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재(四宜齋) 복원 16년이 되다
사의재(四宜齋) 복원 16년이 되다
  • 강진신문
  • 승인 2023.05.1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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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우리 동네, 숨겨진 이야기(1)

 

강진은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 역사가 쉼쉬는 이야기가 곳곳에 남아있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우리의 옛이야기를 비롯해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하는 정서가 그대로 흔적이 묻어나고 있다. 친근한 우리의 이웃들을 통해 숨겨진 우리 지역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본다/편집자 주

다산은 223년 전 폭풍한설(暴風寒雪)이 몰아치는 동짓달 스무사흔날 산 거지꼴로 강진에 도착하여 동문 주막집 주모를 만나 18년간의 유배살이를 시작하였다.

동문 주막이 언제까지 운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막흗터가 민가로 있었던 것을, 다산 실학 성지 조성 사업으로 동문 주막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옛 동문 주막 터를 찾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는데 청광 양광식 선생을 비롯한 동문마을 이봉일(작고) 어르신 등 주민들의 고증을 들어 동문 주막터를 강진읍 동성리 495-1번지로 확정하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1801년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교옥 때 서학과 관련된 혐의로 경상북도 장기현으로 유배 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어 4년간 기거했던 주막집의 한 켠 방을 사의재라 이름하였으나, 다산 유적지 복원 사업의 개념으로 전체의 시설을 「四宜齋」라 부르기로 했다.

사의재의 의미는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게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중후하게 해야 하니 중후하지 못하다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고 다산은 쓰고 있다.

 

이는 생각, 용모, 언어, 동작 등 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에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이 올바르게 규제하면서 학자적인 행동으로 돌아가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자 외부에 대한 선포인 것 같다.(박석무, 풀어 쓰는 다산이야기에서)

다산은 흑산도에서 유배 살이 중인 중형인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의 노파와의 대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느 날 그 주인 노파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은 책을 읽은 사람이니 답변해 주시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같고, 더구나 어머니가 오히려 수고가 더 많은데 성인들이 교훈을 세워 아버지는 중하게 여기고 어머니는 가볍게 여기며,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고 복(服)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등급 낮게 하며, 아버지의 혈통으로 집안을 이루고 어머니의 집안은 도외시하는 편파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나는 고경(古經)을 인용 '부혜생아(父兮生我)'와 '부위시생기(父爲始生己)' 등의 예를 들어 아버지를 중히 여긴다고 답하였더니, 그 노파는 나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선생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풀이나 나무의 예를 들어 말하겠소. 아버지는 풀이나 나무의 종자입니다. 어머니는 풀이나 나무의 토양입니다. 종자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야 미미한 일이지만, 부드러운 자양분으로 길러내는 흙의 은공은 대단히 큽니다. 그러나 밤의 종자가 밤나무가 되고, 벼의 종자가 벼가 됩니다. 몸 전체를 이루는 것은 모두 땅의 기운이지만 결국은 나무나 풀의 종류가 본래의 씨를 따라 나뉘게 되니 성인이 예를 제정한 것은 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대답 했다.」(박석무, 풀어 쓰는 다산이야기에서)

다산이 이곳에서 경세유표를 쓴 곳이기도 하며 황상을 비롯한 읍내 제자 6명을 가르친 뜻깊고 역사적인 장소이다.

사의재의 주요 시설로는 본채인 주막집과 사랑채, 화장실, 초가 정자, 우물, 장독대, 연못, 목교, 정원, 주차장이 있다,

주막집은 다산 선생 강진유배 당시 있었던 건물로 3칸 돌담 초가 12평으로 대부분의 자재는 古資材를 사용하였으며 주춧돌을 비롯한 토방, 담장의 돌은 강진의 폐가 등에서 하나하나 모아서 사용하였고 공사 도중 깬돌이나 사의재 복원의 의미에 맞지 않는 돌들은 골라내어 다시 쌓도록 하였다. 사의재 본채 옆의 팽나무는 성전면 월산마을에서 굴취하여 대형 크레인을 동원 수송하여 식재 하였고, 문간채 옆 석류나무를 비롯한 정원에 심은 대부분의 나무는 병영성터 복원사업 터에서 옮겨와 심었다.

강진읍성 동문 밖 샘거리에 위치했던 주막이었는데, 다산이 거처했던 주막채 동쪽 방 한 칸이 사의재이다.

사의재 복원공사는 문화재 설계 업체에 용역을 주어 설계를 하였으나 황주홍 군수께서 이청준 선생과 임권택 감독의 자문을 받는 과정에서 조선 말기 동문 주막의 원형을 살리는 데는 거리가 너무 먼 설계라는 의견이 있어, 이청준 선생과 주병도 감독(임권택 영화감독 추천)을 초청하여 황주홍 군수와 필자를 비롯한 실무자들이 성전면 월남리 하나펜션에서 1박을 해 가면서 설계안을 구상하여 재설계해 공사에 들어가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사의재 현판은 다산 친필을 집자(集字)하여 화방마을 금강선원(金剛禪院)의 춘강(春岡)혁인(赫印) 스님(작고)이 조각하였다. 사랑채는 다산 선생 기거 당시에는 없었던 건물로 방문객의 편의를 위해 휴식 시설로 목조 초가 14평 규모로 지었다.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 한 칸, 여자 화장실 한 칸, 총 5평으로 외형은 돌담 초가로 지었으나, 내부시설은 이용 편의를 위해 현대식으로 시설하였다.

 

초가 정자는 동문 주막 당시에는 없었던 정자로, 사의재의 맨 동편에 있으며, 이것 또한 관광객의 휴게시설로 설치하였다, 정자 명칭은 청광 양광식 선생과 의논하여 동천정(東泉亭)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의미는 다산 선생께서 기거하시던 방을 사의재라 이름하기 전에, 동천여사(東泉旅舍)라 한데서 동천정이라 하고, 판액은 다산의 제자 황상의 친필을 集字하여 赫印 스님이 조각하여 현판을 걸었다.

사의재 복원공사는 2006년 3월28일에 착공, 2007년 5월30일에 완공하였다. 순천에 소재한 은하건축(대표 손정호)이 설계하고 소설가 이청준 선생이 추천한 건축가 주병도(비쥬얼스토리)감독의 자문을 받아 200여 년 전의 주막으로 복원하였다. 완공 후 임권택 영화감독이 사의재를 둘러 보고 영화촬영장으로도 손색이 없겠다는 평가를 해 주었다.

글 = 김상수<강진문화원 부원장>

시공에 참여한 업체는 건축부문은 협진개발(대표 조준상)이, 전기부문은 가람전기가 맡아 시공하고 문화관광과 위길복(현 강진군 건설과장)이 감독하였다.

사의재는 다산선생의 강진유배의 첫 번째 유적으로 다산을 사모하고 실학을 공부하는 학도들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사의재 복원 16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그곳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다시 한번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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