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가장 좋은 처세술은 참는 것이다
[다산로] 가장 좋은 처세술은 참는 것이다
  • 김제권 _ 수필가
  • 승인 2024.01.22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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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권 _ 수필가

중국 한(漢)나라 때 명장 한신(韓信)은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남의 집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밥을 얻어먹으며 자랐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속담이 있듯 성년이 된 한신은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려고 방법을 찾던 중 장차 나라에 용맹스런 장군이 되어 이름을 널리 떨치겠다는 꿈을 안고 무술연마에 매진하게 되었다. 한신의 옷차림은 비록 허름하였지만 항상 허리에 긴 칼을 차고 다녔다.

어느 날 한신이 시장 한복판을 걸어가고 있을 때 마침 그 곁을 지나고 있던 건달이 시비를 걸어왔다.

"이봐! 촌놈 겁쟁이 주제에 꼴사납게 칼을 차고 다녀? 흠 네놈이 진정 용기가 있다면 그 칼로 나를 한 번 찔러봐라! 그리 못 한다면 네 가랑이 밑으로 기어서 가야할 것이다."

건달은 한신의 앞을 가로 막고 보란 듯이 가랑이를 쩍 벌렸다. 한신은 그때 땅바닥에 엎드려 건달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서 갔다. 주변 구경꾼 모두가 낄낄대고 웃으며 한신에게 '겁쟁이'라며 손가락질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한신은 한나라를 세우는 데 크게 공헌하여 초왕(楚王)에 봉해졌다. 그는 금의환향하여 옛날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줬던 그 건달을 만났다. 그는 혹여 앙갚음을 할까봐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한신은 오히려 그 건달에게 중위라는 벼슬을 주고 나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옛날 이 사람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들어가며 망신을 당할 때 왜 내게 칼을 뺄 용기가 없었겠소? 그때 그 모욕을 참지 못하고 이 사람을 찔렀다면 나는 벌써 죄인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내 인생은 망치고 말았을 것이요. 내게 인내심을 가르쳐준 사람이니 이렇게 고마움을 전할 수밖에요."하고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한신의 일화에서 나온 사자성어가 '과하지욕(跨下之辱)'으로 '가랑이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 치욕'이라는 뜻이다.

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를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인생의 큰 포부를 지닌 사람은 사소하고 쓸데없는 일로 남과 다투거나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굴욕을 참고 견디어 내야만 장차 큰 인물로 우뚝 서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루사덕(婁師德)이란 유능한 재상이 있었다. 그는 팔척장신에 큰 입을 가졌으며, 성품이 매우 강직하면서도 일처리에 조심성이 있었다. 그는 본인 잘못도 없이 봉변을 당해도 오히려 겸손한 자세로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며, 얼굴에 불쾌한 빛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하루는 그의 동생이 대주(代州) 자사(刺史)로 임명되어 부임 인사를 왔을 때 처세 방법을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 형제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출세를 하게 된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달이 차면 반듯이 이지러지는 것처럼 부귀영화란 언젠가는 쇠할 때가 있고, 다른 사람들의 시샘도 갑절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시샘을 면하기 위해서 어떻게 처세를 하면 좋다고 생각하느냐?"하고 동생에게 물었다.

아우가 자신 있게 말했다. "비록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곧바로 닦아 내겠습니다. 모든 일처리를 이런 식으로 하여 결코 형님에게 누가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동생의 대답을 듣고 형은 말했다. "아니다, 내가 염려하는 바가 그것이다. 어떤 사람이 너에게 침을 뱉었다는 것은 무척 화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네가 그 면전에서 침을 닦으면 기분을 또 거스르는 일이 되어 상대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화를 낼 것이다. 침은 곧바로 닦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마르게 되었다. 그러니 침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其弟守代州, 辭之官, 敎之耐事. 弟曰, 有人唾面, 潔之乃已. 師德曰, 未也. 潔之, 是違其怒, 正使自乾耳)" 라고 말했다.

『당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건달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간다거나 내겐 아무 잘못 없지만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것이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올바른 처세를 위해 참기 힘든 수모도 견뎌야 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배려와 인내심이 없는 사람일수록 먼저 상대방에게 화를 내고서 "나는 욱하는 성격이지만 뒤끝은 없어"라며 어설픈 변명을 한다. 세상에 화를 잘 내는 성격이란 없다. 우리 주변에 아주 외향적이고 화통한 성격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버럭버럭 화를 내는 못난 사람이 자기 합리화를 하기 위해 흔히 쓰는 언어습관이다.

차라리 구차한 말로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 시키려 하지 말고 "난 정말 치유해야 할 상처가 많은 부족한 사람이야 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어린애 같아"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마음이 편하고 훌륭한 처세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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