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식 별장, 미술관으로 태어나다
김충식 별장, 미술관으로 태어나다
  • 강진신문
  • 승인 2023.12.21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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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동성리 사의재길(7)] 미술관이 된 김충식 별장(Ⅱ)

'우리 동네 옛이야기'는 강진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동화로 묶은 우리 강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난해 11월 네 번째 책, '우리동네 옛 이야기-동성리 사의재길'을 출간했다. 이번 책은 장미연·김옥애·강현옥 글, 김충호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강진 사람이 모여서 함께 쓰고 그린 작품집이라 그 울림이 더 크고 우리들만의 소중한 공감대가 있다.
책을 통해 강진은 어떤 곳인지를 어렴풋하게 밝히는 마음속의 '등' 하나가 '반짝'하고 켜지길 기대해본다./편집자 주

옛 김충식 별장 자리에 세워진 강진 미술관

 


"아이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김충식은 의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거듭 전했어.
사실 최동 박사는 충식의 아버지 때부터 알고 지낸 집 안의 주치의(병을 맡아 치료를 책임 진 의사)였어.

다음 해에 김충식은 또 갑자기 심한 폐렴을 앓게 되었어. 몸에 열이 높게 오르고 추워서 오슬오슬 떨었어. 쿨룩쿨룩 기침이 심해지더니 숨 쉬는 것도 힘이 들었지.

"아들아!" "아버지, 왜 그러셔요?"
"빨리 최동 박사께 연락을 해라." "예, 알겠습니다."

연락을 받은 최동 박사는 서울에서 강진까지 날아서 오듯 급히 내려왔어. 그는 왕진 가방에 청진기와 트리아농 앰플(약 이름)을 담아왔어. 최동 박사의 극진한 치료로 김충식은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된 거야.

폐렴을 앓고 난 후 김충식은 크게 깨달았어.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는 진료가 얼마만큼 소중한지를 알게 됐지. 병을 고치고, 다친 곳을 치료하는 기술의 고귀함을 느끼게 된 거야.

그는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는 인재들을 도와주고 싶었어. 그것이 앞으로 해야 할 마지막 자기의 사명이라 여겼던 거야.

몸이 나아진 김충식은 강진에 '동은(김충식의 호)농장'이란 회사를 만들었어. 그 회사를 잘 운영해서 나온 이익금은 앞으로 의술을 발전시키는 데 후원할 계획이었지.

김충식은 뜻을 단단히 다졌어. '동은농장'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각오가 단단했지. 동은농장 사무실엔 직원들이 10명이나 됐어. 그들은 농사지은 쌀을 강진 군동의 백금 포구를 이용해서 일본까지 보냈던 거야.

가을에 벼를 거둬들일 무렵이면 소작료(땅을 빌려 농사를 지은 사용 요금)를 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였어. 동은 농장 앞은 시장처럼 시끌벅적했지.

관리인 아저씨는 김충식의 친척들한테 들었던 말까지 들려줬어. "그때는 동은 농장 사무실 앞에서 장흥까지 소작료 낼 사람들이 쭉 줄을 서서 기다렸답니다."

아빠가 한마디 거들었어. "엄청나네요. 농장이 아니라 큰 기업이었군요."
"그렇죠. 농장 주인이 우리나라 6대 부호 중의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늘 연구하고 개척해 나갔던 김충식은 농장을 토지경영 중심체제로 바꿔갔대. 토지를 사고, 더 확대하는 일에 정열을 쏟았어.

초창기 동은농장 자본금은 당시의 일반적인 관행인 고리대(개인 간에 높은 이자를 받고 빌려준 돈)를 통해 마련했어. 다른 땅 주인들은 농민을 상대로 고리대를 했지만 김충식은 농민이 아닌 강진의 상인들을 상대로 고리대를 한 거야. 농민보다는 장사하는 사람들한테 돈 걷어 들이기가 빨랐거든. 이윤도 더 많았고.

 

김충식은 가끔 혼잣말로 중얼댔어. '농장이 잘되어야 내 큰 뜻을 펼칠 수 있지.'
의학의 발전을 위해 후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가슴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그는 돈 버는 일에 열정을 쏟았어.

중풍과 폐렴을 앓고 난 김충식은 그 후에도 몇 차례 위급한 상황을 넘겼어. 그 때마다 최동 박사의 극진한 진료를 받을 수 있었어.

마침내 김충식은 최동 박사에게 중요한 말을 꺼냈어.
"박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요?"
"제가 1억원(1946년 10월 18일 기준)의 돈을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내놓겠습니다."

믿기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최동 박사가 물었어.
"1억 원이요?" "그렇습니다."
잠시 후 김충식은 말을 이었어. "적은 돈이지만 그걸로 재단을 만들어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발전시켜 나가십시오."

그는 1억 원이란 큰돈을 내놓으면서도 한사코 작은 기부라며 겸손해했어. 누구나 그렇듯이 김충식의 삶 또한 평생 평탄할 수는 없었어. 1950년 4월에 대한민국은 토지개혁을 실시했거든. 토지개혁이란 나라가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땅을 사서 소작인들이 가지게 하는 거였어.

김충식도 마찬가지였지. 전국에 갖고 있던 그의 땅들을 나라에서 가져갔어. 나라에서는 그 땅을 농사를 직접 짓는 사람들에게 나눠 준 거야. 당연히 김충식의 수입은 급하게 줄어들고 말았어.

거기다가 그해 6.25전쟁까지 터진 거야. 김충식은 미처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서울에서 전쟁을 겪었대. 그는 세브란스 병원과 친척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가슴을 졸였어.

전쟁 중인 그해 9월 30일엔 동성리에 있는 그의 집이 불이 났고. 불길은 네 채만 남겨두고 안채, 사랑채 등을 모두 재로 만들어버렸지.

1952년 어느 날. 김충식은 서울에서 강진 고향으로 내려왔어. 집은 이미 타버렸고, 앙상한 벽돌만 뼈처럼 드러나 있었어. 전쟁은 부수고, 죽이고,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어. 동은농장 사무실도 들어가서 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지. 그래서 그는 군동 백금포에 있던 집으로 들어갔어. 그곳에서 고혈압과 중풍에 시달리며 조용한 나날을 보낸 거야.

여전히 재물이 넘쳐 났지만 김충식은 집안에도 걱정이 있었어. 집안을 부흥시키고, 대를 물려받아야 할 큰아들이 늘 병치레를 했던 거야.

김충식은 아들을 4형제나 뒀어. 하지만 믿고 재산을 맡길만한 후손이 마땅치 않았거든. 김충식은 정성스럽게 큰아들의 병을 간호했어.
"병채야......" "예, 아버지."
"아프지 말고 네가 건강해야 한다."

그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큰아들을 간호하며 오히려 격려했어. 김충식은 자주 어지럼증이 찾아왔어.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아프고, 숨 쉬는 것도 답답해졌어. 눈까지 갑자기 침침해졌어.

아들 걱정을 하던 김충식은 결국 아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지. 64세 되던 해인 1953년 음력 1월 15일에. 김충식이 세상을 떠난 5년 후에 큰아들도 갔어. 1958년 46세의 젊은 나이로.

큰아들이 세상에 없으므로 당연히 아버지 김충식의 재산도 흐지부지 줄어들었어. 결국 그의 재산은 2대를 지키지 못하고 떨어진 나뭇잎처럼 쓸쓸하게 사라져 간 거야.

관리인 아저씨는 다시 미술관 이야기로 말을 바꾸었어.
"우리 관장님 이름은 아시지요?" "아뇨."
"김재영 관장님이시지요."

김재영 관장은 강진에서 36년간 양식업을 했었대. 민물 뱀장어로 돈을 많이 모았다는 거야.
"관장님은 평생 모은 돈 40억 원을 이 미술관에 쏟아 부었답니다.
"아, 대단한 일을 하셨네요." 아빠는 관장님을 칭찬했어.

우리는 본관 앞에 서서 미술관 주변을 살폈어. 바깥 정원에 심어진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한층 우아하게 어우러져 보였어. 멀리 만덕산과 강진 평야, 탐진 만이 한눈에 고스란히 들어 오는 곳. 강진 풍경이 한눈에 보이니 미술관이 더 친하게 느껴졌어.

김재영 관장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늘 같은 말로 미술관을 소개 하신대. "여기 전시된 작품들은 작품 수준이나 규모가 전국에서 빠지질 않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엔 자랑스러움과 당당함이 깃들어 있다는 거야.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은 늘 바뀌어진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비싼 작품들이 번갈아 가며 얼굴을 보인다는 거야. 관장이 평생 모아서 가지고 있는 작품들이 280여 점이나 된다니 그럴 만도 하겠어.

280여 점의 작품 중엔 추사 김정희의 글씨도 있고 겸재 정선의 그림도 있대. 그것들은 모두 국보급 작품이래. 그 외에도 이당 김은호, 심영 박승무, 남농 허건 등의 그림과 북한 예술가들의 작품까지 구입해서 지니고 있다는 거야.

"그런 그림 중에서 현재 115점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나머지 그림은 매년 2회에서 3회, 특별 기획전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순차적으로 선보일 거래.
"관장님은 계획이 다 있으시네요."
"그럼요."

옛날 동성리의 김충식 별장은 이렇듯 의젓한 미술관으로 변해 있었어. 하지만 김충식 별장 모습이 변했다 해도 사라지지 않은 게 있어. 그건 지역을 사랑하고 후학들을 양성하는 일에 자신의 재산을 선뜻 내놓을 줄 알았던 김충식의 마음이지. 아마 미술관 어디쯤에서 후학들을 언제나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거야.

 


김충식과 금릉팔경의 김영근
김충식은 서른살 무렵 아버지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았어. 그 후 강진의 전설적인 부자가 되었지. 김충식은 아래로 남동생 후식과 정식 등 3형제가 있었고 여섯명의 여자 형제들을 뒀어. 어려서부터 한학(중국학)을 공부했었고. 한학은 작은아버지 김영근(1865~1934)에게 배웠어.
김영근. 그 사람이 누구일까? 아마 많이 들어봤을걸. 강진 사람들이라면 말야. 김영근은 강진의 금릉팔경(만보정 8영)을 지은 학자였어.

금릉팔경이란 강진의 아름다운 여덟 가지 풍경을 말해.

고암모종(고암의 저녁 종소리), 금사효무(금사리 새벽안개), 금강명탄(금강의 우는 여울) 구강어화(구강포의 고기잡이 불), 만덕청람(만덕산의 개인 날), 서산낙조(서산에 지는 해), 파산제월(파산의 개인 날 달밤), 죽도귀범(대섬으로 돌아오는 단배). 어때? 금릉 팔경들을 한 번씩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겼으면 좋겠어.

김충식은 학문이 깊은 김영근 작은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고, 부모에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아 그걸 잘 지켜냈어.

기부를 하며 세상을 열심히 살았던 김충식도 건강을 이겨 낼 수는 없었나 봐. 64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김충식의 묘는 병영면 박동리 마장등이란 곳에 있대. 아버지(김영준)의 묘 바로 아래에. 그곳은 병영면이 한눈에 보이는 명당이래. 그런데 아버지의 묘는 웅장하고 위엄을 자랑하지만 김충식의 묘는 다르다는 거야. 소박하고 검소하대. 무덤 앞에는 그 흔한 비석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1960년에 동은 재단에서 몇 개의 비석들을 세웠어. 석물은 그의 가족 중 증손자인 장손이 만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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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분 2023-12-24 11:51:50
저는 김충식님의 둘째 아들의 둘째 며느리입니다. 저의 집안 일이 이렇게 강진신문에 실려서 알려지니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두가지 큰 오류 사항이 있어서 알려드립니다. 첫째는 김충식 할아버님께서는 강진농장 외에 여러가지 사업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자료가 있습니다. 둘째는 할아버님 말년에 저희 시아버님, 그러니까 김충식의 둘째 아들 집에서 보내시고 그 곳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여기서는 큰아들 위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집안사정이니 여기서 그치겠습니다.
아뭏든 강진미술관이 설립되어 저희가 이루지 못한 염원을 다른 분이 이루어내신 것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글이 좀 더 올바른 방향에서 써졌으면 하는 생각에서 글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