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감 신유 강진을 구하다
현감 신유 강진을 구하다
  • 강진신문
  • 승인 2021.10.2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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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서성리 만세길 10]
수통목과 아구재 귀신(Ⅱ)
강진읍 아구재

 

최근 강진군도서관이 지역의 숨겨진 역사, 문화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은 두번째 우리 동네 옛이야기를 발간했다. 도서관은 지난 2019년부터 전해져 오는 강진의 수많은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발굴 계승하기 위해 연 1회 연차적으로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발간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우리 동네 옛이야기'는 '서성리 만세길' 편으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6편의 강진읍 서성리와 관련된 전설 같은 우리 역사, 문화 이야기가 정성스럽게 담겨 있다. 이 동화책은 지역의 향토사학자인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아 지역 출신 김옥애, 강현옥, 장미연 동화작가가 직접 쓰고, 지역 출신 김충호 화백이 그림으로 참여했다.


"화재 대비책이라구요? 말씀이야 좋지만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 경비는 어찌 감당하시렵니까? 한참 농사철이고 좀 있으면 무더위가 몰아칠 판에 큰 공사를 벌이시면 고을 백성들 원 성이 자자할 것입니다요."

현감의 속내를 알 길 없는 이방은 조심스레 반대 의견을 비췄어. 아랫사람으로서 말대꾸를 하는 건 예가 아니겠으나, 고을의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될 걸 생각하면 같은 고을 사람으로서 모른 체 할 수만은 없었거든. 이방의 반대에 신유는 속으로 뜨끔했지. 혹시라도 속내를 들킨 건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래서 부러 큰소리로 호통을 쳤단다.

"어허! 윗사람이 다 큰 계획이 있어서 그런 것을 어찌 일개 아전이 감 놔라 배 놔라 상관을 한단 말인가? 그럼 자네 생각이 지역민들의 생각이라 믿고 조정에 그대로 보고할 테니 화재라도 나면 자네가 다 책임질 텐가?"

"네에? 책임이라니요? 소인 같은 지방 관아 아전이 어찌 그런 큰 일을 책임진단 말입니까?"
이방은 책임이라는 말이 나오자 심장이 덜컹해서 얼른 손사래를 쳤어.

"그러게 조용히 지켜보며 보좌만 할 것이지 뭐 하러 나서는 겐가? 이제부턴 함부로 나서지 말게나."

아전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난 신유는 거침없이 동헌과 남문 사이에 크게 연못을 파게 했어. 그런데 연못은 팠는데 막상 물을 채울 수가 없었단다. 곰곰 생각하던 현감은 고성제로부터 수로를 연결해 연못에 물을 채워야겠다고 계획을 세웠지. 모든 일은 한동안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어.

그런데 뜻하지 않는 난관에 부딪혔지. 고성제는 성의 서문 밖에 있었기 때문에 고성제 물을 성내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성의 서쪽 한 부분을 잘라야만 했지. 그래서 나이 지긋한 지방 유생들이 반대하고 나선 거야. 남도라는 지리적 특성과 곡창지대라는 이점 때문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큰 희생을 치러야만 했던 강진이야.

그러니 언제 또 있을지도 모를 전란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성을 함부로 허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이번에는 거침없던 신유도 허리를 굽혀야만 했어. 아무리 현감이라 해도 지방 향리들을 전부 등지고는 큰일을 완성하기 어려웠거든. 신유는 지방 향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어렵게 그들을 설득했지.

그런데 마지막까지 뜻을 거두지 않은 이가 있는 거야. 바로 잘라야할 성 바로 아래 집에 사는 젊은 선비였지. 공사를 위해서는 안타깝지만 선비네 집이 이사를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어. 젊은 선비는 아내와 함께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지. 사람을 시켜 선물도 보내봤지만 어찌나 꼿꼿한지 되돌려 보내곤 했어. 하는 수 없이 신유 현감은 날을 잡아 몸소 선비네 집을 찾아갔어.

선비네 집은 넓진 않았지만 젊은 유생의 집답게 정갈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지. 선비는 마침 집에 없고 홀어머니와 며느리가 마당에 나와 있었어.

"아이고, 사또!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신유가 현감인 걸 알아본 노모는 몸 둘 바를 몰라 했지.

"불쑥 이리 찾아와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아드님과 면대를 청했건만 뜻이 완강해서요. 어머님께서 아드님을 좀 설득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신유는 한편으로는 집안의 형세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어. 선비의 어머니는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지. 그리고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어.

"사또, 송구스럽습니다. 허나 저희도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라 쉽게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답니다. 혹시라도 다른 방법은 없는지요?

선대 시조부님께서 당부하시기를 이 터에는 타성바지를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백 년이 넘도록 이사는 커녕 아예 터를 손댈 생각도 안 한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 터에서 재상이라도 나온단 말입니까? 허허허."
신유는 순간 효종 임금의 비밀 지령이 생각났어.

'이곳이 설마 용혈 자리라도 된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집안 뒤쪽에 있는 수령이 백 년은 족히 넘은 듯한 커다란 소나무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거야.

"어르신, 죄송합니다만 제가 무얼 좀 확인하겠습니다."
"네?"

신유는 어리둥절해 하는 두 사람을 제치고 집안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어. 그리고는 깜짝 놀라서 식은땀을 흘렸어. 세상에나! 소나무가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용혈이었던 거야.

선비의 집을 나온 신유는 신들린 사람처럼 보은산으로 올라갔어.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진읍성 안팎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신유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 나왔지.

"아차! 내가 하나만 보고 둘은 못 봤구나!"
그 길로 동헌으로 돌아온 신유는 임금께 자세한 보고서를 올렸어.

전하! 이곳 강진은 월출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를 등에 업은 황소가 넓은 들의 곡식을 배불리 먹고 거센 콧김을 뿜으며 일어설 형국입니다. 두 번의 전란에도 이 고을 백성들이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고 날로 세어지는 건 바로 이러한 지세의 기운을 받았기 때문이 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용혈도 보았나이다. 주변의 지세까지 도우니 장차 왕이 도읍할 수도 있는 곳임에 틀림이 없사옵니다. 신유가 장궤를 올린 지 보름도 되지 않아 임금의 하명이 전달되었지.

'인정 앞에 큰일을 망치지 말고 반드시 웅기의 지세를 다 파하라.'
임금의 명령 앞엔 누구도 반대할 자가 없었지. 반대하는 자는 모조리 잡아다 역모로 다스릴 판이었어. 하지만 젊은 선비는 끝까지 집을 떠나려 하지 않았어. 조상님들의 유지를 거스를 수 없었던 거야.

 

"끝까지 반대하면 역모의 죄로 다스릴 것이다!"
엄포를 놓았지만 선비는 집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질 않았단다.

"역모의 죄라니요? 어찌 그런 누명을 씌울 수 있단 말입니까? 조상 대대로 살던 터를 지키겠다는 것이 어찌 역모가 된단 말입니까?"

늙은 어머니는 포졸들을 붙들고 눈물로 하소연을 했단다. 안타까운 마음에 집주변에 모여든 사람들도 눈물을 찍어냈지. 하지만 대의를 두고 인정에 휘둘릴 수는 없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단다.

"어허! 왕께서 직접 명령한 일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도대체 왕께서 무슨 이유로 우리 집터를 헐어내신단 말입니까? 이 집터를 피해서 물길을 내셔도 될 터인데 왜 꼭 굳이 이 집이어야만 한단 말입니까?"

젊은 선비는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어. 신유도 그 사정이야 너무 안타까웠지만 차마 이 집터가 용혈이 있어서 파한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지. 그건 백성들을 동요하게 할 위험 천만한 소리였기 때문이야.

"여봐라!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저 소나무부터 뽑고 담을 헐어라! 뿌리까지 뽑아야 할 것이야!"
"예이!"

쾅! 쾅! 쾅! 현감의 명령에 도끼질이 시작됐어. 얼마 후 커다란 소나무가 허무하게 쿵! 하고 쓰러졌단다.

"소나무 뿌리까지 뽑고 그 주변을 다 파내거라!"
현감의 명령에 이번엔 또 장정들이 달려들어 소나무 뿌리를 뽑고 담장을 헐기 시작했어. 석 자쯤 파냈을까?

"아이쿠!"
곡괭이질을 해대던 장정들이 털썩 뒤로 나가 떨어졌어.

"어머나!
"세상에! 저게 뭔 조화래?"
구경하던 사람들도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지. 소나무 뿌리를 뽑아낸 자리에서 양귀비 꽃 보다도 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는 거야.

"멀쩡한 터를 흔들어대니 하늘이 노한 거야."
"그러게. 이 집 조상님들이 노했네. 그 노염을 어찌 감당할라고.
쯧! 쯧!"
그 광경을 본 젊은 선비는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단다.

"아이고, 서방님! 정신 좀 차리세요!"
젊은 선비의 부인은 선비를 흔들며 목 놓아 통곡했어.

"아이고 이를 어째? 저러다 멀쩡한 젊은이 하나 보내겠구먼."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수군거렸지. 그러나 신유 현감은 아랑곳하지 않았어.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담담했단다.

신유는 그 뒤로 공사에 박차를 가해 서문 성 일부를 허물어 고성제 물을 끌어와 연못을 채웠어. 그 뒤로 사람들은 그 곳을 물이 흐르게 한 목이라 하여 '수통목'이라고 불렀단다. 공교롭게도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강진 읍성엔 화재가 있었고 연못 덕분에 큰 피해 없이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대.

혹시 말이야 '수통목'을 파헤치지 않았으면 우리 고을 강진에서도 훌륭한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을까? 전설이지만 좀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지?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는 마. 강진은 큰 전란 속에서도 살아남은 땅이잖아? 그러니 앞으로 언젠가는 왕 보다 더한 인물도 나올 거라 믿어.

아, 참! 젊은 선비는 어찌 되었냐고? 글쎄 가엾은 선비는 그만 서러움이 북받쳐 그 자리에 쓰러져서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대.

그런일이 있고 서문에서 동헌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나는 행인들 중엔 가끔 귀신을 보았다는 소리가 나오곤 했지. 그래서 그 뒤로 그 고개를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아귀재', 또는 '아구재'라고 부르게 되었대. 귀신의 형상이 몹시 무서웠던 걸까? 마을의 옛 어르신들은 가끔 된소리로 '아꾸재'라고 부르기도 하시지.

그 귀신이 끝까지 집터를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은 젊은 선비의 귀신인지, 전쟁 통에 죽은 불쌍한 영혼들인지 그건 잘 몰라.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슬픈 죽음은 다신 없었으면 좋겠어. 그치? 그게 아무리 나라를 위한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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