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대명사, 관포지교(管鮑之交) 고사
우정의 대명사, 관포지교(管鮑之交) 고사
  • 강진신문
  • 승인 2024.01.1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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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권의 다시 보는 중국의 고전(31)

 

진정한 친구 관계란 무엇일까? 누가 진정한 내 친구일까? 이런 질문은 또래 관계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유치원 시절부터 죽음을 앞둔 노년 시기까지 누구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화두다.

진정한 친구 관계를 거론한 학자와 소설, 수필, 시 등 문학 작품은 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동양 역사에서 진정한 친구 관계를 실증적으로 증명해 준 고사,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빼놓을 수 없다. 이른바 멀고도 먼 2천7백 년 전의 얘기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렇게 오랫동안 우정의 대명사로 전해오는지 알아보자.

관중(管仲BC725~645)과 포숙(鮑淑BC723~644)은 중국 춘추시대 제 나라의 명 재상들이다. 어릴 적부터 두 사람은 친했다. 이른바 죽마고우(竹馬故友)인 셈이다. 집안이 비교적 부유했던 포숙에 비해 관중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머리는 관중이 뛰어나서 포숙은 항시 관중을 중시했다. 특히 가난했던 관중이 종종 포숙을 속이곤 했지만 포숙은 너그럽게 이해하였다.

세월이 흐른 뒤 포숙은 제(齊) 나라 공자 소백(小白)을 섬기고 관중은 또 다른 공자 규(糾)를 섬기게 되었다. 당시 제나라는 양공의 실정(失政)으로 나라가 어지러웠다. 양공의 이복동생 무지 등이 반란을 일으켜 양공을 죽이고, 무지가 군주가 되었으나 그 역시 살해당했다.

결국 제나라의 왕위를 양공의 두 아들 소백과 규가 다투게 되었다. 둘째 아들인 규(糾)는 노나라에 피신 중이었고, 셋째 아들인 소백(小白)은 이웃 나라 소국인 거 나라에 피신 중이었다. 노나라에서는 공자 규를 호송하여 제나라로 보내는 한편 관중에게 군사를 주어 소백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관중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소백이 제나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화살을 쏘아 소백을 맞추었다. 화살을 맞은 소백은 말에서 떨어져 쓰러졌다. 관중은 이 소식을 노나라에 보고하고, 공자 규의 행차를 엿새 정도 늦춰서 귀국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것은 관중의 실책이었다. 소백은 관중의 화살을 맞았지만, 허리띠 장식이었다. 소백의 참모인 포숙은 소백에게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처럼 가장하여 관중을 속이고, 느슨해 진 틈을 노려 즉시 제나라에 들어가서 왕위에 올라버렸다. 그리고 제나라 병력을 동원하여 노나라에서 들어오는 공자 규의 병력을 분쇄했으며 공자 규와 관중은 노나라로 다시 피신해야만 했다.

제나라의 새로운 군주, 소백은 유명한 제환공(齊桓公 BC 730~698)이다. 그는 춘추시대 5대 패자(제환공, 송양공, 진문공, 진목공, 초장왕) 중 최초의 패자(覇者)다.

환공은 노나라에 통고했다. "규는 내 형님이라서 차마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하겠으니 노나라에서 알아서 하라. 그러나 관중은 내 원수이니 그놈을 내 손으로 죽여 젓갈을 담아야 직성이 풀리겠다. 즉시 제나라로 산채로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노나라를 공격하겠다" 노나라에서는 규를 죽였으며, 관중을 제나라에 강제로 보냈다.

 

사실 노나라에서 시백이라는 중신은 관중을 죽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유는 만약에 제나라가 관중을 죽이지 않고 등용한다면 노나라에 큰 해가 될 것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장공은 건의를 묵살했다.

원래 환공은 관중을 죽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등 공신인 포숙이 환공에게 간했다. "왕께서 제나라에 만족하신다면 고혜와 저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왕께서 제후들의 패자가 되고자 한다면, 관중을 놓치면 아니 됩니다" 환공은 수차례에 걸친 포숙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사실 제환공은 당시 일등 공신인 포숙을 재상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포숙이 그 자리를 마다하고 친구인 관중을 적극 추천하는 것에 대해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그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제환공은 포숙의 건의대로 관중을 재상으로 섬기고 모든 정책을 맡겼으며, 그 정책의 효과에 따라 춘추시대 5대 패자 중 첫 번째가 되었다. 포숙은 제환공 왕위 쟁탈의 일등 공신이었지만, 공을 탐내지 않고 제환공을 죽이려 했던 친구 관중을 추천하고 자신은 아랫자리에서 관중을 보좌했다. 이것은 결코 상식적인 일이 아니었다.

후일 관중은 말했다. "내가 가난하게 살던 시절,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나는 더 많은 몫을 몰래 차지하곤 했다. 이에 남이 포숙에게 이를 일러바쳤지만 포숙은 나에게 욕심이 많다고 원망하지 않고, 내가 가난하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나는 벼슬을 하려다가 세 번이나 실패했어도 포숙은 타박하지 않고 자네는 시운을 타지 못한 것뿐이라며 위로해 주었다. 나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항상 맨 뒤에 섰고, 싸우면서도 세 번이나 도망을 쳤다. 모두가 나를 비난할 때 포숙은 '관중에겐 늙으신 어머니가 있네. 관중이 죽으면 그분을 누가 돌보겠나'라고 변호해 주었다.

공자 규가 왕위 싸움에 져서 내가 자살하지 않았을 때, 포숙은 내가 부끄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는 부끄러움을 모르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 나를 낳아 준 사람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

관중은 포숙의 기대처럼 제나라를 안정시키고, 이웃 나라에 위엄을 떨치며 제환공을 천하를 호령하는 첫 번째 패자가 되게 하였다. 관중이 병이 나자, 제환공이 물었다.

"신하들 중에 그대를 대신하여 재상을 할 만한 사람은 누구인가?" "왕보다 신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역아는 어떤가?" " 제 아들을 죽여 삶은 국물을 왕께 바친 사람은 인정에 어긋납니다" " 개방은 어떤가?" "부모를 버리고 왕께 충성하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그럼, 수조는 어떤가?" "제 생식기를 잘라 왕께 충성하였으나, 인정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 포숙은 어떤가?" "포숙은 훌륭한 신하입니다. 단지 그는 옳고 그른 것이 너무 뚜렷해서 신하들 사이가 멀어지고, 간신들에게서 포숙이 상처 받을까 우려됩니다"라고 했다.

관중이 죽자, 제환공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습붕을 재상으로 임명하였으나 습붕이 단명하여 제환공은 포숙을 재상으로 임명하려고 한다. 포숙은 제환공에게 수초, 역아, 개방 등 간신배를 가까이하지 않는 조건으로 재상직을 맡았다. 하지만 제환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간신배를 가까이하자 수차례에 걸쳐 간언하였지만 제환공이 계속 따르지 않자 관중의 예측대로 화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관중이 죽고 포숙마저 죽은 후 제환공은 간신 세 사람을 중용했으며 결국 왕자의 난으로 뒤주간에서 굶어 죽는 비극을 당했다. 천하의 영웅이 제 때 밥 한 끼도 얻어먹지 못하고 굶어죽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 나라의 흥망성쇠는 인재를 어떻게 구별하고 등용하느냐 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진정한 친구 사이란 무엇인가? 관중과 포숙의 관계는 특수한 경우다. 어찌 보면 포숙이 관중의 재능을 높이 사고 끝까지 이해하고 배려해 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생활 속에서 관중처럼 능력은 있지만 약간은 이기적인 친구를 일방적으로 감싸 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제일 좋은 관계란 건전한 서로의 관심과 배려, 서로의 장단점을 정확히 알고 단점은 지적해서 보완 시켜 주고, 장점을 일깨워서 진정한 성공을 이루도록 도와주며 결국 상호 간에 발전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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