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네' 서울로 떠나야 하나
'비장네' 서울로 떠나야 하나
  • 주희춘
  • 승인 2002.11.0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진읍의 최고 고택. 후손들 "지역에 기증하고 싶은데..."
경복궁을 중수했던 목수들이 지었던 한옥, 백두산 적송을 가져와 목재로 지은 집, 매년 대학 건축과 학생들이 견학을 오는 한옥...

서울에 있는 옛 고관대작의 집이 아니다. 1910년대 말경 세워진 강진읍 서성리 5번지 고 김현장씨(81년 작고)의 한옥과 관련된 얘기들이다.

지역주민들에게는 ‘비장네(비장이란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집)’란 가옥으로 더 유명한 이 집이 사라질 처지에 놓여있다. 이집 안채와 사랑채 중간지점으로 20년전 그어진 도시계획도로가 내년 초 관통할 예정이다.

그런데 이집은 최근 서울의 한 박물관으로 이전하기로 이미 계약을 마쳤다. 이 집의 가치를 알고 있는 김종옥 문예진흥공단 이사장이 사비를 들여 집을 매입, 서울연극박물관으로 그대로 옮기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집의 역사를 아는 주민들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주민들을 정말 놀라게 하는 것은 김씨의 후손들이 이 집을 강진군이 땅을 제공할 경우 집과 함께 선조들의 각종 유물을 기증하려 했으나 예산 때문에 군이 이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군 관계자는 “기증받는 것을 적극 검토했으나 보상비 보다 집을 이전하는 비용이 더 많게 나왔고 여기에 부지까지 확보해야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소문을 듣고 서울과 경기도 안성, 성남등지에서 집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군의 결정을 기다리던 후손들은 눈물을 머금고 가장 먼저 의사를 타진해 왔던 김이사장에게 매각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형희 전 문화원장은 “저런집은 다른데서 사서라도 강진으로 가져와야 할 텐데 있는 것도 사라지게 됐다”고 통탄해 했다.

공영터미널에서 명동식당 골목으로 들어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기와대문이 보이는 이 집은 건축에 문외한이라도 안동 하회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한옥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고 특이한 것은 사랑채와 안채가 ‘ㄿ 형으로 이어진 행랑채에 의해 완전히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건축학자들은 이 한옥이 “규모가 크지 않지만 아주 특이한 형태의 멋을 갖춘 한옥이다”고 평하고 있다.

고 김현장씨의 장남이면서 이 집의 소유주인 김홍배씨에 따르면 목재는 백두산에서 가져온 적송을 사용했다. 적송은 건축자재에서 최고로 통용된다. 이 나무를 손질하고 집을 지은 목수들은 경복궁을 지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매년 전남대와 조선대 건축학과 학생들이 견학을 오고 있다.

이같은 건축적인 중요성과 함께 고 김현장씨의 생가인 이곳은 강진의 정신이 서려있는 곳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일본 유학파였던 김씨는 60년대 이후 강진을 발전시킨 중심인물중의 한사람이었다는 평을 듣는다. 강진에 정통 서예의 씨앗을 뿌렸고, 강진읍 춘곡마을 앞 소규모간척지는 직접 사비로 조성해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청자사업소가 탄생하게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양광식 문헌연구회장은 “고 김현장씨는 부자이면서 지식인이었지만 위에서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위해 배풀고 살았던 사람이었다”며 “강진읍내에 김씨 집과 같은 고택은 하나라도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의 후손들은 지금이라도 군이 땅을 제공하면 200여점에 이르는 각종 시서화와 함께 집을 무상으로 기증하겠다는 입장이다.

김홍배씨는 “집을 서울로 옮기기로 이미 계약까지 마친 상태지만 강진에 보존되는 방안이 나온다면 어떻게 해서든 서울쪽을 설득하겠다”고 말했다./주희춘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