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도공 이용희 선생의 말년
[편집국에서]도공 이용희 선생의 말년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5.09.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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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청자사업소에서 역사적인 청자 재현품이 처음으로 나오자 전국이 시끌벅적 했습니다.

얼마전, 한 장의 사진속에서 당시 이용희 실장의 모습을 보았는데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함께 재현품을 만들었던 조기정(현재 광주시 지방무형문화재)씨는 앞쪽에서 카메라를 향해 재현품을 가슴높이까지 번쩍 들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실장은 뒤쪽에서 작은 청자 한점을 가슴아래에 품고 서 있었습니다. 두 눈은 번쩍거리는 카메라 후레시를 향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땅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훗날 두사람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조씨는 재현사업이 마무리될 무렵 광주로 이주했습니다. 개인요를 운영하면서 사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성공한 도예인으로 우뚝섰습니다. 1986년에는 청자기능보유자로 인정돼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그러나 이용희 실장은 대구 사당리에 주저 않았습니다. 재현품을 가슴에 품고 땅을 바라보던 그의 모습은 고향마을에서 한평생을 청자와 함께 보내겠다는 다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청자재현 작품이 나오기 적전인 1977년 6월 재현사업 기공식에 김성진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내려왔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승용차에 타려던 김 전 장관이 갑자기 이실장을 찾았습니다. 그러더니 김장관은 “당신같은 사람이 청자를 지켜야 한다”며 이실장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이실장은 지금도 주변사람들에게 “그말에 홀려 이렇게 청자에 한평생을 바쳤는지 모르겠다”며 우스겟소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실장은 군대에서 제대한 1964년부터 청자와 동거동락을 해왔습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살 때부터입니다. 청자재현사업이 본격화되고 1986년부터는 기능직 공무원으로 신분이 바뀌어 군청소속의 공무원생활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41년을 청자와 함께 살아온 셈입니다. 

   
그런 이실장이 최근 공무원 나이가 꽉 차서 정년 퇴임을 하게 됐습니다. 실은 정년퇴임이란 표현은 적절치가 않습니다. 이실장의 정년은 지난 1999년 10월이었으나 특별채용 형식으로 올 9월 30일까지 근무가 두차례 연장됐습니다.

군에서 나름대로 최대한 편의를 제공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근무 기간을 더 연장하기도 어려울 것으로 보이고 이실장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퇴임을 해야하는 시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의 뒷모습이 너무 쓸쓸합니다. 청자사업소를 떠나는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습니다. 고향에서 청자를 재현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는데 한평생을 바쳤던 예술인의 뒷모습 치곤 너무 허전합니다.


진정한 예술인의 삶은 저런것이구나 하는 고풍스런 위안도 가져 보지만, 고향에서 한가지만 생각하며 오직 한가지에 몰두한 사람의 말년이 저런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두려움 이 엄습합니다.


요즘 세상에서 예술인의 말년이 쓸쓸하다는 말은 흔한 얘기는 아닙니다. 한국 사회에서 예술은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의 한 분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름있는 도예인들의 작품은 아주 비싼 가격에 거래됩니다. 그들중의 상당수는 노후도 아주 튼튼하게 준비하는 우리나라의 고소득층에 해당됩니다.


강진이 청자를 어떻게 소개합니까. 천년혼이 살아 숨쉰다고 합니다. 그것을 누가 재현했습니까. 이용희 실장이 그 일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청자문화제가 무엇입니까. 그나마 재현된 청자가 있었기에 천년의 신비를 논할 수 있었고 이용희 실장같은 중간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축제가 됐습니다. 


이런 큰 역할을 한 사람의 말년이 이토록 쓸쓸해야 한다면 과연 누가 강진에서 몸을 던져가면서 역사를 만들려 할지 모르겠습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해결 하지 못하던 시절, 고향에서 한눈팔지 않고 한길을 간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잘되면 잘된데로 시기와 질투를 받아야 하고, 못되면 못된데로 주변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합니다. 차라리 고향이 아니였다면 그 사람들의 마음은 훨씬 편했을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적인 희망은 하나입니다. 훗날 나의 진심을 알아주겠지, 나의 노력이 훗날 정당하게 평가되겠지 하는 기대말입니다. 

바로 그 희망 때문에 보릿고개도 예술의 끈을 놓지 않고 넘어 올 수 있었고, 급변하는 산업화 시대에는 반짝거리는 다른 직업에 대한 유혹도 과감히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2005년 오늘, 강진이란 공동체는 도공 이용희씨에게 어떤 희망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돌이켜 보건데 이용희 실장은 자신의 노후를 설계하려면 몇가지 준비를 했어야 했습니다.

우선 정년후에도 청자제작을 계속할 수 있는 개인요라도 마련해 두었으면 훨씬 마음이 가벼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그 자리에서 한가지 일에 모든 것을 바쳐온 도공이 다른장소에 개인요를 차릴 마음을 쉽게 가질 수 있었을까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또 70년대 중반 청자재현 기술을 습득했을 당시 인생의 큰 방향을 개인요 운영쪽으로 잡았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개인요는 정년이 없습니다.

일본의 황수관 가계는 몇 대째 명문 도예가문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이른바 개인요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당시 재정적인 형편도 있었겠지만 도공 이용희씨는 관요(官窯)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던 사람입니다.

이 실장은 누가 청자사업소의 누적적자를 들먹이면 관요에서 생산되는 청자가 강진사회에 다양하게 기여하는 부분을 소리높여 역설하곤 합니다.

여기에 고려시대때 대구일대가 중앙정부에서 운영한 관요였다는 기록이 분명히 있는터에 이용희 실장은 그 맥을 잇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나마 개인요 운영도 운명적으로 불가능했던 처지였던 것이지요.


그런저런 형편이 있었다면 이실장은 정치력이라도 좀 있어서 자신의 노후를 보장할만한 짱짱한 인맥이라도 만들어 놓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습니다.

이실장이 그 정도의 정치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청자재현이라는 외길을 걸어 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용희 실장은 그런 잔재주가 없었기 때문에 묵묵히 대구 사당리에서 청자재현에만 몰두해 왔고,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오늘날 강진청자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용희 실장을 거론할 때 청자재현의 한계에 대해 말하곤 합니다. 청자를 재현만 한다고 해서 장기적으로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용희 실장이 마음 상해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말에 찬성합니다. 강진청자가 변해야 한다는 말도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용희 실장의 다음 세대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다시말해 지금까지는 이용희실장 덕분에 옛날 청자 재현해서 돈벌이를 했지만 지금부터는 재현을 뛰어넘은 보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야 돈벌이를 할 수 있고 그 일은 이실장 후배들이 하라는 것입니다.


도공 이용희는 청자재현에 헌신했다는 사실만으로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인물이고 고향에서 자신만만한 노후를 보낼 자격이 충분한 사람입니다.


관요라는 독특한 생산구조를 운영하고 있는 강진에서 그 속에 종사하는 도공들이 쓸쓸하게 노후를 맞게 해서는 안됩니다. 행정적으로야 나이가 되면 공직을 떠나야 하는게 당연하지만 밖에서 보는 눈, 특히 외지에서 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뜻있는 사람들이 볼 때 “저분이 정년이되서 이제 도공을 그만두었구나” 하고 생각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자칫 “강진의 예술가들은 나이들면 저런 대우를 받는구나”하고 씁쓸해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강진군의 공무원 조직에 이용희 실장이 계속 몸담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용희실장의 말년은 강진이란 공동체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같은 체계가 없습니다. 공직에서 나온 이실장은 민간공동체에 다가가기가 더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군의 역할이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방무형문화재인 도공 이용희씨가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활용하면서 말년에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게 할 묘안은 없는 것입니까.


결국 사람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지역경쟁력이라고 합니다.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 존중받지 못하는 지역은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도공 이용희씨를 통해 경쟁력을 높이는 사례를 하나하나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도공 이용희 선생의 말년은 앞으로 강진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의 미래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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