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나이 마흔일곱, 아직 젊지 않는가
내나이 마흔일곱, 아직 젊지 않는가
  • 강진신문
  • 승인 2005.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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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라숙<도암 항촌리.강진군여성단체협의회 주최 희망편지 공모전 최우수작>
▲ 정라숙씨.

내 나이 마흔일곱! 결코 적지 않은 나이다.


내 인생은 내가 살겠노라고, 하루를 살더라도 내가 선택한 사람과 살겠노라고 호기를 부리며 31세의 늦은 나이에 뚜렷한 직장은 없었지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패기를 자랑하는 그를 믿고 그와 결혼을 하였다.

친구의 소개로 만나게 된 남편은 믿고 따라주는 날 위해 직장생활도 하고 장사도 해 보면서 안락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조금 어렵기는 했지만 행복을 느껴 갈 때 즈음 사랑하는 큰 딸 솔미가 태어나고, 뒤를 이어 나의 아들 한슬이가 태어났고,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삶은 잔잔한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순탄하였다. 그러나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한슬이가 서울 백병원에서 뇌성마비 판정을 받게 되면서 우리인생의 목표와 시간표가 다시 짜여지게 되었다. 누구나 자기의 자녀가 장애를 갖게 된다는 것을 쉽게 받아 드릴 순 없을 것이다.

처음 장애판정을 받는 날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떨리는 다리를 주체할 수 없어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그날의 그 충격은 잊을 수가 없다. 예기치 않았던 이 현실 속에서 우리 부부는 인정하기 싫은 그 어둠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까지 많은 어려움과 부딪혀야만 했다.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할지 몰라. 이 병원 저 병원을 뛰어다녀야 했고, 대전 성모병원에서 치료를 시작하게 된 때부터는 모든 것을 한슬이를 위해 매달려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남편의 고향인 강진에서 아이스크림대리점을 하시던 한슬이 고모부께서 다른 일을 하시게 되어 우리가 그 아이스크림대리점을 맡게 되었다.

재활을 위해 내가 광주에서 한슬이와 병원에 있는 동안 남편은 생계와 한슬이의 병원비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만 했다. 1년쯤 대리점을 운영하던 남편은 친구의 권유로 농약사를 차리게 되었고, 그 무렵 막내 딸 한미가 태어났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남편 도우랴 병원 쫓아다니랴 살림하랴 늘 마음은 바쁘고 정신은 없었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조금씩 좋아지는 한슬이를 보며 우리 가정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를 드렸다. 그렇게 또 다시 안정되어갈 즈음.


IMF가 농촌도 휩쓸고 갈 무렵 농고를 졸업한 남편이 한슬이의 장래를 위해 농장을 경영하고 싶다고 한슬이를 위해 고향으로 왔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해남 북일면에서 경매로 나온 4500평의 축사가 딸린 농장을 인수하게 되었다.

자본금 하나 없어 우리의 큰 시숙님과 작은 시숙님의 도움으로 농협에서 1억원을 대출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엘림농장”이라는 이름으로 유정란을 생산하는 양계업을 시작하였다.


원래 한우 축사로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남편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유정란을 생산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8000마리의 닭을 투입하였다.

뚜렷한 지식은 없었지만, 쑥으로 녹즙을 만들고 온갖 자연친화적인 방법을 도입해 계란의 질을 높이려 애쓰는 남편을 보면서 이제야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 같은 생각에 내 마음은 뿌듯하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없어서였는지 첫 번째 투입한 닭에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이에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돈을 끌어 모아 다시 병아리를 투입하고, 새로운 판로도 개척하기로 했다.

서울 E마트 본사를 직접 찾아가서 직접 생산한 유정란을 홍보하였다. 다행히 친환경적 사료의 도입 등 좋은 품질을 인정받아 “반석”이라는 회사를 통해 E마트로 납품을 하게 되었고, 판로가 새로이 개척된 우리로선 더욱 양계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렇지만 암탉은 1년 정도면 알 생산이 중단되고 또다시 병아리를 추가해야만 했다. 또한, 시설비도 추가해야 하고, 사료 값은 나날이 비싸져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직접 납품을 시작했고 납품 날짜를 맞추기 위해 밤잠을 설치고, 시간이 아까워 끼니도 배달 나가는 차안에서 해결할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은 5년을 지나고 있었다.

사료 값은 폭등하고 유지비는 감당할 수가 없어 빚을 얻어 이자를 갚고 사료를 사는 마이너스 생활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농협의 대출금과 다른 금융기관들의 이자를 제대로 갚지 못해 매번 언짢은 전화를 받아야만 했고, 농장도 목회를 하시는 시숙님의 명의로 경매를 받은 터라 물질적 정신적 큰 누를 끼치게 되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목숨과 같은 농장을 처분하게 되었다. 농장이 팔리던 날 그저 막막하고 죽을 것만 같았다. 지금껏 고생했던 그 노력들이 아깝고 억울하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아이들의 앞길에 먹구름이 낄까봐 두렵고 무서웠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던 그때 울지 말라며 눈물을 닦아준 우리 한슬이와 두 딸들의 그 손길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 이대로 주저앉을 수만은 없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자” 하며 다시 힘을 내어봤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지금의 우리에겐 세상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남편은 다시 대전으로 올라가자면 당장이라도 방을 얻을 것처럼 말을 했지만, 난 그것만이 최선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고민 끝에 어머님께 함께 살면 어떻겠냐고 여쭈어 보았다. 막다른 길에 선 우리에게 기댈 곳은 역시 가족밖에 없었다.

눈물을 흘리는 내게 어머님께선 두 손을 꼭 잡으시며 잘 생각했노라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렇게 또 무너진 가슴을 부여안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지난 5월 26일. 막막한 마음으로 찾은 면사무소에서 양은희복지사님의 소개로 강진자활후견기관을 찾았다.

지난 15년 동안 남편의 그늘에서만 안주하며 살았던 내 자신이 무얼 할 수 있을까 내심 앞서는 걱정으로 찾아간 자활후견기관. 그날까지만 해도 그날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었다.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사업단은 영농사업단이다.

넉넉한 덩치만큼 후덕한 마음의 아짐들과 오랜시간 혼자 지내셔서 사람들만 보면 말이 많아져 가끔 핀잔을 듣기도 하는 작천 아저씨.

어눌한 말투에 재치있는 입담으로 웃음을 주는 도암아저씨, 중국에서 시집온 새댁, 그리고, 항상 팀원들의 자잘한 일상과 형편에 세심한 배려를 하다가도 때론 “이 세상에 안되는 일이 어딨냐” 며 안되면 될 때까지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문정국팀장님 이렇게 팀장님을 비롯한 아홉명의 새로운 가족들과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호미질이 서툴러 온몸에 파스로 도배를 해야만 했고, 몇 일후엔 꿈에서도 그 호미를 만나야만 했었다. 스스로를 ‘특공대’라 부르며 작물재배부터 밭 개간까지, 잡초 캐고 돌덩이를 나르면서 그렇게 마흔일곱의 나이로 새로운 발걸음을 딛고 있다.


지금 한슬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힘들었던 시기가 지나가고 내가 자활후견기관에 근무하면서부터 나의 표정이 밝아져 덩달아 아이들의 표정까지 밝아졌다.

학교도 가깝고 교회도 가깝고 아는 사람들도 많아서 좋다는 우리 한슬이는 공부도 제법 잘하며 아는 것도 많은 상냥한 아들로 성장했다.

언젠가 “내가 엄마에게 짐이 된 것 같다”고 말해 눈물 흘리게 했던 착한우리 아들 한슬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로 인해 엄마는 얼마나 큰 기쁨을 얻는지 모른다”고 “넌 나의 가장 소중한 보석”이라고 또한 한슬이를 위해 늘 기도를 잊지 않은시는 많은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다.


우리의 목표는 빚을 청산하는 것이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남편이 성실하게 일하고 있고, 난 그이를 믿는다. 처음해보는 밭일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나 역시도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문팀장님과 자활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다. 나 또한 같이 일하는 팀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 분들의 인생경험을 통해 다양한 삶을 배우며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 소중한 시간들을 발판으로 삼을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혀 보라” “그리고 즐겨라!” 내가 요즘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내 나이 마흔일곱!
절망하기엔 너무 이르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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