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구수했던 어린 시절, 영화 감상 추억하다
[다산로] 구수했던 어린 시절, 영화 감상 추억하다
  • 김점권 _ 전 포스코건설 중국지사장
  • 승인 2023.04.04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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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권 _ 전 포스코건설 중국지사장

어릴 적 영화 보기는 로망이었다. 주변의 친구가 읍에 가서 누구와 함께 무슨 영화를 보고 왔다고 으스대면 그냥 부러울 뿐이었다. 제목, 내용은 상관 없었다. 그냥 영화를 봤다는 것 만으로 그놈이 대단해 보였다. 도암 중학교 시절 월요일 오후 어느 수업 시간은 기다림의 순간이었다. 오후에 밀려오는 졸림은 그 선생님 시간에는 어림도 없었다. 왜냐하면 주말에 광주에 다녀온 총각 선생님은 어김없이 영화 한편 보셨고, 월요일부터 화요일 사이에 영화 얘기를 실감나게 차근차근 들려주셨기 때문이다.

주로 중국 무협 영화였다. 선생님의 영화 얘기는 직접 영화 본 것보다도 실감이 났다. 원수에게 억울하게 당하고, 치열하게 복수를 준비하고, 통쾌하게 원수를 무찌르는 한편의 활극을 마치 영화배우가 실제 액션을 하듯 풀어내셨다. 이제 와서 회고해 보니 나는 한편의 영화를 그렇게 리얼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진정한 얘기꾼이셨던 것이다. 아, 그 이름 정천수 기술 선생님, 선생님은 축구도 잘하셨다.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영화를 읍내 영화관에 가서 보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잘해봐야 시골 뒷동산에 하얀 두루마기 천을 노송나무 사이에 걸치고, 저녁 8시 이후에 영화를 상영하였다. 그날 오후는 동네 회관, 상점 벽에 울긋불긋 이쁜 포스터 붙이고, 영화 홍보를 위해 트럭에 설치한 앰프 크게 틀고 동네방네 떠들썩하게 외쳐되었다. 트럭 뒤 졸졸 따라다니는 우리들 오후는 흥분의 반나절이었다.

영화 한편 상영은 그야말로 동네잔치였다. 아, 그런데 돈이 없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아버지는 돈 줄 생각을 안 한다. 이제 임시 영화관 문지기를 하는 삼촌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한 명 정도야 어찌 되겠지. 정 안되면 영화 중간 정도에 천 살짝 들치고 들어가면 되었다.

영화 화면은 눈 오고 비가 오고 바람이 세찼다. 온통 상처투성이에 화면은 흔들리고 중간에 수시로 화면은 잘리고, 필름 연결하는데 몇 십분, 어느 땐 가는 영화 한편 보는데 연 3일간이 걸렸다. 시골에서 가장 기다렸던 영화는, '꽃 피는 팔도강산' '빨간 마후라' '홍길동' '용팔이''벙어리 삼룡이' '꼬마신랑' 등, 배우로는 박노식, 허장강, 장동휘, 김진규 등 주연 영화였다. 외국 영화야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이제 읍내 영화 정도는 봐야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돈은 역시 한 푼도 없다. 3년 동안 10리 길을 걸어서 통학하였지만 10원 한 장 용돈을 받지 못했다. 명절 때 받은 얼마의 용돈, 학교에 저축해야 한다. 미래를 대비하여 저축한 거 아니고 담임 선생 등쌀에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읍내 영화 비용 충당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매일 쌀 한 줌 씩 슬쩍하거나, 날달걀 몇 개 딴 주머니 차면 된다. 약 1달 정도 준비하면 읍내 왕복 버스비, 영화비, 호떡 1개 정도는 먹을 수 있다. 큰맘 먹은 거다.

읍내에 중국 영화,'용검풍'이 들어온다는 소식은 1달 전부터 하늘을 날아다니는 주인공들의 요란한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동네 또래 몇 명이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여 자금 마련에 성공하였다. 대망의 영화 상영 그날, 읍내에 나갔다. 아, 그런데 필름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엉뚱한 영화 한편 보고 왔다. 결국 보고야 말겠다는 굳은 각오로 또 한 번 억척스럽게 자금을 마련하고, 읍내에 다시 나갔다. 망할 놈의 그 영화는 또 오지 않았다. 야속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 영화는 끝내 우리 읍내에 나타나지 않았다.' 용검풍'은 영영 그리움으로 남은 셈이다.

이제 영화 보는 것은 너무 쉬워졌다. 보고 싶은 영화 하루에도 수십 편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영화 한 편 보기 위해서 온 몸을 다 바쳤던 그 시절의 짜릿함은 사라지고 없다. 물질적으로 풍요하다고 정신적으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무엇 인가를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것, 그 속에 행복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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