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가난한 상념
[기고] 가난한 상념
  • 강진신문
  • 승인 2024.01.1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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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희 _ 현구기념사업회 회장

지난가을이다. 추석을 맞아 차례 예배를 드린 후 성묫길에 나섰다. 얼마쯤 걸었을까.

인적 없는 풀숲에서 호박이 눈에 들어왔다. 덤불 속에 은둔자처럼 숨어 노랗게 익은 호박 한 덩이. 어디서 묻어왔을까.

어떤 손길의 보살핌도 없이 저 혼자서 잘 여문 호박이다. 숲속 덤불 속에서 가난한 햇볕을 쬐며 조석으로 내리는 이슬에 간신히 목 축여 나름 단단히 영글었을 것이다.

이제 이만큼 여물었으니 반드시 나를 필요 하는 이가 있으리라. 요긴히 쓰일 제 나름 역할에 대한 소명으로 몇 날의 잠도 설쳤으리라. 가끔 휘영청 밝은 저녁달을 올려다보며 저를 찾아 줄 손길을 간절히 소망하지만, 깊은 골짜기 숲길을 찾는 발걸음은 없었다.

이렇듯 숲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늙은 호박 한 덩이에서 파생되는 내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둔다.

반역이란 죄명으로 졸지에 멸족지화를 당한 집안의 핏줄, 한 사내의 명운도 잠시 스친다. 밤마다 하늘에 무수히 박혀 광채를 발하는 별들, 그처럼 수많은 사람 속에서 자신과 연결된 사람이 전무하다는 것은 그 얼마나 쓸쓸하고 막막한가.

그 고독 속에서 그의 내면은 더 단단해졌을 것이다. 숲길에서 만난 저 암팡진 호박처럼, 나는 외따른 숲길을 걸으며 이런 몽상에 빠져 지루한 줄 모른다.

메리 올리버란 시인도 나처럼 숲길을 걸으며 상념에 빠졌던가. 그녀는 『블랙워터의 숲에서』란 시로 우리에게 충고한다.

즉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세 가지를 할 수 있어야만 한단다. 첫째는 자신처럼 유한한 생명을 사랑하기, 둘째는 자신의 삶 역시도 그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고 그들을 끌어안기,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들을 놓아줄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놓아주라고. 그녀가 선취한 표현일 뿐 내게도 우연히 마주하는 사물들을 예사롭게 스쳐 보내지 않는 버릇이 있다.

오늘 성묫길에 만난 호박에게 처럼 사물에 말 붙이기를 즐기는 것이다. 혹 자는 이런 성품들을 일러 시인 기질이라고들 하던가.

시인? 시인이란 단어에 불현듯 가슴이 뭉클하며 스치는 시가 있다.

옆집 할매가 차에서 내리는 나를 잡고 묻는다
사람들이 나보고 시인 시인 카던데
그게 뭐라

그게…
그냥 실없는 짓 하는 사람이래요
그래!
니가 그래 실없나
하기사 동네 고예이 다 거다 멕이고
집 나온 개도 거다 멕이고
있는 땅도 무단이 놀리고
그카마 밭에다 자꾸 꽃만 심는
느 어마이도 시인이라…

참 오랫동안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김명기 '시인'

그렇다면 내 속에서도 오랫동안 발아하지 못한 묵은 씨앗처럼 꿈틀거리는 시를 향한 꿈이 있었던가.

오늘처럼 이렇게 홀로 무궁무진한 공상에 빠질 때 감히 꿈꾼다. 겨울 들판의 꽁꽁 언 땅속에서 해마다 봄이 오면 푸른 싹을 내어보리라 벼르는 내 서툰 상념의 부스러기들이 어느 한 날 제대로 된 시어들로 탄생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다.

불시에 다가와 가슴을 툭 치며 달아나는 내 가난한 상념들. 언젠가 시로 환생할 그 씨앗의 겉껍질들을 어루만지며 걷는 숲길의 한적하고 포근한 곳에 자리한 산소, 선조들께 감히 여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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