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 고단함 잊고 줄다리기로 하나되었다.
농사일 고단함 잊고 줄다리기로 하나되었다.
  • 강진신문
  • 승인 2021.12.2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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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서성리 만세길 12]
청사초롱 줄다리기(Ⅱ)

 

최근 강진군도서관이 지역의 숨겨진 역사, 문화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은 두번째 우리 동네 옛이야기를 발간했다. 도서관은 지난 2019년부터 전해져 오는 강진의 수많은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발굴 계승하기 위해 연 1회 연차적으로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발간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우리 동네 옛이야기'는 '서성리 만세길' 편으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6편의 강진읍 서성리와 관련된 전설 같은 우리 역사, 문화 이야기가 정성스럽게 담겨 있다. 이 동화책은 지역의 향토사학자인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아 지역 출신 김옥애, 강현옥, 장미연 동화작가가 직접 쓰고, 지역 출신 김충호 화백이 그림으로 참여했다.


고싸움은 볼 때마다 손에 땀을 쥐게 했어. 풍물패가 동부와 서부줄을 사이에 둔 중앙에서 한바탕 놀고 나가자 줄패장과 멜꾼, 꼬리 줄잡이까지 일제히 바짝 긴장했지.

"밀어라!" 드디어 줄패장이 신호를 내렸어.
"와! 와!"

그와 동시에 멜꾼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밀어붙였어. 멜꾼들속엔 아랫집 명희 아버지와 훈이 아버지도 있었지. 멜대를 메고도 어찌나 발이 빠른지 부옇게 흙먼지가 일어났어. 아줌마들로 이루어 진 꼬리줄잡이들은 키다리 아저씨들을 쫓아가는 꼬마들처럼 종종 걸음을 쳐야만 했지.

"빼라!" 금방이라도 부딪힐 것 같았는데 다시 줄패장이 고를 빼라는 신호를 내렸어.

"빼라!" 고에 올라 탄 부대장은 다급하게 손짓까지 하며 신호를 전달했어. 그러자 또 멜꾼들은 신호와 손짓에 맞춰 일제히 오른쪽으로 돌며 고를 뺐단다. 이번에도 꼬리줄잡이들은 잰걸음으로 바쁘게 따라 돌았지. 도는 거리로만 보면 대열 바깥쪽에 있는 꼬리줄잡이들이 오히려 훨씬 많이 돌아야만 해서 발을 재게 놀려야만 했어.

고싸움에서는 '밀어라' 신호에 맞춰 고를 힘있게 밀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빼라' 신호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동체 전체를 잘 빼주는 것도 아주 중요해. 밀다가 자기 편 고가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것 같으면 신속 정확한 판단을 내려서 뒤로 잘 전달해야만 하거든. 그래서 보통 줄패장은 경험이 많은 분이 맡았어. 또 줄패장과 함께 고위에 오르는 서너 명의 부대장들은 몸싸움에 자신 있으면서도 근성이 있는 장정들이 맡았지. 왜냐하면 고끼리 부딪혔을 때 상대편 고까지 타고 넘어가 상대편 고를 힘으로 찍어 누르려면 그 정도의 힘과 근성이 있어야만 했거든.

"밀어라!" 줄패장의 신호가 다시 떨어졌어.
"와! 와!" 멜꾼들은 또 한 번 함성을 지르며 재빠르게 전진했어.

"올려라! 고를 올려라!" 줄패장의 신호에 멜꾼들은 있는 힘을 다해 멜대를 들어올렸어. 키가 작아 뒤쪽 멜대를 멘 훈이 아버지는 까치발까지 하고 온 힘을 보탰지. 멜꾼들의 팔뚝엔 시퍼런 힘줄이 툭툭 불거졌어. 꼬리줄잡이를맡은 엄마들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시뻘개져서 금방이라도 터질것만 같았지.

따다다다 땅따당. 꽹과리 소리도 핏대를 세울 때 양편 고는 하늘로 한껏 치솟아 오르고 있었어. 그 모습은 마치 하늘로 치솟은 두 마리 용이 서로 엉켜 붙은 모습이었지. 돌이는 눈을 씻고 다시 맞붙은 고를 봤어. 참 신기하게도 고머리와 줄이 덕석기에 있는 용으로 보이는 거야.

"와! 와!" 다행히 서부 쪽 고가 더 위로 치솟았어. 서부 쪽 고가 더 위로 치솟았다는 건 서부가 아주 유리하다는 걸 뜻해.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부대장들은 잽싸게 고를 타넘기 시작했어. 고를 타넘을 땐 담력이 필요해. 생각해 봐. 공중에 떠 있는 동체에서 안전장치 하나 없이 몸싸움으로만 상대편 고를 넘어간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따다다다 땅따다당, 따다다다 땅따다당.
돌이 아버지의 꽹과리와 동부 쪽 꽹과리가 숨넘어갈 듯 얽히고 있었어. 하늘에선 줄패장과 부대장들이, 땅에선 양쪽 꽹과리와 풍물 장단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 거야. 치열한 몸싸움 끝에 서부 쪽 부대장 중 둘이 상대편 고로 넘어갔지 뭐야. 서부 쪽 풍물패는 더욱 힘찬 장단으로 대열을 응원했단다. 싸움의 기세는 이미 서부쪽으로 기울고 있었어. 동부 쪽 동체는 이미 서부 쪽 고에 눌려 땅으로 가라앉고 있었거든. 동부 쪽 멜꾼들도 온 힘을 다 해서 고를 떠받들고 있었지만 이미 진이 많이 빠져 보였어.

"쯧! 쯧! 동부 쪽에 젊은이들이 너무 없구나." 누군가 돌이 뒤에서 안타깝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어. 뒤돌아보니 향교 학장님이 미간을 찌푸린 채 동부 쪽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셨지. 그러고 보니 동부 쪽엔 정말 젊은 장정들이 별로 없는 거야. 돌이도 안타까운 마음이 살짝 들긴 했지만 그래도 서부가 이기길 바라며 다시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응원을 했어.

"진 놈아, 진 놈아! 꽁꽁 진 놈아!"
"이겨라! 이겨라! 우리 군사 이겨라!"

응원 대열 어딘가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응원 소리가 들려왔어. 그러자 양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응원 소리를 따라했지. 한참의 실랑이 끝에 드디어 동부 쪽 고가 땅에 닿았어.

"와! 와!" 서부 쪽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어. 아이들은 너무 좋아서 하늘로 폴짝폴짝 뛰었단다. 동부 쪽 사람들은 고를 내려놓고 땅바닥을 치며 "에고! 에고!"하고 울었어. 다 큰 어른들이 고싸움에서 졌다고 정말 그렇게 대성통곡 하느냐고? 설마 그러겠니? 다만 안타까움을 그렇게 우는 소리로 표현하는 건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란다.

고싸움도 끝나면 본격적으로 줄다리기가 시작됐단다. 암줄의 고에 숫줄 고를 끼우고 곳대(비녀목)로 연결하면 줄다리기를 할 준비는 다 끝나지. 이때가 되면 고싸움을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양편 줄 끝에 다 달라붙어. 아무리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 위함이지. 돌이는 또 이 때가 참 좋았어. 동네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협동하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여서 말이야. 또 작년 한 해 동안 사소한 일로 싸웠던 어른들도 한 줄에 매달리다 보면 자연 다시 가까워져서 자기도 모르게 화해의 말을 건네게 되거든.

돌이도 꼬리줄 끄트머리라도 잡으려고 다가갔어. 돌이가 막 젖줄 하나를 잡으려는데 작고 도톰한 손이 먼저 줄을 잡는 거야. 훈이였지.

"먼저 잡아." 훈이가 멋쩍게 웃으며 잡았던 줄을 놓았어.
"아니야. 너 먼저 잡아." 돌이도 훈이가 건네준 줄을 다시 양보했어.

"그럼 우리 같이 잡을까? 너랑 나랑 힘을 합치면 우리 편이 이길것 같지 않냐?" 훈이가 씩 웃으며 제안했어. 훈이의 웃는 입 속에서 덧니도 쑥스럽게 같이 웃고 있었어.

"그래? 그럼 함께 힘을 모아볼까?" 돌이도 쑥스럽게 웃으며 훈이가 잡은 줄을 함께 잡았어.
양쪽 편이 줄을 잡는 시간만 해도 적잖게 걸렸어. 양편 꼬리줄까지 줄다리기에 참여할 사람들이 다 달라붙었을 땐 구경꾼은 안 보이고 이전보다 배는 커진 용 한 마리가 중앙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지.

징! 드디어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울리고 줄다리기가 시작됐어. 양쪽 편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줄을 당겼단다.
"영차! 영차!" "영차! 영차!"

고싸움에서 진 동부 쪽이 칼을 갈았는지 징이 울리자마자 동부 쪽으로 줄이 쑤욱 끌려갔어.
"버텨! 드러누워!" 앞쪽에서 소리치자 뒤쪽 사람들은 몸을 한껏 뒤로 눕혔어. 무게 중심을 뒤로 쏠리게 해서 상대편 쪽으로 줄이 끌려가지 않게 하려는 작전이었지.

"영차! 영차!" 서부는 뒤로 반쯤 누운 자세로 버티면서 조금씩 뒷걸음질치기를 시도했지. 다시 줄이 조금씩 서부 쪽으로 끌려오긴 했지만 동부쪽도 만만치는 않았어.

얼핏 보면 줄다리기는 힘만으로 승패가 결정될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단다. 물론 기본적으로 힘이 있어야겠지. 하지만 하나의 힘이 아닌 여러 사람의 힘이 모아져 동시에 큰 힘을 내야 하는 줄다리기 같은 경기에선 단지 힘만 있다고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야. 여러사람의 힘이 마음이 맞아 동시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때 비로소 큰 용 같은 줄도 끌어올 수 있는 거야. 마치 모내기처럼 말이야.

일 년 농사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모내기도 줄다리기와 같아. 요즘엔 농촌일도 농기계를 많이 쓰지만 예전엔 모두 사람들 손으로 직접 했지. 그 중에서도 모내기는 마을 사람들이 협동해서 해야 하는 일이었어. 줄을 맞춰서 간격에 맞게 고르게 모를 심어줘야 하는 일이라 누구 하나가 너무 빨라서도 너무 느려서도 안 될 일이었지. 또 못줄을 잡은 이의 "어이!"하는 신호에 맞춰 양쪽 못줄잡이들이 못줄을 옮겨야 하므로 여러 사람의 협동심이 중요했어. 모든 농사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나 모내기는 무논에 발목이 다 빠져 허리를 숙이고 하는 일이라 더 힘들었단다. 그래서 모내기엔 들노래와 풍물이 따라 붙었지. 마치 줄다리기처럼 말이야.

"영차! 영차!" 영차 소리는 바로 동시에 힘을 쓰기 위한 신호인 거야.
징 징 징지징. 드디어 서부 쪽으로 줄이 열 자 넘게 끌려오고 승리를 결정짓는 징소리가 울렸어.

"와! 와!" 서부 쪽 사람들은 신이 나서 하늘을 찌를 듯이 함성을 질러댔어.
동부 쪽 아이들 중엔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엉엉 우는 애들도 더러 있었어.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긴 거다. 안 그러냐?" 옆에서 훈이가 벌게진 볼에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어.

"맞아, 맞아.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긴 거야." 돌이도 맞장구를 치며 웃었어.
모두들 힘을 써서 출출해지기 시작하는데 어디선가 돼지고기 냄새가 풍겨왔어. 해마다 그랬듯이 올해도 강진 읍내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돈을 모아 돼지고기며 떡이며 맛난 음식들을 냈어. 돌이랑 훈이는 돼지 수육 냄새에 침이 꿀꺽 넘어갔단다.

"아이고, 시원타!" 돌이 아버지와 훈이 아버지는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켜고 돼지고기 수육에 묵은 김치를 얹고 있었어. 훈이와 돌이도 아버지들 사이로 파고들었지.
"하하하. 어서들 오너라. 얼른 이것도 먹고……."

아버지들은 젓가락으로 집었던 안주를 아들들 입 속에 넣어주셨어. 뜨뜻하게 배를 채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낫으로 젖줄을 잘라 챙겼어. 젖줄을 가져다가 지붕 위에 던져두거나 간직하면 액운을 물리치고 한 해 농사가 잘 된다고 해. 그래서 줄다리기가 끝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젖줄부터 챙겼지.

"아버지! 우리는 젖줄 안 챙겨요?"
"아버지! 우리는요?" 돌이와 훈이가 걱정되어서 물었지.
"허허! 별 걱정을 다 한다. 너희 어머니들이 가만히 있을 분들이더냐? 저기 좀 봐라." 돌이 아버지가 고개 짓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정말 두 어머니는 이미 젖줄을 옆구리에 따로 챙기고 동네 사람들 시중을 들고 있었어.

"그나저나 올해는 암줄이 고싸움도 이기고 줄다리기도 이겼응께 한 해 농사는 잘 되겠네."
훈이 아버지가 돌이 아버지 잔에 막걸리를 따르며 말했어.
"허, 이 사람아! 그야 당연하제."

돌이 아버지도 따라 웃으며 대답했지.
돌이랑 훈이 배가 보름달처럼 불룩해질 때 하늘엔 어느새 별이 총총하고 달집의 불도 사그라지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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