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아킬레스건과 내 이웃들의 정체성
[다산로] 아킬레스건과 내 이웃들의 정체성
  • 김재완 _ 시인
  • 승인 2024.03.04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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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완 _ 시인

기원전 1200여년 전에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영웅 아킬레스가 인간들의 약한 고리로 자신의 이름이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트로이의 왕에게는 헥토르와 파리스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극과 극의 성향과 외모를 지녔다. 조국의 번영과 수호를 위한 헥토르의 용맹스런 용기와 기개는 강대국인 그리스에게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반면에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에게 목숨을 건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철부지 파리스는 아버지인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형 헥토르를 죽게 하였고 트로이의 국가는 멸망한다.
 
결국 파리스는 아킬레스를 유인하여 무장해제한 아킬레스의 발목에 화살을 쏘아 그를 죽게하는데 아킬레스는 그때 트로이의 공주를 사랑하였고 결국 그의 약한 고리는 공주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3200년이 흐른 시대에 살고 있고 여지없이 각자의 아킬레스를 안고 있다. 정치인들은 자녀의 학교폭력과 마약 복용, 갑질이 복병이고, 탈세와 위장전입, 학력 위조, 경력 위조 등은 본인의 자폭이니 누구를 원망하랴- 이를테면 그들에겐 자식들이 아킬레스인 셈이다.
 
흔히들 세상에는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들은 진정 약점이 될 만한 것들에서 자유로운가? 망중한을 즐기면서 때로는 내 이웃들의 웃음소리와 그들이 구사하는 단어와 차림새와 기호식품과 취향을 기억해 본다. 이 역시 소소한 즐거움인데 어쩌랴! 통계의 배신이란 보편적인 것, 통상적인 것, 중간지점의 그것들에서의 일탈을 말함이고, 통계의 오류는 경제적 수치에서 기인한다.
 
수능 1등급이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는 수표가 아니고, 9등급이 부도 수표가 아닌 세상이 용트림하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통계의 배반인가! 교양과 소음의 크기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까칠한 명언을 남긴 리영희 선생 역시 통상적인 지식인들이 장사만 하며 짐짓 조용한 지혜는 뒷전으로 물리고 이익에 아귀다툼을 한다고 일갈한다. 나의 이웃들은 가히 통계청에 잡히지 않는 보이지 않는 손의 온기가 상당하고, 계산서 앞에서만 유독 뭉그적대는 객기는 상당한 표리부동한 불한당이 아니다. 호기롭되 겸손한 표리일체의 기본기를 장착하고 있는 정의로운 갑남을녀들이다. 그들은 버는 만큼 세금을 내며 버는 만큼 쓸 줄도 알고 차림새도 멋지다.
 
누군가 묻는다. 어부인의 손길을 빌리는가?
 
아니네. 옷은 상한선 15만 원 한도에서, 자전거 여행은 하되 차박은 안 하고, 내가 안사람을 흉보기는 해도 다른 이들이 썰을 풀면 인연을 끊는다. 난 그의 그런 철학적인 정체성에 은근히 매료된다. 그런 그가 내 이웃이다. 하루아침에 한 사람의 정체성이 발현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
 
목적이 있는 스타일을 고집하거나 장소에 맞는 워딩을 구사하는 일관성은 타인을 배려하는 또다른 마음이고 정체성이다. 파지를 싣고 가는 리어커를 뒤에서 조용히 밀고 가는 어느 여고생, 비를 맞고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께 우산을 드리고 잠깐 어딘가를 다녀오더니 3만원을 건넨 여선생의 뭉클한 사연 등은 매 순간이 천국이다. 그런 내 이웃들이 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이고 그들에게는 아픈 또다른 내 이웃들만이 아킬레스건이다. 소망컨대 부디 아킬레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무적의 강 스틱스에 아킬레스의 온몸을 담그고 어떤 위험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가기를 그래서 현세에도 우리들의 아픈 아킬레스건이 없기를 기도하며 숭고한 나의 이웃들에게 진심을 바친다.

<희생> 
가냘프게 매달려 흔들려도/너를 향해 혼을 다 한다/화려하게 멍들어 버린 편린/이백여 일 넘게 살아오며 바친 흔적/공중을 가르며 낙엽으로 추락한 채/초췌하게 나뒹굴며 허망을 사그락거린다/세파에 부딪혀 대신한 아픔/속울음으로 타버린 얼굴 힘없이 주저앉아/세월 속 겉을 떠돌다 묻혀/너의 양분으로 속살이 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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