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그 많던 까마귀떼는 어디로 다 갔을까
[다산로] 그 많던 까마귀떼는 어디로 다 갔을까
  • 유헌 _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 승인 2024.01.0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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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 _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엊그제 많은 눈이 내렸다. 내렸다 하면 폭설이다. 길도, 나무도, 지붕도 한 폭의 수묵화 속으로 사라졌다. 겨울비도 내렸다. 한겨울에 폭우가 내렸다. 같은 날 남쪽은 호우주의보, 영동지방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내가 사는 남도 강진에서 강원도 대관령까지는 승용차로 대략 5시간여의 거리. 한 나라 안에서 폭우와 폭설이 동시에 쏟아진 것이다.

이런 이상기후는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지구촌 곳곳이 몸살이다. 한겨울 홍수로 집채가 떠내려가고, 한여름 눈사태로 마을 전체가 고립되기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꽃도 피고 진다. 요즘 농촌에선 그 흔한 겨울 까마귀떼 보기도 힘들어졌다.

까마귀가 줄어든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기상이변도 한몫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조류 전문가들이 기후변화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고 있으니 말이다. 시베리아 등지에서 주로 서식하는 떼까마귀는 겨울을 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해 우리나라를 찾는데, 지구온난화로 시베리아가 온화한 날씨를 보이면서 떼까마귀 이동이 줄었다는 것이다.

들판에서 까마귀 보기가 힘든 걸 농경지 감소와 보리 재배면적 축소에서 찾는 전문가도 있다. 갈수록 까마귀의 먹잇감이 줄어들어 농촌보다는 일부 도심으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7-80년대만 해도 눈 쌓인 보리밭을 까마귀떼가 뒤덮었으니 말이다. 그 까마귀떼를 쫓아 논두렁 밭두렁을 내달렸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희끗희끗 눈 쌓인 보리밭 까마귀떼, 금세 닿을 것 같아 손에 잡힐 것 같아, 단숨에 논틀밭틀을 내 달린 동심이여. 줄 끊긴 방패연처럼 아스라이 사라져간, 내 유년의 첫사랑 같은 아득한 기억이여, 그 많던 까마귀 떼는 어디로 다 갔을까.
 -유헌 「그 많던 까마귀떼는 어디로 다 갔을까」 전문

하얀 눈을 뒤집어쓴 파란 보리밭의 까만 떼까마귀. 달려가면 금방 맨손으로도 몇 마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하루해가 저무는 줄 몰랐었다. 다가가면 날아가고 다가가면 날아가고... 한겨울 동무들과 함께 찐뽕을 하며 놀던 보리밭도, 그 보리밭의 까마귀떼도 자취를 감췄다. 그 떼까마귀는 사라졌지만 가끔 동네 앞산에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와 옛 생각에 젖게 한다. 여름에도 울고 가을에도 운다. 까마귀는 무리를 지어 서식한다는데 홀로 울고 있으니 더 처량해 보인다.

문득 눈을 맞춘 그 눈빛이 말을 하네, 노지마라 가지마라 비수보다 벼린 왕따, 눈동자 시커멓다고 그리 볼까, 세상도. 시詩의 나이만큼 발자국도 깊어져서, 지워도 드러나는 편견의 긴 그림자, 까마귀 울고 있는 밤, 나도 따라 울었지
-유헌 「까마귀를 위한 변명_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전문

까마귀는 굴뚝에서 금방 나온 것 같은 시커먼 모습에 울음소리까지 음습한 분위기를 풍겨 흉조로 알려져 있으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역사적으로 봐도 까마귀가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길조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나라를 상징하는 고구려의 국조는 세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였고, '견우와 직녀' 이야기 속의 오작교는 까마귀와 까치가 합심해 놓은 사랑의 다리였다.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어치우는 청소동물 역할은 물론 나이 든 어미에게 자식 까마귀가 먹이를 물어다 드리며 봉양을 하고, 새끼가 태어나면 공동으로 새끼를 보살피고 특정 새끼를 돌보는 보모를 두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까마귀의 지혜와 심성, 효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의 편견과 선입견, 타고난 외모 때문에 왕따를 당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라.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라니 왜 하필 그 순간에 까마귀가 날아가야 하나. 고사성어에서 유래한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까마귀는 억울하다. 깜박했다고 '까마귀 고기 먹었냐'고 힐난하는 건 또 뭔가. 억울함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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