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웰컴투 동막골? 웰컴투 동막동 !
[창간특집]웰컴투 동막골? 웰컴투 동막동 !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5.11.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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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천 동막동 마을, 영화 속 동막골과 비슷한 사연 화제
첩첩산중에 이름 같고, 6.25 전쟁 아픈기억
주민들 "전쟁은 감상적이지 않았다"

▲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포스터.
옴천면 소재지에서도 동쪽으로 10리는 떨어져 있다. 마을뒷쪽 재를 넘으면 산 험하기로 소문난 장흥 유치면 땅이다. 지금은 도로가 뚫려 마을진입이 쉬워졌지만 6.25 전에는 말그대로 첩첩산중에 마을하나 달랑 있는 형국이었다.


옴천면 동막동. 관객 800만명 끌어 들이면서 최고의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웰컴투 동박골’과 비슷한 마을 이름이다. 마을을 의미하는 ‘골’은 ‘동’과 함께 쓰는 표현이므로 동막동과 동막골은 같은 이름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옴천 동막동의 오래전 역사가 영화속 동막골의 이야기와 닮은 점이 많아 관심을 끈다.

영화의 줄거리는 1950년 치열했던 한국전쟁 중 깊고 조용한 산촌마을에 미군과 국군, 인민군이 함께 들어와 갖가지 헤프닝이 벌어지고 나중에는 마을주민들의 순수함에 감동한 군인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비행기의 폭격을 다른곳으로 유도해 주민들을 지킨다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순수함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마을 소녀 여일이 총탄에 맞아 쓰러진 장면은 이 영화의 접점이다.


1950년 9월 옴천 동막동. 강진과 완도, 진도, 해남등지의 경찰들이 인민군과 빨치산에 밀려 유치쪽으로 후퇴하면서 동막동으로 들어왔다.

동막동 뒷산의 허골은 유치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외지사람이라고는 1년에 한번 구경하기도 힘든 마을에 총을 든 경찰들이 들어오자 주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당시 마을에는 30여가구, 2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경찰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몇일 동안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나 몇 일 후 빨치산대원 100여명이 경찰의 뒤를 쫓아 마을로 진입해 왔다. 경찰은 유치쪽으로 이미 후퇴해 버렸기 때문에 별다른 총격전은 없었다. 마을주민들은 빨치산이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빨치산 부대는 20여일 동안 마을에 머물렀다.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 부대 지휘부가 있던 마을윗쪽의 한 집에서 이들에게 밥을 해주던 30대 후반의 여자가 있었다. 

  

▲ 옴천 동막동 주민들이 막 배달된 강진신문을 읽고 있다.
당시 19세였던 동막동 주민 차석용씨(74)는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그렇게 착한 아주머니였고 마음씨도 고왔다”며 “다른생각 없이 집에서 머물고 있는 손님들을 대접한다는 심정을 밥을 해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을의 불행은 곧 바로 찾아왔다. 경찰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하면서 빨치산이 후퇴했고, 마을은 다시 경찰의 점령지가 됐다. 경찰은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한 다음 빨치산 은신처를 없앤다며 30여채에 이르는 초가집을 불질러 버렸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에게 밥을 해주던 ‘착한 아줌마’가 마을앞에서 경찰에게 총살형을 당하고 말았다.


몇일 후 마을사람들이 돌아 왔으나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남아있는 집이 없었다. 청천날벼락을 겪은 주민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나버렸다. 남아있는 몇몇 주민들이 다시 집을 일으켜 세워 지금까지 15가구 30여명의 주민들이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다.


차석용씨는 난리가 있기 전의 마을을 천국으로 표현했다. 주민의 생일이면 항상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잔치를 했다. 마을주민들의 단합심이 하도 좋아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바깥 학교에 가지 않았지만 마을 서당에서 글을 배웠고, 마을은 동수(洞首)라는 직책을 가진 나이든 어른이 이끌었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과 너무 흡사했던 마을풍경이지만 영화속 장면과는 달리 동막동을 불길로부터 지켜주던 정의로운 군인 아저씨들은 실존하지 않았던 셈이다.


차씨는 “당시 산골마을은 우리 마을과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다”며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전쟁은 그렇게 아름다운 게 아니였다”고 한숨지었다.


동막동은 요즘도 교통이 불편하다. 노인들은 바깥 출입이 어려워 일주일에 한번 찾아오는 강진신문이 유일한 소식통이다.


동막동에서 두 번째로 젊은 사람인 박흥권(46)씨는 “마을에 특별한 소득원이 없어 농한기에는 소일로 시간을 보내는 주민들이 대부분이다”며 “마을이 잘살게 되어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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