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월남사지(月南寺址)에서
[다산로] 월남사지(月南寺址)에서
  • 유헌 _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 승인 2023.12.04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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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 _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소슬바람이 불고 있다. 찬바람 스칠 때마다 풍경(風磬)이 울고 있다. 낙엽이 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늦가을 풍경소리는 좀 더 특별하다. 가슴을 파고든다. 오늘처럼 산바람 솔솔 부는 날 읊조리기 딱 좋은 시조, 김제현의 「풍경風磬」이다.

김제현 시인은 뎅그렁 풍경소리를 들으며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하고,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라고 노래했다. 자신과 쇠의 처지를 빗대 이미지한 시조 종장의 절창은 어느 날 이렇게 풍경소리에서 흘러나왔다. 

그 풍경, 지금 월남사 대웅보전의 풍경이 울고 있다. 천 년 전 몸짓으로 울고 있다. 뎅그렁 풍경소리가 월남사지 3층 석탑을 휘돌아 대웅보전 뒤 빈터에 잠시 머물다 주춤주춤 경포대 계곡을 오른다. 들리는 듯 들리는 듯 가다 서다 월출산 천황봉을 향해 깔끄막을 오른다.

월남사 대웅보전 풍경은 월남사지 발굴 과정에서 수습된 고려의 풍경(風磬) 그대로를 재현했다고 한다. 풍경을 매다는 고리도 리움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토수(吐首)의 모양대로 복원했다니 월남사 대웅보전이 얼마나 철저한 고증을 거쳐 새로 지어졌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월남사의 풍경은 특별하다. 모양이 여는 풍경과는 다르다. 소리는 더더욱 많이 다르다. 마치 양철판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난다. 은은히 퍼져나가는 맑고 청아한 소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 풍경소리는 묘한 상상력을 불러온다. 천 년 전 대가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수많은 스님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들리고 사찰을 찾은 이들의 정중동 움직임이 보인다.

2023년 늦봄, 강진 월출산 천황봉 자락, 만여 평 월남사지 대가람 빈터에 천 년 전 풍경을 네 귀에 걸고 월남사가 문을 열었다.

천 년 전 사찰의 양식으로 오백 년 만에 새로 지어 낙성법회를 한 것이다. 수수백년 홀로 빈터를 지키던 월남사지 3층 석탑이 대웅보전의 석가모니, 아미타, 약사여래 부처님을 영접했다. 영혼을 울리는 목탁소리 천황봉에 가닿고 법화스님의 법문이 빈터를 가득 채웠다. 

구릿빛 석탑에 흐르는 시간의 강, 오래된 말씀들이 층층이 쌓여가고, 화두는 저 봉에 닿아 메아리로 돌아오네. 천 년 전 그 향기로 어간문 열리던 날, 대가람 옛터에 환청 같은 풍경소리, 탑과 불佛 한배를 타고 윤회의 강 건너네.
-유헌 「월남사지에서」 전문

월남사 대웅보전의 어간문이 처음 열리던 날, 어디선가 천 년 전 풍경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그리고 잠시, 천 년을 거슬러 흘렀던 시간이 되돌아오고 탑과 불(佛)이 극적으로 만났다. 소실로 사라졌다가 복원된 대웅보전과 보물 제298호 3층 석탑이 반천 년 만에 재회를 했다. 다시 태어난 대웅보전, 윤회는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탑과 불(佛)이 한배를 타고 서로를 지키며 윤회의 강을 건너 천 년을 향해 흘러가기 시작했다.    

복원된 월남사의 외관은 소박하다. 대가람의 중심법당치고는 크기가 그리 크지 않다. 그냥 단아한 모습이다. 왜 그럴까. 이유가 있었다.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기단석 위치 등을 참고해 관계 전문가 자문을 거쳐 현 크기의 법당을 복원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법당은 주로 스님의 공간이었고, 일반 신도들은 강당이나 별도 법회장소를 이용해 중심법당이 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월남사 대웅보전은 고려시대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려고 노력한 사찰임이 분명했다. 절의 크기는 물론 풍경(風磬)도, 장군의 큰 투구를 닮은 용머리 양 끝의 치미(鴟尾)도 당시를 재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 사찰 역사의 한 페이지가 이렇게 또 넘어간다.

한 해의 끝자락, 참 쓸쓸한 계절, 내가 사는 강진달빛한옥마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이 한 컷 풍경(風景)이 되어 울 때마다, 월남사 대웅보전에서 들려오는 천 년 전 그 풍경소리가 가슴을 칠 때마다 계절도 순아순아 깊어간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있다. 한해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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