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2]해암(懈菴) 김응정(金應鼎) 선생
[사설2]해암(懈菴) 김응정(金應鼎) 선생
  • 강진신문
  • 승인 2005.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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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동(三冬)에 뵈옷 닙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굴음낀 벗늬랄 쬔 적은 업건마는/서산에해 지다하니 그를 설워 하노라/


우리귀에 익숙한 이 고전 시조는 조선명종때 학자 남명(南溟) 조식(曺植)선생이 지은 것으로 고등학교 교재에 실려있다. 그러나 이 시조가 병영 출신의 해암(懈菴) 김응정(金應鼎) 선생이라는게 향토학자들의 주장이다.

 정확한 시조의 제목은 문명묘승하작(聞明廟昇遐作:명종임금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지음)이다. 그의 문집에는 이 시조가 선명하게 전해온다.


지역주민들에게 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해암 선생의 경력은 화려하다. 그는 담양의 송강 정철, 나주의 백호 임제, 해남의 고산 윤선도와 견줄 정도로 강진을 대표했던 시가(詩歌)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암 선생의 인품과 효도에 관한기록도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다. 황경원이 지은 해암 문집본서에는 어려서부터 엄숙하고 굳세어서 천길 낭떨어지의 벼랑에 서서 꿈쩍도 않는 절조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충성과 효도를 자기의 맡은 일로 알았으며 청렴과 결백을 후손에게 대대로 전하게 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해암선생은 조정으로부터 벼슬이 내려졌으나 이를 거부하고 강진에 살면서 오직 외로운 선비의 길을 걸었다. 이때문에 그가 남긴 시가는 오히려 정철이나 윤선도의 그것 보다 맛이 깊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해암 선생이 지는 시(4수)와 가곡(8수)들이 강진문헌연구회의 노력으로 번역돼 오늘날 빛을 본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깊다. ‘삼동에 뵈옷닙고...’라는 시조의 지은이가 공식문서에서 해암 김응정 선생으로 바뀌는 일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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