선생님이 홀로 남하하신 것을 전화로 확인하신 아버님은 친구의 배신감에 크게 실망하시면서 이 날 밤늦게 농부차림으로 변장하신 후 보리 떼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시고 집을 나서 친척 댁으로 피신하셨습니다. 인민군 서울 진입이 6월28일 오전이었으니 불과 10 여 시간 전의 일이었습니다.


인민군 치하의 3개월간 친척집에 잘 피신하셨다가 9.28 수복당시 아버님은 포탄이 시내 주택지로 마구 떨어져 피해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이 집 방공호 속으로 피신하셨으나 동네 부인들이 계속해서 방공호로 들어오자 자리가 좁아 부인들께 자리를 양보하시고 밖으로 나오시자마자 북으로 퇴각하는 인민군의 포탄파편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신 후 영원히 회복하지 못하셨습니다.


졸지에 아버님을 잃은 유가족들은 온 세상이 슬프게만 보이는 엄청난 충격을 안고 맥없이 석달 전에 탈출했던 신당동 집을 찾아왔었으나 이미 그 집은 옛날 집이 아니었습니다.
대문과 벽만 앙상하게 남아 있고 들창문, 마루 바닥 등이 모두 뜯겨 없어진데다 그 많던 책  한권 남아 있지 않고 가재도구 한점 없이 모두 깨끗이 약탈을 당한 후였습니다.


그러니 유품이란 단 한 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가족들의 처지를 잘 모르시는 친척분이 아마 기자들 앞에서 유가족의 비협조로 유품이 기념관에 한 점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실수를 범하셨던 모양입니다.


이밖에도 고향 분들이 아버님을 위한 행사를 치룰 때마다 주최 측은 이 친척분을 통해 유가족들의 참석을 권유했었습니다만, 그때마다 이분은 “왕복 여비가 얼마냐? 내가 알아서 할테니 오지마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실제로 당시 유가족들의 생활난은 서울 강진 왕복 여비마저도 버거웠던 게 사실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유가족들의 고향 방문회수가 많지 못했던 것입니다.


강진군에서 생가를 사들인 후 복원 공사를 마쳤다는 소식이 있어 마침 제가 잠시 귀국했을 때 기회를 잡아 생가를 보기 위해 내려 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에 살던 생가와는 달라진 점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젠가 군에서 여유가 생기면 옛 생가 그대로 또는 전에 없던 것은 없애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채 앞마당에는 각종 아름다운 꽃으로 화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입구 양쪽에는 어른 키 보다 약간 높은 아름다운 탑이 있었으며 그 때문에 그 마을의 이름을 탑동 또는 탑골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그 탑에 관해 아버님께 이 탑이 어디서 온 것이냐고 여쭤 본적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옛날 이곳은 절터였고, 그 절에 있던 탑들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사랑채 앞이 옛날처럼 꽃밭이 되면 사랑채가 옛날처럼 아름답게 어울릴 것입니다.
사랑채의 지붕은 원래 기와집이었습니다. 왜 있던 기와를 없애고 짚으로 다시 지붕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사랑채의 문간채는 복원되지 않았습니다. 안채와 마찬가지로 사랑채에도 대문이 따로 있었습니다.
사랑채 서쪽과 북쪽 밭에는 네 그루와 여섯 그루씩의 종대로 모란 꽃 나무가 약 20 미터 이상 길게 늘어 서 있어서 백여 그루의 모란 꽃 나무가 우거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옛날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군에서 생가를 안내하는 안내판에 아버님의 일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삭발령 등을 끝내 거부하셨던 중요한 내용들이 누락되어 있더군요.


다음은 세상이 잘 못 알려진 우리 집 어머님들의 성함을 이번 기회에 올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버님이 열네살 때 집안끼리 결정한 두 살 위의 규수와 첫 번째 결혼을 하셨는데 그 신부는 1년 후인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소생이 없이 병사하셨습니다. 그 분의 함자는 김해 김씨 은은자 풀초자, 김은초 어머님이 옳습니다. 세상에는 김은하로 잘 못 알려져 있습니다. 또 아버님이 두 번째 결혼하신 저의 생모 되시는 분은 순흥 안씨요 귀할 귀 연꽃 연자 안 귀련 아머님입니다.

세상에 김씨로 알려진 이유는 어머님의 할머님이 안씨 집안에 첫 결혼하신 후 첫 아들, 즉 저의 외조부님을 낳자마자 곧 과부가 되셔서 후에 김씨와 재혼 하셨기에 법적으로 김씨 성을 따랐다가 후에 원래의 안씨 성으로 복귀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영문판 시 번역 문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한국 시인들의 시가 영문으로 번역된 지 오랩니다만 아직도 아버님의 시는 번역이 안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다른 분의 시보다 어버님의 시 번역이 어렵다는 게 대부분 영문학자들의 의견입니다. “모란이 뚝뚝” 중에서 뚝뚝을 영어로 뭐라 표현하겠느냐? 그밖에도 그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들은 또 무슨 수로 번역하겠느냐? 등등...


그래서 제 바로 밑에 동생 김현태 불문학 교수는 세상 떠나기 전에 내게 하는 말이 아버님 시는 번역 안하는 게 상책 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외국인들이 오리지날 작품의 뜻을 100% 못 새긴다하더라도 그 중 한편 이나마 원작에 가장 가깝게 영문으로 번역된다면 나름대로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간 미국 대학에서 40 여년 간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미국 동포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한국인 시인 겸 교수님께 번역을 의뢰했었는데 번역이 끝난 후 보니 “강물”이라는 제목의 시에 “잠 자리가 서러워 일어났소, 꿈이 곱지 못해 눈을 떴소...”의 잠 자리를 곤충인 잠자리로 오역해서 “Dragonfly”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이 영문 시집 출판을 포기했습니다.


앞뒤 문맥을 보면 곤충의 잠자리로 해석될 수 없었는데 진짜 이 분이 시인이라는 말인가? 다른 곳은 또 얼마나 많이 실수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기더군요. 그냥 변역료만 아무 말 않고 100% 지불하고 말았습니다.


또 지금은 국내의 일류 대학에서 40 여년 간 한국문학 강의를 하시다 은퇴하신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이 한 분 계시는데 그 분과 아버님의 시 번역 문제를 협의 중입니다. 혹시 잘 되면 금년 말 내지 내년 봄까지는 영문 판 시집이 나올 것 같습니다만 그도 두고 봐야하겠습니다.


다음은 유명한 아버님을 두었기에 유가족들이 마음 고생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유가족이 서울로 이사 간 후 15년이 흐른 1963년에 강진 호동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는 어느 분이 7년 전에 수필집을 냈는데 그 책 추천서나 당시 신문 서평 그리고 책 광고문을 보면 저자 자신이 영랑생가에서 태어난 영랑의 손녀로 되어 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유가족들은 이미 팔려버린 1천3백 여 권의 책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전국 도서관에 나가있는 100 여권의 책은 열람 중지 또는 회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도서관측에 알려 선처를 요망했으나 도서관 측은 책 저자가 요청하든 피해자인 유가족이 요청하든 도서관측은 그 요청을 들어줄 수 없고 유가족의 주장이 옳다는 법적인 판결을 받아 와야만 도서관 측은 그 판결문을 근거로 열람 중지 또는 회수 조치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유가족 측은 이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경우를 한 건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분이 어느 시인의 전집을 내면서 그 시인과 아버님과의 평소 친교 관계를 의식한 나머지 아버님에 관련된 내용도 많이 다룬 것 까지는 좋았으나 뜬금없이 어버님의 첩이 서울에 있고 그사이에 아들도 있는 것처럼 각주에 밝힘으로써 유가족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러한 근거 없는 사실은 그 전집의 주인공인 시인의 유가족 중의 한 분이 추측으로 무책임하게 뱉은 말을 그대로 믿고 쓴 실수라고, 저자는 유가족들에게 백배 사죄하면서 고백했습니다. 문제는 생가 관리인까지도 방문객들에게 이 책의 내용을 믿고 아버님에게 첩이 있었던 것처럼 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 군 당국의 사전 교육이 절대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제 궁금하신 분들도 계실 듯하여 유가족의 근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님의 직계 유가족 중 장녀, 장남, 차남, 그리고 제 바로 밑에 4남이 모두 작고했기에 3남 되는 제가 유가족 대표가 되었습니다.


저는 1974년도에 직장에서 미국 주재 요원으로 나갔다가 7년 전에 은퇴해서 지금은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막내 동생 현도는 67세로 유럽 오스트리아에서 40년째 살며 현재는 역시 은퇴생활을 하고 있고 국내에는 누이가 두 사람 등 생존 유가족 수는 4명입니다. 형제자매 중 반은 이미 갔고 반이 남아있는 셈입니다.


현재 지계 유가족 중 손 자녀는 20명이고 증손 자녀는 25명입니다. 손 자녀 중 미국에 변호사, 대학교수, 목사가 있고, 국내에는 장손인 우식군이 현대 자동차 과장으로 있으며 성악가(쏘프라노)가 있고 의사가 둘, 약사 하나, 그리고 세 명의 의사 사위가 있습니다.


증손녀인 피아니스트 성원양은 쏘프라노 성악가의 딸로, 금년 이대음대를 졸업하고 5월에 독일 유학 예정인데 전국음악가협회 콩쿨과 오스트리아 국제 청소년 콩쿨에서 각각1등을 한 재원이며 이번 제1회 영랑문학제에서 모란이 피기까지 등 두 개의 가곡을 부를 어머니의 반주를 맡고 있습니다.


그녀 오빠 되는 성윤군은 고려대 일본어 문학과 재학생으로 일본 무사시노대학교의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돼 유학 중입니다.
끝으로 고향에 사시는 여러분께 유가족들의 소박한 꿈을 하나 말씀드릴까 합니다.


다름 아니고 아버님은 거의 평생을 정든 고향에서 사시면서 발표하신 시의 대부분을 고향집을 무대로 창작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모란꽃, 샘, 감나무, 돌담, 동백꽃, 복숭아꽃, 좀평나무, 은행잎, 대숲, 두견새, 꾀꼬리, 장꽝 등등..., 고향 집이 아니었다면 아버님의 시중 3분의 2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토록 아버님께서는 고향 집을 남달리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평소 그토록 사랑하시던 고향 집, 생가에 아버님의 유해를 모시는 게 지하에 계신 아버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길이라 굳게 믿고 그럴 경우 생가 방문자들도 묘까지 볼 수 있어 더욱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더구나 직계 유가족들이 하나하나 세상을 떠나고 있는 나이들입니다. 이제 마지막 직계 유가족이 사라지기 전에 경기도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계시는 부모님의 묘를 생가에 모시고 싶은 게 꿈입니다만 현행법이 묘지는 주택지에서 5백미터 이상 떨어져야 한다는 조문 때문에 유가족들의 희망이 좌절된 상태입니다.


중앙청 고관을 지낸 어느 분은 주택가에서 5백미터 떨어져야 가능하다는 법조문은 문화재의 경우 예외일 수 있다는 견해를 말씀하시더군요. 56년 전에 돌아가신 유해는 시체라기보다 일종의 문화재의 일부로 간주 할 수 있다는 말씀도 하시더군요.


유가족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가 주변의 주민 여러분이 아버님의 묘 이장을 찬성하느냐 또는 반대하느냐의 여론 추세입니다.
주민 여러분이 반대하신다면 이장할 생각을 접고 그냥 용인에 계속 계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반대가 없으시다면 이장 비용 전액을 유가족들이 책임지고 이장을 추진하겠습니다.


여러분 유가족들의 꿈이, 아니 아버님의 꿈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지루하신 긴 시간 경청 해주신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시고 댁내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앞으로 고향의 여러분들을 전 보다 자주 찾아 뵐 예정입니다.
안녕히들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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