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눈의 수녀는 45년 동안 강진의 자녀를 길러냈다
푸른눈의 수녀는 45년 동안 강진의 자녀를 길러냈다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5.1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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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신문 선정 올해의 인물 양노린 수녀]수상 소감 "나는 고생한 것 없어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휴가 즐겨

▲ "나는 고생하지 않았어요" 올해의 인물상 수상소감을 묻자 양노린수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1961년 34세 때 강진에 정착해 지금은 79세가 된 양노린 수녀는 훗날 이 세상과 이별하면 강진땅에 묻히는게 소원이다. 양노린수녀가 소속된 사랑의 씨튼수녀회 소속 수녀들이 작고하면 담양지역에 마련된 공동묘원에 안장되는게 관례지만 양노린수녀는 그것을 사양 했다.

이유는 무엇보다 강진이 좋고, 또 하나는 오래전 동료 수녀와 다짐했던 약속 때문이다. 양노린수녀는 40년전 미국에서 화물선을 타고 목포항으로 들어오며 동료였던 메리에그너스(토마스아퀴나스.93년 작고)수녀와 죽을 때까지 강진에서 봉사하자고 새끼 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1961년 10월 초. 양노린 수녀가 한국을 향해 출발한 미국 캘리포니아 항구는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차거운 파도가 조그만 화물선의 허리를 유난히 강하게 부딪쳤다.

양노린 수녀를 비롯한 4명의 수녀들은 조그만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100여명의 자원자들 중 엄격한 심사를 통해 뽑힌 정예 수녀들이었다. 가족들이 부두에 나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수녀들을 환송했다.


수녀들은 갖가지 생활용품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화물선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배에는 피아노와 오르겐, 식탁, 침대등 생활용품이 실렸다. 당시에는 6.25 전쟁 직후여서 생필품을 준비해야 한다는 수녀회의 권장이 있었다.


항해시간은 28일이 소요됐다. 양노린 수녀는 “일본 어느 해역을 지나며 큰 태풍을 만나 큰 위험을 겪은 적이 있다”며 “배가 심하게 흔들려 탑승자들이 극도의 배멀미를 하면서 이제는 하느님 곁으로 가는구나하는 생각도 했었다”고 당시를 회고 했다.


목포항구에 도착한 수녀들은 당초 목포에서 교육사업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강진

▲ 양노린 수녀가 수녀원 기도실 십자가 앞에서 잠시 포즈를 취했다.
의 금릉중학교를 인수해 달라는 권장을 받고 한달 후 강진으로 전격 이동해 왔다.


당시 강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낡은 트럭에 화물을 잔뜩 싣고 외국인 수녀일행이 강진에 도착하자 요셋말로 난리가 났다. 움직이는 곳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줄을 지어 따라 다녔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피아노를 구경하기 위해 수녀님들의 거처를 떠나지 않았다.


수녀들은 지금의 강진성당앞에 있던 초라한 기와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처음에는 한 주민이 수녀들의 일을 도왔으나 나중에는 수녀들이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워 직접 반찬을 만들어 먹었다.


푸른눈의 수녀들은 몇 달 후 학교의 교실로 숙소를 옮겨야 했다. 학교 교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일이 매우 불편했으나 그렇게 생활한게 5년이다.


“주민들이 야채를 많이 가져다 주셨죠. 모두 가난한 학부모들이었는데 정성스럽게 쌀을 건네주던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옛날을 회상하는 양노린 수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한국에 자원에서 온 수녀들은 열성이 대단했다. 수녀들은 주로 음악과 무용, 영어를 가르쳤다. 당시 강진에 여성교육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수녀들은 큰 환영을 받았다. 한국인 영어교사가 있었으나 이들은 거의 일본식 영어발음을 사용해 양노린 수녀가 이를 많이 교정해 주었다. 학생들은 노래와 무용을 잘 따라했고 피아노 소리 듣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 피아노는 지금도 학내 수녀원에 보관돼 있다.


양노린 수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가정 방문이었다. 당시 함께 온 모든 수녀들이 가정방문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양노린 수녀의 열성은 대단했다. 자동차는 물론 자전거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새학기가 시작되면 담임을 맡은 반의 거의 모든 학생 집을 찾아 나서 곤 했다. 당시 한 반의 수는 70명 정도였다.


▲ ▲ 60년대 초반 강진에 처음 왔을 때 강진의 풍경과 양노린 수녀.
한번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집을 찾아 갔는데 너무 멀어 한밤중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는 잠을 자다 벌떡 일어났는데, 부모는 선생님이 온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삶은 닭이 올라간 푸짐한 밥상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양노린 수녀는 “아이들과 정말 친하게 지냈어요. 어딜가나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죠. 가정방문 때면 반갑게 맞이해 주시던 어머니들의 얼굴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양노린 수녀는 92년 65세의 나이로 은퇴하기까지 그렇게 한결같은 평교사였다. 이후에는 10년 동안 다시 영어회화 교사로 무보수 근무를 하고 몇 년전부터는 건강이 허락하질 않아 학교내의 수녀원에서 평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양노린 수녀는 9남매의 대가족에서 태어났다. 오빠 두명은 신부님이다. 오빠들의 영향을 받아 18세에 수녀가 되었고, 이후 한국으로 자원해 간다는 말에 온 가족들이 기쁜 마음으로 환송해 주었다.


한때 성요셉고등학교에는 양노린 수녀와 함께 온 4명 외에도 2명의 수녀가 추가로 도착했으나 은퇴 후 대부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중에 양노린 수녀와 강진에서 죽을 때까지 살자고 약속했던 메리에그너스(토마스아퀴나스)수녀는 강진생활을 고수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 1993년 함께 미국을 방문했던 두 사람이 정기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뜻밖에도 메리에그너스 수녀가 암진단을 받게 됐다. 메리에그너스 수녀는 긴급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미국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 양노린수녀가 나영화 수녀의 부축을 받으며 1960년 미국에서 가지고 왔던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죽을 때까지 강진에서 살자고 했던 두사람의 약속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함께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왔고, 강진에서 가장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친구는 그렇게 양노린 수녀곁을 떠나갔다. 양노린 수녀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당시의 슬픔을 떠올렸다.


양노린수녀는 메리에그너스 수녀가 없는 강진생활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장례식이 끝난 후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혼자 비행기에 오를 때 정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얼굴을 떠 올리며 마음을 다잡았지요”


양노린 수녀는 요즘에는 기도와 명상으로 대부분의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느냐는 질문에 아주 짧은 답이 나왔다. “For our student",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는 것이었다.


양노린 수녀는 학생들 이야기가 나오면 어린소녀의 얼굴처럼 금방 환해진다. 얼마전에는 서울의 한 백화점에 들러 에스칼레이터를 타고 윗층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반대쪽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노린수녀님”하고 크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깜짝놀라 뒤를 돌아보니까 한 50대 주부가 정색을 하고 손을 흔들며 내려가고 있었다. 이 주부는 아래층에서 뛰어 올라와 “수녀님께서 중학교 때 저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쳐 주셨어요”하고 정색을 했다.


또 얼마전에는 목디스크치료를 위해 서울의 병원에 들렸을 때 한 간호사가 “제가 성요셉을 졸업했어요”하며 반겨 주기도 했다. 양노린 수녀는 제자들을 만나고, 제자들의 소식을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팔순을 앞둔 노 수녀는 제자들에게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살라고 당부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아직도 한국말이 자연스럽지 못한 양노린 수녀는 강진신문으로부터 올해의 인물상을 받게 된 소감을 묻자 “나는 고생하지 않았어요”라고 대답했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 한 나영화 수녀가 다른 말도 좀 해보시라고 권했으나 노 수녀님은 그냥 웃기만 했다. 생면부지의 땅에 정착해 45년 동안 9천여명의 제자를 길러 낸 푸른눈의 수녀님은 강진땅에서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휴식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양노린 수녀 약력
▲1927년:미국 펜실바니아주 피츠버그시 출생
▲1945년(18세):사랑의 시튼수녀회 입회
▲1944~1960:미국에서 교사로 근무
▲1954~1957년:펜실바니아주 씨튼힐대학교 졸업
▲1961년:대한민국 강진으로 이주
▲1962~1992:성요셉여고 평교사 근무
▲1992: 평교사로 은퇴
▲1992~2002년:영어회화 교사 자원근무
▲현재:사랑의 씨튼수녀회 고문서 정리

 

 

'2005년 올해의 인물' 어떻게 선정했나

지난 2003년에 이어 두 번째 ‘강진신문 선정 올해의 인물’을 선정했다. 대상은 주민들과 출향인들로 한정된다. 이번 심사에는 양노린 수녀와 함께 3명의 후보가 올랐다. 대부분 강진신문 지면을 통해 소개된 분들이다. 심사에 오른 분들은 모두 지역을 위해 헌신한 주민들이였고, 대외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분들이었다.


심사는 관례대로 본사 이사회가 맡았다. 양노린 수녀는 우선 외국인으로서 한 평생 강진의 여성 교육 발전에 헌신한 점이 높이 평가됐다. ‘올해의 인물상’이라는 상의 성격상 올해에 특별한 성과가 있는 사람을 선정해야 한다는 반론이 있었지만 45년을 강진교육에 몸바쳐 온 양노린 수녀의 삶을 올해의 역사로 기록해도 좋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양노린 수녀의 종교를 초월한 일관적인 강진사랑은 오늘날 강진사람과 출향인들이 시금석처럼 소중히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와같은 논의 과정을 통해 강진신문 이사회는 양노린 수녀를 2005년 강진신문 선정 올해의 인물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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