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만덕리 보동마을
[마을기행]만덕리 보동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5.07.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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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퍼붓듯이 쏟아지던 장맛비가 소강상태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같이 먹구름만 잔뜩 낀 날씨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비갠 뒤 찾아온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단비로 온몸을 흠뻑 적신 벼들은 나날이 키를 키워간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학정신이 배어있는 다산초당의 초입을 지나 찾아간 곳은 도암면 보동마을. 다산의 위업을 기리는 유품들이 전시된 정다산유물전시관이 자리한 마을은 사시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조선 선조 때 해남윤씨가 처음 터를 잡은 것으로 전해지는 보동마을은 해남윤씨 자자일촌을 이뤄 번성하다 김해김씨, 흥성장씨, 함양박씨 등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현재 25호 60여명의 주민들이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보동마을은 보물을 실은 배가 물위에 떠있는 형국으로 마을명도 보물 보(寶)자를 써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배형국인 마을에서는 배 밑바닥을 파면 마을에 흉사가 일어난다고 하여 따로 샘을 파지 않고 통샘 하나로 온 마을 주민들이 함께 이용할 정도였다. 지난 70년대 초반까지 사용했던 통샘은 마을 정미소 앞 들녘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논으로 소 멍에처럼 생겨서 부른 지명인 멍에배미, 마을과 인근 마점마을 사이의 들녘으로 도암 만덕리에서 가장 큰 들인 들논, 마을 앞에 펼쳐진 들을 통째로 일컫는 보동등, 마점마을과 경계가 되는 등성이로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불리는 양지밧등, 만덕산 줄기로 새 절이 생겨서 부른 새절골, 마을 앞에 있는 등성이인 잿밧등, 마을 서남쪽으로 예전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인 배들이 등의 정겨운 이름이 마을에서 구전되고 있다.


또 인근 논경지 중 토질이 가장 좋은 들녘인 강대판, 마을회관 뒷산으로 밭 가장자리에 묘지가 1기 있어 부르게 된 독뫼, 강대판 아래 지역으로 간척되기 이전 바닷가에 숭어 새끼인 모쟁이가 많아 일컬어진 모치골 등의 지명이 마을 곳곳에 전해 내려온다.


보동마을로 들어서자 ‘친환경농산물 생산단지’라는 입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보동마을은 지난 2003년 인근 귤동, 마점마을과 함께 다산청정미단지를 결성한 후 친환경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보동마을의 경우 4농가가 8㏊의 면적에서 오리농법, 우렁이농법 등 친환경농업을 실천하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윤순칠(48)이장 등 주민들을 만났다. 마을의 귀염둥이인 윤기쁨(4)양의 재롱에 회관에 모인 주민들은 사뭇 즐거운 표정이었다. 윤이장은 “마을이 생긴 이래 해남윤씨가 자자일촌을 이뤄 화합이 잘 되고 인심 좋은 것이 마을의 자랑”이라며 “현재는 타성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지만 다툼없이 정이 넘치는 마을을 지켜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함께 있던 주민 윤재열(77)씨는 마을 내력을 더했다. 윤씨에 따르면 지난 70년대 중반까지 마을 주위에서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는 김발을 만드는 용도로 쓰이면서 주민들의 소득에 큰 보탬이 됐다. 강진만 건너 칠량 봉황마을에서 배에 옹기를 싣고 와 대나무와 바꿔가기도 했으며 멀리 완도, 진도에서도 대나무를 구입하기 위해 올 정도였다.

주민들은 대나무 숲을 ‘생금밭’이라고 부르며 귀하게 여겨왔으나 대나무 수요가 사라지면서 마을 주위에 무성하던 대나무 숲도 대부분 농토로 변모됐다. 윤씨는 “간척이 이뤄지기 전에는 바닷가였던 마을입구까지 드나들던 배들이 대나무를 가득 싣고 돌아가기도 했다”며 “대나무가 무성한 마을이기 때문에 해남윤씨 죽사동파를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마을회관 옆으로 뻗은 마을안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나지막한 토담 위로 가지를 뻗은 감나무, 살구나무에는 여름 햇살을 받아 열매들이 속살을 더해가고 있다. 귤동마을로 넘어가는 잔등에는 예전 무성했던 대나무 숲을 찾아볼 수 있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요동치는 대나무들이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빽빽이 자라고 있었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보동마을에는 작은 바램이 있다. 마을에 보건 진료소가 설치됐으면 하는 것이다. 외지에서 오는 관광객 가운데 응급환자가 발생할 경우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인근 6개 마을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보건 진료소가 들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보동마을 출신으로 국민은행 광주지점장을 역임한 윤복현씨, 성전초등학교장을 지낸 윤재일씨, 농협 장흥군지부장을 역임한 윤재두씨, 여수 남해화학 영업과장으로 근무하는 윤웅현씨, 한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윤성열씨, 광주에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는 윤순관씨,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국제 변호사를 준비하고 있는 윤순익씨, 청와대 대통령정책실 기홍홍보과장으로 있는 윤선영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정다산유물전시관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윤집례(여·70)씨를 만났다. 윤씨는 집앞에 자란 잡초를 없애기 위해 제초제를 뿌리던 중이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마을에 대해 묻자 윤씨는 “마을 앞까지 바다가 펼쳐져 있던 예전의 모습은 보기 좋았다”며 “간척으로 마을의 풍경은 많이 변했지만 주민들의 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고 말했다. 또 윤씨는 “갯벌에서 채취한 고막, 맛 등이 맛이 좋기로 소문났다”며 “만덕리 고막하면 전국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그 명성이 자자했었다”고 소개했다.


윤씨는 “통샘 하나로 식수를 해결하던 시절에는 잔등을 넘어 물을 떠다가 물동이를 채우는 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었다”며 “식구 많은 집으로 시집온 아낙들은 아침마다 물 채우느라 혼났었다”고 회상했다.


올해 농사에 대해 윤씨는 “지난해까지 20마지기 농사를 혼자 지었지만 올해는 몸이 편치 않아 농사를 짓기 못했다”며 “지난 3월 저혈압으로 쓰러져 두달간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달포 전쯤 퇴원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마을에 있었던 만덕분교에 150여명의 학생들로 넘쳐날 정도로 마을이 번성했었다”며 “학생수 감소로 학교가 문을 닫고 주민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주민들 사이의 우애는 변함없는 곳”이라고 마을자랑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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