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도암면 봉황마을
(마을기행)도암면 봉황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4.11.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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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새형국의 오롯한 산골마을

한차례 몰아닥친 한파는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몰아내고 겨울을 더욱 앞당긴다. 들녘에는 어느새 파종을 마친 보리가 어린아이의 배냇머리 같은 새파란 싹이 돋아나고 있다. 

도암초등학교 앞을 지나 비포장된 도로를 요동치며 올라가는 차량에 몸을 맡기고 한참을 가니 사철 마르지 않는다는 봉황저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봉황저수지를 끼고 굽이굽이 길을 따라 들어서면 첩첩산중에 아득히 내려앉은 마을이 새색시의 수줍은 미소 마냥 살포시 모습을 나타낸다.

콘크리트 포장된 마을길을 따라 10여채의 집들이 일렬로 들어선 이곳이 봉황마을이다. 해남 옥천면과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봉황마을은 한때 30여호에 이르는 마을을 형성했으나 최근 많은 주민들이 이주해 나가면서 11가구 20여명이 생활하는 소촌으로 변화된 모습이다.

마을 뒷산인 봉덕산 주변이 봉황새의 형국으로 봉황마을로 일컬어졌으며 마을 옆으로는 1급수 봉황천이 덕룡산 골짜기에서 발원해 봉황저수지로 흘러들고 덕룡산은 맑은 시냇가와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마을은 이름처럼 전설속의 봉황새가 실제로 살았을 것 같은 때묻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봉황마을은 해남군 옥천면에 속해 있었으나 주민들의 지속적인 건의로 지난 90년 8월 대통령령에 의해 강진군 도암면으로 편입됐다. 옥천면 소재지와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해 주민들이 도암면과 강진읍을 주생활권으로 이용해왔기 때문에 지난 80년대 초부터 강진군 편입을 전라남도, 청와대 등에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던 것. 

마을에는 봉황새의 알에 해당된다고 해서 부르는 계란봉, 냇가 건너에 있는 들인 건냉갈, 마을 동쪽 봉덕산과 학장산 사이에 있는 바위로 말 먹이를 만드는 가마솥과 같이 생겨 일컬어진 가매바위, 현 마을에서 북쪽으로 1㎞정도 떨어진 곳으로 처음 마을이 형성되었던 곳인 안터, 마을 앞에 있는 논으로 모양이 장구처럼 생겨 부르는 장구배미, 장구배미 옆에 있는 논으로 모양이 행기(큰 밥그릇)와 같아 일컫는 행기배미, 안터에서 옥천면 학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인 새꼭지, 새꼭지아래 논이 많은 골짜기로 도자기편이 많이 출토돼 부르는 이름인 도장골, 덕룡골에 있는 절터로 빈대가 극성을 부려 폐사했다고 하여 부르는 빈대 절터, 빈대절터 위에 있는 바위로 비스듬하게 서서 비를 피할 수 있어 부르는 비바위 등의 정겨운 지명이 남아있다.

오전 일찍 찾아간 마을은 늦가을 날씨만큼이나 한적한 모습이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마을에서 마을주민들을 쉽게 찾기 어려웠다. 마침 오토바이를 타고 외출을 하던 김수재(68)씨를 만나 마을에 대한 소개를 들을 수 있었다. 김씨는 “우리 마을은 주민들 사이에 고소, 고발없기로 유명한 마을”이라며 “해남군에 편입돼 있을 당시에는 범죄없는 마을로 선정되기도 했었다”고 마을자랑을 했다.

김씨에 따르면 옥천면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인 새꼭지를 통해 벼를 공판하러 가는 일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경사 50도의 비탈길이다 보니 통행하는 데 상당한 불편을 겪었고 자연스레 면소재지로의 외출 횟수는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또 도암면으로 가는 길도 석문리로 흐르는 봉황천을 따라 오솔길로 이루어져 마을주민들의 외출에 상당한 제약을 줬다. 김씨는 “농지가 박토여서 수확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면소재지로 나가 돈쓸 일이 없어 상당한 부촌을 형성했다”며 “없는 사람도 우리 마을로 들어오면 밥은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말했다.

마을에 연자방아가 남아 있다는 김씨의 말을 듣고 연자방아를 찾아 나섰다. 마을 앞 들판에서 쉽게 지름 1m, 높이 50㎝정도의 연자방아 웃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자방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을 만날 수 없었지만 연자방아의 보존상태는 양호한 듯 보였다.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만난 진인택(70)씨는 “여러 성씨가 함께 살다 보니 텃세가 없고 화합이 잘되는 마을로 출향인사들의 마을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며 “출향인들이 노래방기기를 마을에 기증해 줘 마을 경사에 요긴하게 사용했었다”고 소개했다.

봉황마을에는 군내버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주민수가 적다 보니 기름값도 나오지 않아 버스회사의 손해라며 주민들 스스로 버스운행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등산객들이 늘어나면서 한가지 불편거리가 생겼다. 마을 주변에서 휴대폰 통화가 되질 않아 등산객들이 유선전화를 걸기 위해 마을을 찾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을 찾는 등산객들을 위해 휴대폰 통화가 될 수 있도록 안테나 시설이 설치되기를 바라고 있다.

봉황마을 출신으로는 서울 종로구, 동대문구 세무서장을 거쳐 세무대학 교수로 정년퇴임한 후 서울에서 세무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김종환씨, 광주에서 외과의원을 하고 있는 김형연씨, 한국전력 여의도사무소 자재과장을 지낸 김종배씨, 서울 영등포구청 과장을 역임한 진광표씨, 전주문화방송 보도본부장으로 근무했던 김종하씨, 삼익가구 광주지점장을 지낸 진웅씨, 문화방송 주최 홍콩국제가요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던 김진원씨, 서울 마포경찰서에서 경사로 근무하는 김종상씨, 서울 도시철도공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시연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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