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최고 갑부의 생생한 흔적
강진 최고 갑부의 생생한 흔적
  • 강진신문
  • 승인 2023.12.19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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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동성리 사의재길(6)] 미술관이 된 김충식 별장(Ⅰ)

'우리 동네 옛이야기'는 강진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동화로 묶은 우리 강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난해 11월 네 번째 책, '우리동네 옛 이야기-동성리 사의재길'을 출간했다. 이번 책은 장미연·김옥애·강현옥 글, 김충호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강진 사람이 모여서 함께 쓰고 그린 작품집이라 그 울림이 더 크고 우리들만의 소중한 공감대가 있다.
책을 통해 강진은 어떤 곳인지를 어렴풋하게 밝히는 마음속의 '등' 하나가 '반짝'하고 켜지길 기대해본다./편집자 주

 

옛 김충식 별장 자리에 세워진 강진 미술관

 

 
2018년 가을. 나는 아빠랑 함께 강진 미술관(강진읍 동문 길 39번지)을 찾았어. 미술관이 자리 잡은 장소는 조용하고, 공기는 산뜻하게 깨끗했어. 우리는 관장님은 만나지 못하고 관리인 아저씨한테 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됐지.

"여기가 옛날에 김충식의 별장이었어요."
"아, 그래요?"

별장이라면 사는 집 이외에 따로 있는 집인데. 김충식은 얼마나 부자였기에 때때로 묵으면서 쉬는 집까지 두고 살았을까? 나와 아빠의 그런 궁금증을 미술관 관리인 아저씨가 해결해 줬어.
김충식은 전남 최고의 땅 부자였대. 한국 근대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몇 번째 안가는 부자에 들어갔나 봐. 강진에서 서울을 가려면 김충식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길목마다 그의 땅이 있었다는 거야.

김충식은 1889년 7월 2일 강진읍 동성리에서 큰아들로 태어났어. 아버지 이름은 김해 김씨 송정파인 김영준(1863년~1928년). 어머니는 임선의(1860년~1909년)였어.
그의 아버지 김영준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충식을 불렀어.

"얘야,"
"예, 아버님."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손을 내밀었지. 충식은 두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감싸 쥐었어.
"아무래도 내가 오래가지 못할 것 같구나."
"아버님!"
"내 모든 재산을 너한테 물려주마."
"아버님……."
"아직은 동생들이 어리니 훗날 자라거든 큰형인 네가 알아서 재산을 잘 나누도록 하거라."

그는 30세를 전후해서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몽땅 물려받았어. 3천석(쌀 1석은 144kg) 소출(논이나 밭에서 나는 곡식의 양)의 땅이었지. 충식은 아버지에게 받은 땅을 잘 관리했어. 논과 밭을 10여년 만에 4만 석 소출의 땅으로 늘렸거든. 4만 석이라니! 그게 얼마쯤 될까? 상상을 한번 해봐.

 

김충식은 사는 집도 당연히 크고 넓었어. 이천 평 땅에 건물 면적이 천 평 정도였으니까. 그는 천 평 땅에다 여러 채의 집들을 지었어. 대문들이 수십 개나 됐고, 집과 집을 잇는 길들은 이리저리 막힘없이 통했지. 붉은 벽돌로 만든 아치형 문들은 마치 구중궁궐(겹겹이 문으로 막은 임금이 있는 집)을 떠오르게 했거든.

그런 집들이 6.25 전쟁 때에 불타 버렸다는 거야. 김충식의 안집과 사랑채는 모두 타버렸고 겨우 네 채 남았는데. 그 네 채 건물 중 하나가 별장이래. 김충식은 그 별장에서 가락과 흥을 즐기기도 했어. 임방울, 어화 중선 등 전국의 유명 국악인들을 그곳으로 초청했거든.

별장은 훗날 '동은농장' 사무실로도 쓰였어. 미술관이 들어선 별장 건물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김충식의 안집과 사랑채에서 뒤편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래. 불에 타서 앙상한 벽돌들만 남은 건물들 뒤편에 그나마 별장이라도 남게 되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

김충식 별장은 1929년쯤에 지어졌어. 백두산에서 자란 소나무를 가져다가 건축재로 사용했대. 백두산 소나무는 미인송이라고도 불러. 백두산 소나무 미인송은 가을부터 다음 해 봄에 이를 때까지 우아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거야. 솔잎은 길고 뻣뻣하대. 새로 나온 솔잎 순에는 하얀 빛이 감돌고. 사람들은 백두산 소나무가 아니어도 소나무를 좋아하잖아. 보통 소나무들도 일 년 내내 푸른빛으로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니까.

원래 김충식 별장은 정면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이었어. 관리인 아저씨 말에 의하면 그 별장 터에 부근의 땅을 사서 합쳤대. 모두 3300평의 땅이 되었는데 그 중 한옥이 118평을 차지하고 있다는 거야. 미술관은 한옥으로 된 본관과 전시관이 따로따로래.

미술관이 되기 전에 별장 건물은 절이 되기도 했었고, 빈집으로도 있다가 이제는 미술관으로 바뀌어진 거야. 그런데 땅 부자 김충식은 농사뿐 아니라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었대.

1933년은 일제 강점기였지. 일제는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 교육을 위해 보육 운동이란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유치원을 짓도록 했어. 유치원을 짓도록 했지만 일본 총독부에서 유치원을 세운다거나 운영하는 일은 하지 않았어. 그냥 모두 지방의 유지들에게 그 일을 맡긴 거야. 그렇게 해서 전국적으로 짓게 된 유치원 수는 아마 천 개 정도 되었다고 해.

하지만 지방에서 세운 유치원들은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돈이 없어 시달려야 했어. 강진 유치원도 마찬가지였고. 돈 문제로 문을 닫았다가 열었다가를 되풀이했으니까. 이때 강진 유치원을 넘겨받은 사람이 김충식이었어. 김충식은 재산도 잘 모았지만 미래의 꿈나무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지. 마침내 김충식은 강진 유치원을 인수해 직접 운영해 나갔어. 그는 유치원 원장이 되어 일 년에 500원씩을 기부했단다. 당시에 500원은 아주 큰돈이었단다. 그런 김충식을 보면서 여기저기서 기부의 손길들이 더 이어진 거야.

"저는 그네를 달아 드릴게요."
"오늘 풍금을 가져왔습니다."
"기왕이면 미끄럼틀도 만들지요."

의사들의 무료 의료 지원까지 이어져서 후원 활동이 활발해진 거야.
강진 유치원은 점점 활기를 띄어갔어. 마침내 김충식은 유치원 건물을 새로 짓기까지 했어. 그는 시들해져간 강진 유치원을 넘겨받아 다시 살려낸 거야. 그 시절 강진읍에서 자란 어린 아이들은 아마 많이 행복했을 것 같아.

김충식은 유치원뿐 아니라 전남생명과학고와도 관계가 있대. 전남생명과학고는 현재 강진에 있는 학교인데 옛날엔 '강진농업고등학교'로 불리었어.

1937년 3월. 김충식은 강진농업고등학교를 짓기 위해 땅과 돈을 기부했어. 먼저 학교 지을 땅과 건물을 해결해 준 셈이었지. 땅을 후원한 지 한 달 후인 4월. 드디어 3년제 '강진농업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조선 총독부의 허가를 받았어. 그 후 한 달도 안 되어 5월 5일에 첫 입학생을 맞게 되었고. 그때 강진농업고등학교에서 마흔네 명의 첫 졸업생이 나왔을 땐 강진의 경사였대. 생각해 봐. 가까운 해남이나 영암, 장흥, 완도 등지엔 농업학교가 없을 때였으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했겠어.

그 당시엔 제주도에서도 강진농업고등학교로 왔다 하니 이게 모두 김충식의 기부 덕분 아니겠어? 강진농업고등학교의 시작은 김충식이 했지만 그 후로도 강진에 있는 부자들이 재산을 학교에 많이 기부를 했대. 그러므로 전남생명과학고등학교에는 앞서 살다 간 강진 선조들의 숨결이 항상 깃들어 있을 거야.

관리인 아저씨는 김충식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이어 나갔어.
"김충식은 여기에서뿐 아니라 서울 가서도 재산을 모았답니다."
아빠가 물었어. "어떻게요?"

"1930년대 명륜동에 300평 규모의 집 두 채를 마련했대요."
명륜동은 종로구 창경궁 주변이래. 당시 서울 부자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나.
"명륜동 집도 대문이 10개 정도였대요. 그런 소문 파다했다네요. 그만큼 비싸고 호화스런 집이었나 봐요."

 

김충식은 명륜동에 살면서 서울의 증권회사와 택시회사(명치택시)까지 설립했어. 당시 조선의 증권가는 개성 부자들이 완전히 장악을 했었대. 개성상인들은 다른 지역 출신들이 증권 분야에 진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김충식은 그 벽을 뛰어넘었다는 거야. 이렇게 아이들 가르치는 일과 돈 버는 일에 몸과 마음을 쏟아 붓던 김충식은 마침내 병을 얻고 만 거야.

1942년의 어느 날. 서울을 다녀온 김충식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중풍으로 쓰러졌어.
"어르신!" "아버지!"

평소에 고혈압이었던 그는 중풍으로 오른쪽 어깨와 다리를 자유롭게 쓸 수가 없게 됐어. 이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강진까지 내려온 남자가 있었대. 최동 박사. 그는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대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였어. 최동 박사는 구급차를 이용해 필요한 약과 간호사까지 데리고 강진 충식의 집에 나타났어. 마을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리고 놀랐었지. 최동 박사의 치료로 그의 중풍 증상은 거의 치료가 됐대.

김충식과 금릉팔경의 김영근
김충식은 서른살 무렵 아버지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았어. 그 후 강진의 전설적인 부자가 되었지. 김충식은 아래로 남동생 후식과 정식 등 3형제가 있었고 여섯명의 여자 형제들을 뒀어. 어려서부터 한학(중국학)을 공부했었고. 한학은 작은아버지 김 영근(1865~1934)에게 배웠어.
김영근. 그 사람이 누구일까? 아마 많이 들어봤을걸. 강진 사람들이라면 말야. 김영근은 강진의 금릉팔경(만보정 8영)을 지은 학자였어.

금릉팔경이란 강진의 아름다운 여덟 가지 풍경을 말해. 고암모종(고암의 저녁 종소리), 금사효무(금사리 새벽안개), 금강명탄(금강의 우는 여울) 구강어화(구강포의 고기잡이 불), 만덕청람(만덕산의 개인 날), 서산낙조(서산에 지는 해), 파산제월(파산의 개인 날 달밤), 죽도귀범(대섬으로 돌아오는 단배). 어때? 금릉 팔경들을 한 번씩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겼으면 좋겠어.

김충식은 학문이 깊은 김영근 작은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고, 부모에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아 그걸 잘 지켜냈어.

기부를 하며 세상을 열심히 살았던 김충식도 건강을 이겨 낼 수는 없었나 봐. 64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김충식의 묘는 병영면 박동리 마장등이란 곳에 있대. 아버지(김영준)의 묘 바로 아래에. 그곳은 병영면이 한눈에 보이는 명당이래. 그런데 아버지의 묘는 웅장하고 위엄을 자랑하지만 김충식의 묘는 다르다는 거야. 소박하고 검소하대. 무덤 앞에는 그 흔한 비석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1960년에 동은 재단에서 몇 개의 비석들을 세웠어. 석물은 그의 가족 중 증손자인 장손이 만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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