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사찰 중심으로 강진차 널리 애용했다
고려시대, 사찰 중심으로 강진차 널리 애용했다
  • 강진신문
  • 승인 2023.07.18 15: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집] 강진차 고려시대를 알리다(1)

 

강진차는 다산선생이 강진에서 생활하면서 중흥기를 맞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선 고려시대에도 각 사찰을 중심으로 널리 차를 마시고 있었다는 말들이 있다. 문헌과 각종 유물을 통해 고려시대 강진차를 하나씩 되짚어보고 역사적 의미를 찾아본다. 편집자주/


각 사찰별 다양한 차도구 발견...비문 등 기록도 남아
강진에서의 차의 역사는 정확한 시기를 확정하기는 쉽지않다. 문헌에 남아있는 기록들을 통해  강진의 차 역사를 알 수 있는 길뿐이다. 강진에 처음 차가 들어온 것은 장보고 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강진차 역사는 800년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강진에 청자생산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일본인 승려 엔닌이 당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차와 돈을 기증받았다는 기록들이 전해진다. 이런 기록을 통해 장보고 시절에 강진에 처음으로 차가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진에 차와 관련된 문헌이 남는 것은 성전면에 위치한 월남사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월남사는 고려 중기에 진각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창건 이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는 사찰로 월남사지 터에는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한 진각국사비가 세워져 있다. 지난 63년 보물 313호로 지정된 진각국사비의 높이는 3.58m, 폭은 2.3m이다.

강진문화재연구소 양광식 소장의 저서 강진과 차 등에 따르면 진각국사비는 1250년도에 비가 세워진 것으로 나타난다. 전면은 이규보가 짓고 김효인이 쓴 것으로 적혀있다.

 

비문속의 내용은 당시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동국이상국집에 자세하게 다뤄져 있다. 이글을 보면 1205년 가을, 지눌이 억보산(億寶山)에 있을 때 선객 몇 사람과 함께 찾아가다가 그 산 밑에서 쉬었다.

1,000여 걸음 밖에 있는 암자에서 지눌이 그 시자(侍者)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아이 부르는 소리는 송라의 안개에 떨어지는데, 차 달이는 향기는 돌길의 바람에 풍겨오네(呼兒響落松蘿霧 煮茗香傳石徑風)"라는 게송을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글을 다시 보면 보조국사 지눌은 1205년 가을 백운암에 기거하게 된다. 이때 진각국사가 불교시인 게송(偈頌)을 짓게 된다. 이 시구속에 송라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이것은 스님들이 사용하는 모자이며 여기에 차를 달이는(煮茗) 향기라는 표현이 함께 적혀지고 있다.

이때 사용되는 한자중에 명(茗)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차의 어린싹을 말하는 것으로 차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송라차게(松蘿茶偈)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이런 이유이다.

이런 표현이 지역에서는 문헌으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차에 대한 기록으로 보인다. 당시의 차에 대한 표현으로 보아 성전면 월남마을 일대에서 스님들이 차를 생활화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1244년에는 백련사 진정국사 천책을 통해 강진차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천책은 소년에 급제하여 문장가로 이름을 알렸으나 만덕산 백련사로 출가해 원묘국사의 제자가 된다.

원묘국사는 천태종 수행법의 하나인 보현도량을 창설하고 보현보살의 참회법을 수행하였는데 천책은 그 법을 이어받아 백련사의 제4세가 된다. 말년에는 용혈사에 거주하면서 용혈존숙(龍穴尊宿)이라 불리게 된다.

천책의 호산록에 보면 강진차에 대한 문장이 나온다. 보내준 차에 대한 감사하는 글로 귀명승몽령(貴茗承蒙嶺) 명천급혜산(名泉汲惠山)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것은 귀한 차는 몽산품이요 좋은 물은 혜산이라고 해석된다.

이 표현중에서도 귀명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귀명은 귀한차라는 뜻으로 당시에 백련사에 거주하는 스님들이 차를 마시면서 생활한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문헌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런 문헌들을 통해 고려시대에 지역 사찰을 중심으로 차를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관내 사찰을 중심으로 차맷돌 등이 발견되면서 이를 뒷받침한다.

월남사지 발굴조사에서는 고려 초 강진 대구면 청자요지에서 생산한 청자 해무리굽완들이 출토되었다. 대구면에서 생산한 청자 다구(茶具)가 인근 사찰에서 소비되고 있었던 상황을 말해주는 자료이다. 또한 석제 차맷돌도 발견되었는데, 비슷한 유물이 강화도 선원사지(禪源寺址)와 청주 사뇌사지(思惱寺址)에서도 확인 되었다.

차 맷돌은 연고차(硏膏茶)를 제다(製茶)하는 데 필요한 다구이다. 중국 당대에 만들었던 병차(餠茶)를 더욱 견고하게 발전시킨 연고차를 맷돌에 넣고 갈아서 고운 가루를 내고, 이 차 가루를 뜨거운 물에 풀어 거품을 내어 마셨다. 즉 지금의 말차와 같은 음다법이다.

관내 사찰을 중심으로 기록과 함께 출토된 유물과 함께 하나씩 알아가보도록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