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군동면 덕마마을
[마을기행]군동면 덕마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5.02.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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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시샘하는 한파 속에서도 계절은 소리없이 다가온다. 황량하기만 하던 들녘은 봄기운이 넘쳐나는 듯 생기를 머금어가고 이름모를 들풀도 어느덧 제 빛깔을 되찾아간다.  

강진읍에서 마량방면으로 가다 군동면 삼신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꺾어 들어가면 주산인 금사봉(360m)의 위엄을 뒤로 하고 40여호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은 첫 마을이 덕마마을이다. 일제에 의한 통폐합이 이루어지기 이전까지 인근의 쌍덕리 평덕마을을 상평덕이라 하고 이곳을 하평덕이라 불렸으며 마을의 지명도 하평덕의 ‘덕’자와 이곳 주변에 마장이 있어서 ‘마’자를 더해 ‘덕마’라고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덕마마을은 솥과 농기계를 제작하던 대장간이 있어 순우리말로 ‘불뭇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마을 입구 사장나무 바로 앞에 포구가 형성되어 있어 ‘야포(冶浦)’라고도 일컬어졌다. 마을에서 생산된 솥 등 철제품은 일제시대 말까지 마을 앞 포구를 통해 배편으로 멀리 부산까지 팔려나갈 정도였다. 이를 증명한 듯 마을 입구에는 배를 매던 자리인 입석 3기가 아직까지 보존돼 있다.

덕마마을은 가운데골목이라고 불리는 큰 골목을 경계로 웃돔과 아래돔으로 나눠지며 물이 솟아오른다고 하여 부르는 속끔샘, 쌍덕리 관덕과 금사리를 연결하는 다리로 옛날 물레방아가 있어 일컬어지는 방애다리, 속끔샘 바로 밑으로 항상 수렁이 생겨 농사짓기가 불편했던 수랑배미, 마을 남쪽 들인 쑤꾸개 등 정겨운 지명이 곳곳에 남아있다.

정월 대보름날을 맞아 마을주민들은 수령 250여년된 사장나무에서 당산제를 지낸 후 마을회관에 모여 윷놀이 등을 즐기며 한적한 오후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주민들과 인사를 나눈 후 마을일을 맡고 있는 차정환(72)이장을 만나 마을에 대한 자세한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차이장은 “강진 8경의 하나인 금사봉을 주산으로 30여호 60여명의 주민들이 미맥농사로 생활하고 있다”며 “80년대 중반까지 상여가 마을을 통해 금사봉으로 올라가면 마을에 액운이 온다고 믿어 상여가 마을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차이장은 덕마마을의 자랑인 속끔샘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속끔샘은 현재 마을의 간이상수도로 이용될 정도로 풍부한 수량과 1급수의 수질을 가진 샘물이다. 예전 마을 앞 포구에 내린 길손들이 속끔샘 앞으로 난 폭 6척 정도의 길을 따라 대구, 마량이나 완도의 여러 섬으로 갈 수 있었는데 이 샘물을 한번 맛본 이들의 입소문으로 속끔샘의 물맛은 서울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는 것.

또 해방 직전까지 속끔샘 근처에는 길손들이 숙식했던 주막집이 있었다고 한다. 옆에 있던 주민 최대인(62)씨는 “날이 아무리 가물어도 속끔샘물이 마르는 일은 없었다”며 “눈병에 걸려도 샘물로 세 번만 씻고 나면 낫는다고 할 정도로 깨끗한 수질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탐진강과 강진만에서 물고기 등을 잡을 수 있고 금사봉에서 수렵과 채집생활이 가능했던 천혜의 생활요건을 갖춘 덕마마을은 일찍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을 증명하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 6기가 남아있다. 아래돔에 위치한 세 집 내부에 남아있는 고인돌은 대부분 매몰된 모습으로 흔적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기의 고인돌이 남아있는 박정인(81)씨 댁에서는 특이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헛간으로 사용하는 건물은 중간에 고인돌이 들어앉아 돌 위에 기둥을 세워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2m 남짓되는 거리에 또 1기의 고인돌이 남아있으며 화단에도 다른 고인돌이 있어 아래돔을 중심으로 고인돌군이 존재했음을 짐작케 한다.

차이장과 함께 마을 앞 사장나무를 찾았다. 높이 15m, 둘레 3.2m의 사장나무는 여름철 주민들의 휴식터로 이용되는 곳으로 나무 옆에는 각각 크기가 다른 돌 2개가 놓여있었다. 차이장에 따르면 과거 품앗이를 정할 때 사용했던 들독으로 이 돌을 들어올려야만 품앗이에 가입 자격을 주었다.   

최근 덕마마을에는 경사가 있었다. 마을 출신으로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박도수(50)씨 4남매가 희사한 400만원의 성금으로 마을 표지석을 새롭게 세운 것. 표지석에 새겨진 ‘살기좋은 마을, 화합한 마을’이란 문구가 대변하는 듯 마을주민들은 서로의 고단한 삶을 보듬어주는 정겨움을 지켜가고 있다.       

덕마마을 출신으로는 여수수산대학교 교수를 지낸 최규정씨, 농산물검사소 광주출장소장을 역임한 최규산씨, 해양수산부 서기관으로 퇴직한 최규복씨, 노동부 사무관을 지낸 최철암씨, 광주 기독교병원에서 내과전문의로 있는 최정영씨, 농산물검사소 나주출장소장으로 정년을 맞은 최건씨, 대구중학교 교장으로 있는 박종명씨, 강진서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박기종씨, 광주 송원대학 교수인 최재호씨, 동양증권 상무이사로 퇴직한 최규재씨, 강진군청 산림녹지담당을 맡고 있는 차주현씨, 병영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최은하씨,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과장을 맡고 있는 차희남씨, 청자골관광을 운영하고 있는 박주영씨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신귀례(77)씨

소녀 김진솔(11)양과 손자 김해솔(9)군의 재롱에 밝은 미소를 짓는 신귀례(77)씨는 장흥 대덕에서 시집와 50여년 남짓 덕마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다. 신씨는 “마을주민들의 심성이 고와 다툼이 없고 화합이 잘되는 마을”이라며 “갈수록 주민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서로 도우며 정겹게 살아가고 있다”고 마을자랑을 했다.

이어 신씨는 “미맥농사 이외에 하우스를 하는 주민이 없어 부유한 마을은 아니었지만 자식들에 대한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며 “관공서에 다니거나 교사로 근무하는 마을출신들이 많은 것도 마을주민들의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신씨는 “마을에서 3대가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며 “농촌에서 자식들의 봉양을 받고 손주들의 재롱을 볼 수 있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랑했다.

건강에 대해 묻자 신씨는 “7년전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다쳐 수술을 받은 후 한방치료를 받고 있으며 고혈압 치료제를 복용하고 있다”며 “비록 몸은 아프지만 자식들의 정성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고 답했다.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손녀, 손자에게 줄 귤을 사왔다는 신씨의 모습에는 자손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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