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방문기]평양에 다녀왔습네다
[평양방문기]평양에 다녀왔습네다
  • 강진신문
  • 승인 2005.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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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갑<강진군청 교류협력담당>

‘무신 소립네까? 우리는 고저 선생님들을 남측동포라 부릅네다’.


평양에서 북측 안내원에게 북에서는 우리일행을 어떻게 부르느냐고 물었더니 한 조국동포인데 뭐 특별히 다르게 부르겠느냐며 그저 지역적으로 아래쪽인 남쪽지방에서 온 손님으로 본다면서 그렇다면 남측에서는 우리를 해외동포 취급합네까 하고 오히려 물어오는 것이었다.


단지 분단되어 자유로이 오갈 수 없을 뿐 분명 우리는 한 민족이다. 정치적 사상이 다르고 사회체제가 다르고 살고 있는 지역이 다르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한 뿌리라는 것을 잊고 그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동안 우리들이 반복되어 받아 온 잘못된 학습효과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말로만 듣던 그곳 평양에도 분명 우리와 생김새와 외모, 억양은 다르지만 지구상에 같은 한글을 쓰는 단군이래 함께 피를 나눈 우리의 동포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을 방문하기 전 지난 8월에 황주홍 군수께서 북한을 다녀온 뒤 쓴「나의 평양이야기」를 읽고 종전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내 나름대로 반성은 있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듣고, 또 각종언론매체를 통해 보아왔던 상상의 이미지는 쉽게 바꾸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삭막한 거리에는 붉은 글씨로 쓰여진 선동적 문구와 인민복 차림의 깡마른 남성과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에 얼굴에는 핏기마저 없는 여성, 검정고무신을 신은 어린이 몇 사람이 거니는 그런 초라한 모습일거라는 고정관념이 내가 상상하는 평양의 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한번도 가보질 않았기에 그 이상의 것은 생각할 수 없었던 것도 내 지식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이번 평양방문은 전남도민남북교류협의회에서 지원한 평남 강서군 청산리 농민편의소 준공과 지원사업장 방문을 위한 것으로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와의 연계로 이루어졌는데 남북교류협의회에서 선정한 시군과 의회관계자 98명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광주전남본부에서 선정한 121명을 합해 총 219명으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속한 전남도민남북교류협의회는 도내 시장군수와 시군의회 의장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2003년 4월 남북화해무드에 따라 지방자치단체간의 남북교류활성화를 통해 조국의 평화통일에 기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2003년에 평안남도와 교류협력합의서를 체결한 후 대동군에 농기계수리센터 건립, 콤바인 등 농기계와 영농자재(못자리용 비닐, 이앙기)보내기운동 전개, 강서군에 비닐하우스 건립과 이번 방북기간 중 준공식을 가진 청산리 농민편의소 건립 등 대북교류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단체이다.

이번 방북기간은 1박 2일로 예정된 일정소화를 위해서는 밤잠을 설치고 움직여야만 가능한  빠듯한 일정이었다.

10월 17일 새벽 3시. 설레는 마음으로 광주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갔다. 지난 8월 황주홍 군수가 남북교류협의회 공동대표단 자격으로 북한에 갈 때에는 중국비자를 받아 북경을 통해 그곳에서 다시 고려민항기을 타고 평양에 들어가야만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번거로움 없이 직항로를 이용함으로서 시간과 경비가 절약되었다.

짧은 기간동안 남북관계가 급속히 변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여권대신 사전에 신원조회를 마치고 통일부에서 발행한 방북증명서를 가슴에 패용하고 오전 9시40분에 대한항공 전세기에 올랐다.

전세기는 이륙 후 서해의 공해상을 거쳐 “ㄷ”자 형태의 비행을 통해 55분정도 지나 평양 순안 공항상공에 도착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북한의 산하는 우리농촌지역 어는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다만 획일화된 집단거주지역 즉 북측주민이 거주하는 2층 규모의 집단주택이 다를 뿐이었다.

육로로 가면 훨씬 더 가까울 텐데 이 짧은 거리를 분단 60년이 되도록 자유로이 오갈 수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과 함께 이산가족의 아픔이 전율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비행기가 착륙한 후 맨 먼저 보이는 것은 공항 건물위의 김일성 초상화와 붉은 글씨로 써진 평양이라는 글씨였다. 공항주변에 인민군 복장을 한 사람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걸 보면서 정말 북한 땅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북측에서 제공한 45인승 버스 3대에 나눠 타고 숙소로 이동하는데 버스에는 차량 1대당 5명의 남성안내원이 동승했다.

이들은 우리일행과 복장이 같은 양복차림이었으며 이튿날 평양을 떠나올 때까지 버스통로의 각자 지정좌석에 앉아 우리와 행동을 함께 하였다. 버스에 오른 뒤 우리는 맨 먼저 이틀간의 북한 체류기간 중 지켜야 할 2가지를 제시 받았다.

차창 밖 또는 허용되지 않는 장소에서 사진을 찍지 말 것과 북한체제에 비판적인 내용이나 비하적인 발언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동승한 안내원들은 매우 친절하였으며 무심코 북한주민의 어려운 생활상 등에 대해 물으면 싫어하는 내색을 하기도 하였다.

평양시외 들녘은 거의 추수를 마친 단계였는데 왠지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논 가운데에 여기저기 쌓여있는 아직 탈곡을 마치지 않은 나락더미 사이에서 포대 하나씩을 들고 이삭을 줍는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 북측의 식량난이 심각함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시내쪽에 들어서면서 본 시내 풍경은 건물 외벽 또는 입간판에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조국이여 병사들을 자랑하라’. ‘가는 길이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누구도 우리의 자존심을 건들지 말라’.

그리고 선군정치를 옹호하는 북한주민들을 사상적으로 무장시키기 위한 선동적 문구가 눈에 많이 띄었고 양심을 량심으로 표기하는 등 국문법상의 두음법칙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의 일환으로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하여 2005년을 주체94년으로 부르고 있었다.

시내의 거리에는 전차와 일반버스, 짐칸에 작업인부를 실은 트럭 몇 대가 오갈 뿐 일반 승용차량은 시내 중심가외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었고 길거리 인원의 20%는 자전거를 이용하는데 특이한 것은 자전거의 5대중 1대꼴은 타고 다니는 게 아니라 끌고 다니는 것이었고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빠르다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순안공항에서 40분정도 거리인 평양시내 양각도 호텔을 향했다. 양각도는 평양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대동강 안에 있는 섬으로 마치 한강가운데의 여의도와 비슷하였으나 크기는 훨씬 작았다.

우리가 묵게 될 양각도 호텔은 옥상의 스카이라운지를 합해 47층 건물로 북한내 1급 호텔로 2000년 6월 김대중 전대통령의 6.15방북시 방문단 일행이 머문 곳이라고 했다.

양각도에 들어설 무렵 우리 버스에 함께 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회원으로 어려서 평양에서 자랐다는 나이 드신 분이 버스가 지나는 다리 옆 철교 아래의 유유히 흐르는 강을 가리키며 ‘저게 노래에 나오는 한 많은 대동강입니다’라고 했다.

호텔  21층 숙소에 짐을 풀고 내려다 본 대동강은 뭔가 풀지 못한 한과 설움, 그리고 슬픈 이별의 아픔을 간직한 채 무언의 항변을 하듯 평양시가지의 하얀 시멘트 고층건물을 배경으로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는데 마치 고여 있는 듯 조용히 흐르는 물줄기가 유난히 푸르게 보였다.

숙소에 짐을 푼 뒤 오후일정에 들어갔는데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주체탑과 개선문, 생전에 김일성의 집무실이었다는 만수산궁전을 볼 수 있었다. 2000년 청년들이 직접 건설하였다는 편도 5차선의 청년영웅고속도로와 10여분동안 비포장도로를 따라 강서군 청산리 농민편의소에 도달했다.

농민편의소는 북측에서 부지와 노동력을 제공하고 남측에서 건설자재를 지원한 농민들을 위한 편의시설로서 215평 2층 규모로  이.미용,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건물외벽의 미장상태는 마치 70년대 새마을 사업시 흔히 볼 수 있었던 시골 블록담벼락처럼 매끄럽지 못했고 내부 마감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준공은 하였다지만 실제 사용하기까지에는 다소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곳 편의소는 북한주민들의 집단촌 내에 있어 북한주민의 실상을 제일 가까이 접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편의소 뒤편의 텃밭이 있는 일반주택에 접근하여 사진을 찍으려하자 북측안내원이 제지를 하였다.

다음에 간 곳은 평양시내 평양시 광복거리에 있는 만수대 학생소년궁전이었다. 연면적 10만평방미터 500여칸에 2천명이 수용가능한 공연장과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는 웅장한 건물이었다.

학생소년궁전은 북한의 인민학교 학생(6∼9세)들의 과외활동을 위해 건설된 일종의 어린이 회관으로 이 곳에서는 우수한 실력과 재능을 갖춘 어린 학생들이 다양한 과외 교양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큰 곳은 학생소년궁전, 작은 곳은 학생소년회관이라고 부르며 전국에 140여개의 학생소년궁전 또는 회관이 건설되어 있다고 한다. 소

년궁전 및 회관에서는 학생들이 소조활동을 통해 교양과 각종기술과 기초과학, 그리고 스포츠 등 다양한 과외 활동을 받고 있다고 했다.

소년궁전에서 학생들의 전통 민속놀이를 소재로 한 각종공연을 본 다음 저녁 8시부터 능라도 5.1경기장에서 북한이 세계최고로 자랑하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관람했다.

15만석 규모의 원형경기장에 들어서면서 우리 일행은 그 규모에 압도되고 말았다.

맞은편 배경대(카드섹션)에 앉아있는 2만여명이 100여 장면의 현란한 그림을 연출하고 경기장 바닥을 가득 메운 체조대와 율동대의 빠른 등.퇴장, 지름 1미터가 넘는 대형 써치라이트의 불빛 속에서 빈틈없이 움직이는 무용수와 고공 공중낙하를 서슴치 않는 교예단원들의 묘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박수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하지만 공연중간에 체제수호와 김일성 부자찬양 문구의 색채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이 ‘아리랑’공연을 통해 대외적인 체제과시와 내부결속을 다지는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리랑 공연 중 늙은 아들과 그 어머니가 겹쳐 나오는 영상을 배경으로 북측 성우가 애절하게 아래 시를 읊을 때는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이 세상 이 하늘아래
오직 단 하나의 갈라진 땅 갈라진 나라 갈라진 아리랑이 있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세월에
어제의 어머니가 아들의 모습조차 알아 볼 길이 없고
헤어진 아들이 젖을 먹여 키우던 어머니조차 몰라보게 된
이 비극의 땅
예로부터 화목하게 살아온 우리 민족이 하루아침에
생떼 같이 갈라져 남남이 되어가는 이 땅
세계의 량심이여 대답해 보라
외세가 가져다준 이 비극으로 하여
우리 아리랑민족이 언제까지
이렇게 갈라져 살아야하는가
- 아리랑 공연의 제4장 통일아리랑 중에서 -

공연을 보고 난 뒤 양 옆 스탠드에 꽉 들어찬 수만명의 북한 주민들의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으며 퇴장하는데 왠지 머리 속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광복60주년 기념공연이라지만 인공기가 나부끼는 평양의 중심에서 김일성 찬양문구가 일색으로 펼쳐지는 행사에서 박수치고 감탄까지 했으니 말이다.

예전 같으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일 아닌가. 북한 방송만 들어도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는데 우리는 그 현장에 있었으니 영락없는 보안법상의 북한찬양고무에 동조한 실정법 위반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모 대학교수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정치권에서 진보니 보수니 용공이니 반공이니 하면서 온 나라가 사상논쟁으로 들끓고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더 혼란스런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 바라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진정 헤아릴 수 없었으나 나 자신의 그런 행위가 용인될 수 있도록 변화된 오늘날의 현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저녁 10시가 다되어 아리랑 공연을 관람한 뒤 북한내 최고급호텔이라는 고려호텔에서 북한측 안내원이 동석한 환영만찬이 있었다.

만찬장에는 미모의 북측여성들이 테이블별로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서비스 도중 돌아가면서 무대에 올라 조국분단의 아픔을 담은 내용의 대중가요와 민요를 불러 조국통일의 염원을 남측인사의 감정에 호소하는 듯 했다.

그들은 호텔 종사원이라 했으나 한결같은 미모와 노래실력이 수준급인 것으로 보아 북한의 특정기관에서 남측 인사를 위해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온 전문집단으로 생각되었는데 나뿐만아니라 방문단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만찬이 11시가 가까워지면서 술기운이 돌자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건배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하나다’. ‘통일을 위하여‘. ’우리가 남이갖. ’통일 통일 통일’ 등등.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과 함께 좀더 심사숙고하지 않고 분위기에 편승해버리는 우리 일행의 즉흥적인 냄비근성이 자칫 저들의 보이지 않는 꿍꿍이속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스러운 생각이 지금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만찬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평양의 거리는 너무 어두웠다. 가로등이 100여미터마다 설치되어 있었으나 그 밝기가 바로 그 곳에 가로등이 있다는 걸 인식할 정도로 그 아래 부분만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고 가정집의 전등도 켜져 있는 곳이 드문데다 그 밝기 또한 어두워 북한의 전력사정이 매우 어려움을 실감하게 되었다.

평양의 중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10월 18일, 호텔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뒤 평양시 외곽에 있는 동명왕릉 견학 길에 올랐다.

동명왕은 기원전 277년부터 668년까지 존재한 고구려의 건국시조로 동명왕릉은 총 부지면적이 170㏊로 묘지는 한 변의 길이가 34m, 높이 11.5m인 사각형태의 돌칸흙무덤인데 기원전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현재장소에 이장했다고 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당초 순안공항에서 17시에 인천항 비행기를 타기로 했던 계획이 북측사정으로 갑자기 15시로 앞당겨져 일부 일정이 취소되고 점심식사 전  민예품판매점에 들렀다.

 남측의 관광상품 판매점과 같은 민예품판매점은 품목이 다양하지도 않았고 수량 또한 소량만 비치하여 200여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어떤 품목은 금새 품절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안내원들은 애써 한 개라도 팔려는 주인의식보다 그냥 펼쳐놓고 기다리는 그런 모습이었고 물건을 구하는 절차도 해당물품을 관리 안내원에게서 전표를 받아가지고 별도의 카운터에서 계산을 끝낸 뒤 또다시 전표를 가지고 물건을 수령한 다음 다시 포장하는 곳에서 포장을 해오는 굉장히 불편한 체계였다.


앞당겨진 일정 때문에 예정보다 빨리 순안공항을 떠나 인천으로 오는데 저공비행을 하는지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갈때와는 달리 서해안지역의 육지와 도서가 깨끗이 내려다 보였다.

우리나라의 자연이 그토록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다 어느덧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18일 16:10이었다. 1시간 전까지 남측에 있는 이산가족이 죽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가고 싶어 하는 북한 땅에 있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북한을 떠나오기 전 순안공항에 이르러 이틀 동안 우리와 함께했던 북측 안내원 박현철 동무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우린 행복합네다, 남측동포들은 재벌 독재 하에서 집 장만하고 학생들 과외공부 시키느라 얼마나 고통 받습네까? 우린 고런 거 없습네다”


그렇다. 우리는 통제된 사회에서 물질적인 풍요 없이 허덕이는 그들의 모습이 한 없이 안쓰럽고 안타까웠지만 그들이 느끼는 행복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들이 느끼는 정신적 행복지수는 다른 곳에 있었다.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반드시 물질만이 행복지수를 높여주는 게 아니라는 작은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이다.

통일,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 이틀간의 짧은 방북기간 중 내가 느낀 것은 저들이 왜 개방을 두려워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폐쇄되고 통제된 그들의 사회가 일시에 개방된다면 엄청난 혼란이 올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남측의 일방적 화해 제스처가 곧 통일로 가는 길만은 아니라고 본다. 통제된 사회에서 사상적으로 완전 무장된 북측동포들의 두터운 옷을 벗기는 것은 햇볕밖에 없겠지만 최소한의 경계와 인내를 가지고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상호 신뢰회복이 전제가 되어 가진 자의 포용을 발휘해야만 커다란 빙산이 녹아내리듯 남북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다소의 세월이 흘러야겠지만 아무리 급한들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분단의 땅에서 아픈 과거를 잊고 또다시 동포끼리 총을 겨누는 비극을 반복할 수는 없잖은가!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가을.


뭉개구름 떠도는 창밖의 가을하늘이 유난히 싱그럽고 높게 보인다. 북녘 동포들도 저 하늘을 쳐다보며 통일된 조국에서 남북동포가 한데 어울려 더덩실 아리랑 춤을 꾸는 평화로운 날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만인의 꿈은 현실이다’는 징기즈칸의 말이 생각난다. 그렇다. 혼자서 꾸는 꿈은 그저 한낱 꿈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되는 만큼 우리 모두가 함께 바라고 염원하는 통일이라는 꿈은 머지않아 현실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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