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름다운 인생 후반전
[기고] 아름다운 인생 후반전
  • 고인선 _ 시인
  • 승인 2024.01.0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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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선 _ 시인

열두 명의 예선 통과자가 참가상 동상 은상까지 호명되어 단상에 오를 때 점점 다리에 힘이 빠지고 가슴은 왜 그리도 콩닥거리는지, 금상은 나랑 끝까지 손잡고 서로 응원해 주던 부산에서 오신 분이 상기된 표정으로 상을 받으셨다.

"2023년 전국 시 낭송대회 이번 대상은 삼문산 진달래를 낭송하신 고인선 님입니다"하는 사회자의 호명 순간 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침착하자, 침착하자"를 되뇌며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단상에 올라 대상 상장과 상금, 상품을 받으며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짐을 느꼈다.

참가하신 분들의 부러움과 객석의 모든 분의 환호와 박수 속에 기념 촬영을 마쳤다. 꽃다발 하나 없이 단상을 내려오려니 남편이 같이 가준다고 할 때 거절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남편의 전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애써 흥분된 목소리를 진정시켜도 눈물은 오늘을 위해 새로 해 입은 분홍색 저고리 위로 햇살처럼 번지고 있었다. 입상 못 해서 우는 줄로 아는 남편은 "괜찮아 다음에 입상의 기회가 있을 테지"라며 위로했다. "아니야, 여보, 나 대상 탔어! 1등이야" 답하는데 또 울컥했다. "잘했어, 나는 당신이 상 받을 줄 알았어! 당신처럼 열심인 사람이 어디 있을라?"하는 전화기 너머의 남편 목소리도 물기가 어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10여 년 전 마지막 꿈은 산골에 묻혀 자연과 살고 싶다는 남편을 따라 시댁 근처인 주작산 중턱에 터전을 마련하였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는 유행가 가사일 뿐 녹녹지 않은 현실 앞에서 서울 고향을 그리며 사는 시골 아낙이 되어가고 있었다.

북으로 날아가는 새들만 봐도 그들이 부러웠고, 읍내 터미널 근처에서 서울 가는 고속버스만 봐도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요양보호사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마음의 안정을 찾고 보람도 느끼며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가끔 공허함에 가슴 텅 빈 느낌이 들 때 마침 '시인을 꿈꾸는 시니어 모집'이라는 공고를 보는 순간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시어들이 슬금슬금 꿈틀대고 있음을 알았다. 3월 개강식 날 떨리는 가슴으로 '영랑시인학교'라고 쓰인 노트와 필기도구를 받고 이제 나도 시인이 되려나! 하는 마음에 기뻤다. 지도 강사의 가르침과 지도하에 2년 후에는 문학 춘추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으로 등단도 하였다.

가을바람 살랑살랑 불고 하늘의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는 밤. 오감통 야외무대의 화려한 조명 아래 잔잔한 음악이 깔리며 고운 자태 여인의 음성에서 사뿐사뿐 시어들이 춤을 추고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대중에게 전하는 시 낭송 공연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은 또 한 번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시어를 전하는 낭송을 해야지" 그러나 막상 시 낭송을 가르쳐 주는 곳이 없었다.

길을 찾는 이에게는 길이 있다 하였던가! 마침 해남 땅끝 문학관에서 주 1회 2시간씩 낭송 강의를 저녁 7시에 시작한다고 하여 전화 상담을 하였다. 해남 군민이 우선이라고 거절하는 것을 거듭 어렵게 부탁하여 다니게 되었다. 유난히 초 저녁잠 많은 내가 운전해서 40분, 2시간 수업을 듣고 낯선 거리를 되돌아오는 길은 졸음도 혼자서 잠이 들었는지, 가슴 가득 행복을 안고 산골 집으로 온다. 가끔은 고라니나 노루를 마주칠 때도 있지만 무서움도 없었다. 남편은 식탁 위에 저녁 준비와 '사랑해요'라는 메모만 남기고 집을 나서는 나에게 불평 한마디 없이 응원해 주는 나의 60대 후반은 언제나 맑음이다.

올해 초 요양보호사 일을 그만두고, 그간 혼자서 염소 농장을 번듯하게 키운 남편 옆에서 '드림농장' 서열 2위 주인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를 축사 보이는 곳곳에 사인펜으로 크게 써 놓고 중얼중얼 외운다. 오늘은 300마리 염소들 앞에서 큰소리로 시를 낭송하니 선한 눈망울의 아가 염소들은 나를 보고 웃는 것도 같고, 큰 숫염소들은 또 시작인가보다며 낮잠을 즐긴다. 더욱더 정진해서 나를 필요 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서 시 낭송 재능 기부도 하고, 시도 열심히 써서 70세에는 시집 1권을 내는 내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며 살련다. '화양연화' 오늘에 감사하고 즐기면서 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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