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 성전면 도림리 도림마을
[마을기행] 성전면 도림리 도림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5.12.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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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인 폭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져 내린 비닐하우스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연일 쏟아지는 폭설 속에서 복구의 손길마저 닿지 못한 채 찢어지고 짓눌린 모습으로 방치된 비닐하우스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던 폭설이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날, 성전면 도림마을을 찾았다.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괴바우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은 연포라는 옛 지명이 남아있다.

마을은 연화봉의 지형에 따라 연꽃형국으로 전해지기도 하고 배형국인 인근 신예마을의 위쪽에 위치한 포구형국으로 일컬어지면서 연포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일제시대 성전면 초대면장을 역임했던 마을 출신 윤상호씨가 지난 30년대 시범마을로 육성하면서 옛 지명인 연포에서 도림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 복숭아나무가 많았던 이유에서 마을명이 도림으로 정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마을주민들은 연화봉 아래에서부터 시리샘을 비롯해 오리샘, 도리샘, 아기샘, 개샘 등이 거의 일직선을 이루고 있으며 각 샘에서 솟아나는 물줄기를 일컬어 연화도수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 어귀에는 옛날 짐을 싣고 내렸다는 짐산정, 말을 묻었던 무덤이 있었다고 일컬어지는 몰무덤, 괴바우산 서쪽에 있는 등성이로 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탑등, 벼락을 맞은 모습의 벼락바위가 있는 벼락군지, 크고 작은 세 개의 바위가 함께 서 있어 불리는 삼형제바위, 배락군지 서쪽에 있는 넓은 골짜기로 옛날 홍씨들이 살았던 터로 전해지는 홍골, 호랑이를 속여서 잡는 함정이 있었다는 마을 어귀의 함정굴, 마을에서 인근 랑동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인 잿등고개, 홍골 위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물맞이를 하면 피부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지는 물맞는 골창 등 향토색 짙은 지명이 마을 곳곳에 간직돼 있다.

마을은 남양홍씨가 첫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해남윤씨, 광산이씨, 풍양조씨 등이 옮겨와 마을을 형성했다. 현재 40여호 100여명의 주민들이 인정을 나누며 도림마을을 지켜가고 있다.

폭설의 여파 때문인지 한적하기만 한 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을회관 앞 공터에 서있는 3m 남짓의 돌장승이었다. 다른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돌장승은 내심 신기하기까지 했다.

인기척을 찾아 들어간 마을회관에서 만난 주민들에게 돌장승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 2002년 세워진 돌장승은 서울에서 생활하는 마을 출신이 마을의 발전을 기원하며 세운 것.

돌장승은 마을 입구에 세울 계획이었지만 마을 진입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회관 입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마을주민 김향란(여·72)씨는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살고 있는 출향인들의 애향심이 각별하다”며 “마을 입구의 표지석도 교육장을 지냈던 마을 출신 2명이 건립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을소개를 부탁하자 주민 안순영(여·84)씨는 “일제시대 성전면사무소와 지소 등 관공서가 마을에 있었으며 성전면에서 전기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며 “예전에는 100호가 넘는 큰 마을로 인근에서 부촌으로 소문난 곳”이라고 설명했다.

함께 있던 황순임(여·86)씨는 “마을의 규모는 예전보다 크게 줄었지만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변함없다”며 “농한기에는 마을회관에 모여 팥죽도 함께 끓여 먹기도 하며 정겹게 지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주민들은 출향인의 도움으로 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다. 마을 표지석을 세운 출향인이 모든 경비를 부담해 주민들이 힘겨운 농사일을 잊고 여행길에 올랐다.

이날 주민들은 충남 예산의 수덕사를 구경한 후 돌아오는 길에 고창에서 온천욕을 즐기며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도림마을은 청소년 교육에 열정을 가진 곳으로 유명하다. 지난 88년과 89년 연 2회 강진군 모범 4-H회 마을로 선정됐으며 다음해인 90년에는 전라남도 모범 4-H회 마을로 뽑혔다.

또 마을에는 광복 이후 마을주민 이양수씨가 작사, 작곡한 청소년의 노래가 전해진다. 마을의 단합과 협동심을 고취하기 위한 내용을 담은 이 노래는 마을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일깨워줬다.  

도림마을 출신은 주민들의 높은 교육열로 교직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많다.

장흥교육청 교육장을 지낸 이준호씨, 목포교육청 교육장을 역임한 이승률씨, 광주에서 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는 윤병현씨, 화순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는 윤재평씨를 비롯해 윤기석씨, 조경학씨, 이경미씨, 김영희씨 등이 교편을 잡고 있다.

또 마을 출신으로는 서울 강동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조치현씨, 서울 남대문경찰서에서 재직하는 김두호씨, 성남시청에서 근무하는 김충호씨, 영암 삼호에서 한라그룹 차장을 맡고 있는 김성식씨, 전남도청에서 근무하는 이병준씨, 광주에서 코리아나호텔을 운영하는 윤주흠씨, 강진군청 홍보계에 근무하는 김정식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폭설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을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다 굴뚝에 피어나는 연기를 따라 들어간 집에서 만난 윤삼현(62)씨는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직도 아궁이를 사용하느냐는 물음에 윤씨는 “예전의 온돌방 위에 기름보일러를 설치했지만 아궁이를 없애지 않았다”며 “요즘 기름값이 많이 올라 군불을 지펴서 난방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기록적인 폭설에 대한 얘기가 오가면서 윤씨는 “신예마을 등 인근에서는 폭설피해가 많았지만 다행히 마을에서는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며 “5농가에서 비닐하우스 10여동이 내려앉는 피해를 입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80년대 마을이장을 맡기도 했던 윤씨는 “이장일을 보던 때만 해도 80여호 240여명의 주민들이 생활하던 마을이었다”며 “주민들의 교육열이 높다 보니 외지로 나가는 자손들이 많아졌고 마을의 규모도 예전보다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또 윤씨는 “마을의 농경지가 1천 두락을 넘는 부촌이었다”며 “일제시대 경찰서장이 새로 오면 마을로 인사를 올 정도로 마을의 위세가 대단했었다”고 덧붙였다.

올해 32마지기 농사를 지은 윤씨는 45가마만을 농협에 수매했을 뿐이라고 했다.

윤씨는 “ 서울에 살고 있는 자식들에게 보낼 쌀과 식량으로 쓸 요량으로 40여가마는 정미했지만 150여가마는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며 “지난해보다 1만원 이상 폭락한 가격에 일년 농사를 판매할 생각만 해도 억울하기만 하다”고 푸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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