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을 따뜻하게 안은 동문주막과 사의재
다산을 따뜻하게 안은 동문주막과 사의재
  • 강진신문
  • 승인 2024.01.2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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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동성리 사의재길(8) - 사의재(Ⅰ)]

'우리 동네 옛이야기'는 강진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동화로 묶은 우리 강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난해 11월 네 번째 책, '우리동네 옛 이야기-동성리 사의재길'을 출간했다. 이번 책은 장미연·김옥애·강현옥 글, 김충호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강진 사람이 모여서 함께 쓰고 그린 작품집이라 그 울림이 더 크고 우리들만의 소중한 공감대가 있다. 책을 통해 강진은 어떤 곳인지를 어렴풋하게 밝히는 마음속의 '등' 하나가 '반짝'하고 켜지길 기대해본다./편집자 주

사의재

 

 강진을 찾는 사람들은 다산초당은 잘 알아. 다산초당이 그만큼 유명한 모양이야. 그런데 의외로 '사의재'는 잘 모르더라고. 사의재는 다산 정약용이 전남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맨 처음 머물렀던 집이거든.

조선 후기의 실학자(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였던 그가 1801년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의 박해사건 때문에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야.

사의재는 강진 터미널에서 십여 분 거리에 있어. 초당보다는 터미널에서 훨씬 가까운 곳이지.
옛날엔 주모가 국밥과 술을 팔았던 조그마한 주막이었어. 텃밭엔 아욱이 자라고 지나가던 상인들이 잠시 머물러 먹고 쉬어 갔던 곳이지.

그가 사의재에서 사년 동안 머물고 있을 때 동성리 사람들은 만나기를 꺼렸어. 정약용이 죄인으로 귀양을 왔기 때문이야. 하지만 주막집의 주모는 달랐어. 친절하고 다정하게 그를 받아 들였어.

주모는 늘 시름에 잠겨 있는 정약용에게 말을 건넸어.
"나리!"
"........"
"방안에 들어앉아 책하고만 계시지 말고, 아이들을 좀 가르쳐 보시지요."

주모는 아는 것이 많아 보이는 정약용에게 아이들 공부 가르치기를 권했어. 정약용이 좋아하는 음식에 관한 것도 물었지.
"나리! 나리께서는 어떤 국을 좋아하시는지요?"
"난 아욱 된장국을 잘 먹소."
"아욱이야 우리 텃밭에서 쑥쑥 자라고 있지요."

주모는 강진 저두 갯벌에서 캐낸 바지락에 아욱을 넣어 된장국을 끓였어.
"잘 먹었소."
"나리! 많이 드십시오."
"입 맛 잃기 쉬운 여름철엔 이 아욱국이 최고요."

마침내 정약용이 머무는 방(봉놋방)에선 아이들의 글공부하는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어.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된 거야.

정약용은 처음에 천자문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어. 그러나 곧 천자문의 문제점을 깨닫게 됐어.
천자문의 시작인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루 황'을 읽어가다 제자들이 질문을 한 거야.

"훈장님! 이상해요."
"뭐가?"
"하늘은 보통 파란색인데 왜 검다고 하나요?"
"으흠, 그렇군." 정약용은 '천지현황(天地玄黃)'을 '하늘 천, 땅 지. 아버지 부, 어머니 모.' 즉 '천지부모(天地父母)'로 바꿔 봤어.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와 같다. 라는 상대적 개념의 글자들을 만들어 낸 거지. 아, 그랬더니 아이들이 쉽게 이해를 하고 좋아했어.

 

정약용은 그런 식으로 자기가 연구하고 만들어 낸 자료들을 모아갔어. 그러다가 마침내 1804년 '아학편'이란 책을 묶어낸 거지.

아학편은 천자문의 천자를 이천 자로 늘려 우리 아이들이 배우기 쉽도록 만들었어. 사의재에서 공부한 아이들의 천자문 교과서인 셈이지.

정약용은 아이들에게 아학편도 열심히 가르쳤지만 공부방 이름인 '사의재'의 뜻을 깊숙이 심어줬어. 봉놋방 앞에 사의재 현판까지 달아놓고 아이들 마음속에 그 뜻을 담도록 한 거야.

"너도 사의재의 뜻 알지?"
"물론이지."
"처음엔 전혀 몰랐는데 이젠 줄줄 다 외우기도 해." 제자들은 글자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도 했어.
"사람이 살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 도리를 사의재라 하지."
"그렇지."

제자들은 신바람 나게 말을 주고받았어.
"우리가 글공부할 때는 생각이 항상 맑아야 해. 용모도 단정히 해야 하고, 입도 무거워야 하고, 행동도 함부로 하면 안 되고. 이 네 가지를 지키면서 공부해야 한다. 알겠어?"
"하하하. 맞다. 맞아."

제자들은 사의재의 의미를 실천하려고 노력했어.
사의재엔 열다섯 살 된 정약용의 제자도 있었어. 이름은 황상. 황상은 정약용에게 공부를 배운 후 따로 떨어져 공부를 했어. 그래도 제자와 스승의 인연은 특별하게 이어졌지.

어느 날 정약용은 황상을 찾았어. 강진의 시골 한골 마을에 숨어 공부하고 있는 제자 황상을 만나고 싶었던 게야.

"이런 곳까지 와 주시다니요."
황상은 스승을 공손하게 모셨어. 다음 날 아침 밥상도 준비했지.
하룻밤 묵게 된 스승을 위해 모든 정성을 다했던 거야. 노란 기장(곡식의 일종)으로 밥을 짓고 스승님이 좋아한 아욱국을 끓여 대접을 해드렸어.

"국에다 된장을 알맞게 풀었구나."
"부끄럽사옵니다."
"이 구수한 아욱국 맛은 먹어 본 사람만 알지."
"예,"
"아욱으로 죽을 쑤어도 맛이 그만이야."

밥상을 물린 정약용은 아욱이 심어져 있는 텃밭을 바라보더니 황상에게 말했어.
"붓하고 종이를 가져오너라."
황상이 벼루와 종이를 정약용 앞에 가져다 놓았어. 정약용은 시 한 수를 써 내려갔어.
 
집 앞 나물 밭의
이슬 젖은 아욱을
아침에 꺾고
동쪽 골짜기의 누런 기장을
밤에 찧는다.
 
시 속엔 제자가 스승을 위해 준비한 상차림이 들어 있어.
국의 재료는 아욱. 밥은 누런 기장. 그래서일까?

강진 사의재를 찾아온 사람들은 주막에서 옛날 사의재 시절의 아욱국 맛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거야. 아욱은 중국에서는 채소의 왕이라 부른대.

그만큼 영양이 풍부하고 특히 변비에 좋은 채소라나. 중국과 상관없이 강진 사람들도 텃밭에 아욱 씨를 뿌리고 자란 아욱으로 된장국을 잘 끓여 먹고 있잖아.

옛날에 정약용이 제자 황상을 위해 시를 썼듯이 2009년 6월엔 시인 정호승이 사의재를 찾아와 시를 남겼어

정호승은 <다산 주막>이란 시를 읊었어.

1800년대엔 볼품없었던 동문 안 주막이 이젠 유명 시인의 소재도 된 거야. 무엇보다 동성리에 '사의재 길'이란 이름도 생겨났어. 봉놋방이었던 사의재가 이제 바르게 걸어가야 할 길도 된 거야.

 

사의재<정약용이 지은 책들>
정약용은 학문과 인품으로 지금도 사람들 존경을 받고 있어. 그는 1762년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했지. 그는 천주교 신자였어. 영세명은 요안. 정약용은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많은 책을 썼어.

18세기 실학사상을 크게 이루어낸 실학자이기도 하지. 암행어사 시절엔 어려운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썩고 무너진 탐관오리들을 찾아내어 벌을 주기도 했어.

그는 정조대왕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는데 어느 날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신유박해(1801년 순조 1년에 발생한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죄인이 되었어.

죄인이 된 그는 마흔의 나이에 먼 시골인 전남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었지. 강진에 귀양을 왔을 때 맨 처음 들어 선 곳이 동문 주막이었거든. 동문 주막에서 3년가량 머물며 아이들을 가르쳤지.

그때 아학편을 엮으면서 아이들 공부를 가르쳤어. 아이들과 공부했던 그 방의 이름이 '사의재'야.

요즘은 사의재 주변에 한옥들이 많이 들어섰어. 한옥 체험관은 강진 군청에서 운영하고 있어.
바깥 모습은 한옥이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화장실이 완전히 현대식으로 돼 있대. 깨끗하고 분위기가 있어서 체험관을 다녀 간 사람들은 와, 좋았어.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는 거야.

정약용은 사의재를 떠난 후에도 강진에 머물면서 많은 책을 썼어. <경세유표><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의 책들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어.

<경세유표>는 행정제도나 경제를 대폭적으로 개혁하는 내용이 담겨 있고 <목민심서>는 나라 체제를 목민관 중심으로 운영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또 <흠흠 신서>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감옥에서의 규범들이 적힌 책이지. 이 외에도 그는 살면서 총 600여 권의 책을 써낸 훌륭한 선비요, 학자였어. 정약용의 호를 다산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에서 지냈기 때문에 생겨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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