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에 복숭아를 찾아 나선 효자 최귀생
한 겨울에 복숭아를 찾아 나선 효자 최귀생
  • 강진신문
  • 승인 2020.04.26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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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등 작가와 함께하는 우리동네 옛 이야기 7]
하늘이 내린 효자 최귀생(Ⅰ)

"문안 인사 올립니다."최귀생이 훈장님께 넙죽 큰절을 올렸어. 훈장은 마치 아들에게 아침 문안인사를 받는 것처럼 옷매무새를 바르게 고쳐 잡았어. 표정만 봐도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야.

"귀생아, 문안인사는 이제 그만 받도록 하마."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훈장님께서도 '군사부일체'라 하지 않으셨는지요. 임금과 스승 그리고 부모는 하나와 같은데 어찌 훈장님께 문안인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옵니까."

귀생은 엎드린 채로 고개를 조아렸어. 훈장은 "허어!"하고 깊은 감탄을 자아내며 귀생을 내려다봤어. 그러고는 일어서서 귀생을 일으켜 바로 앉게 하며 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져주었어.

"역시 문하시랑평장사 최사전의 후손이 분명하구나."
"훈장님……."

어린 최귀생은 고개를 몇 번 숙여 훈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어. 이쯤 되니 곁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귀생을 보는 눈길이 여간 아니꼬운 게 아냐. 아비도 없는 귀생이 훈장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

아이들은 서당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어. 귀생이 훈장님께 인사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가자, 아이들 몇몇이 귀생의 뒤를 바짝 쫓아갔어. 그러고는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귀생을 붙잡아 담벼락에 몰아세웠어. 그 중 덩치가 큰 녀석이 윽박지르듯 소리쳤어.

"야! 최사전이 대체 누구야?"
"우리 탐진 최씨의 시조가 되시는 조상님이셔. 근데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귀생은 눈곱만큼도 주눅 들지 않고 덩치 큰 아이를 노려봤어.
"시, 시조……그게 뭐야? 새 이름이냐?"
"……."
귀생은 어이가 없었지만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어. 아이들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하는 듯 귀생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어.

귀생의 처음 조상님인 최사전은 고려 예종 때 어의였어. 왕을 치료하는 의술뿐만 아니라 학문도 넓고 깊었어. 예종이 죽고 인종 때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어. 이때 최사전은 척준경 장군을 설득하여 인종의 편에 서게 했지. 결국 이자겸은 영광으로 유배를 당했고, 나라는 평안해졌어. 그때 얻은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지금의 국무총리)야. 죽어서는 군동면 시목마을에 묻혔고 말이야.

아이들은 귀생의 말에 넋을 일을 뻔했어.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고을에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태어나고 살았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거든.

그런데 덩치 큰 아이만은 끝까지 귀생을 못마땅해 했어. 혹시 아이들이 앞으로 자신보다 귀생을 더 따를까 봐 조바심이 났거든. 그래서 앞뒤 안 가리고 냅다 소리를 질렀어.

"아비 없는 후레자식인 주제에 잘난 척하기는!"
"후, 후레자식?"

귀생은 더는 참을 수 없었어. 저보다 훨씬 큰 아이에게 덤벼 들었어. 아무리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태어나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못 배우고 예의범절도 모르는 오랑캐는 아니었기 때문이야.

"당장 그 말 취소해! 당장……."
"이 자식이 얻다 대고 덤비는 거야, 이익!"
덩치 큰 아이가 귀생을 덥석 들어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어. 옆에 있던 아이들도 발길질을 해댔어. 순식간에 귀생은 흙 범벅이 됐고,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어.

"한 번만 더 까불다간 죽는 줄 알어!"
아이들은 땅바닥에 침을 퉤 뱉으며 달아났어. 귀생은 어찌나 서럽던지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아렸어.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버지 없이 자란 티를 내 본 적이 없었어. 항상 정갈한 옷차림으로 나다녔고, 어른들에겐 아버지 대하듯 공손하고 깍듯하게 모셨어. 그런데도 '아비 없는 후레자식'소리를 듣게 되니 설움이 복받쳤던 거야.

하지만 귀생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단다. 어머니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 상심하실까 봐 걱정이 됐어. 그래서 냇가로 달려가 물로 흙먼지를 깨끗하게 훔쳐내고, 얼굴과 머리를 말끔하게 씻고 집으로 돌아갔어. 어머니는 다행히 귀생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차리지 못했단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귀생은 혼인을 했어. 귀생은 아내에게 몇 가지 신신당부를 했단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정(그림)을 살아계신 아버지처럼 모셔야 하며, 맛있는 것을 요리하거나 생겼을 때에는 반드시 아버지 영정 앞에 올려드리고 나서 먹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어머니 공양을 집안의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어.

아내도 명망이 있는 집안이고 효를 목숨보다도 더 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았기에 최선을 다했어. 그렇지만 사람이 신이 아닌 이상 실수란 있을 수밖에 없잖아.

어느 날 아내가 낡아 뜯어진 아버지의 영정을 바늘로 수선을 하고 있었어.
"에구머니나, 이걸 어째!"

아내가 느닷없이 비명을 질렀어. 귀생은 화들짝 놀라 뛰어와 아내를 보았어. 그리고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가 없었지. 애써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그 자리에 엎어져 통곡을 하기 시작했어.

"아버지, 이 불효막심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으헉헉!"
"여, 여보……."

아내는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어. 가만 보니 아내의 바늘이 영정 속의 아버지 얼굴을 찌르고 만 거야. 귀생은 마치 바늘이 살아 계신 아버지 얼굴을 찌르는 거나 다름없는 죄를 지은 거라고 여긴 거야. 아버지 얼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지. 귀생은 아내에게 벼락같은 호령을 했단다.

"감히 아버지 얼굴을 바늘로 찌르다니! 더는 아버지의 며느리 그리고 내 아내라 할 수 없게 됐소. 당장 짐을 싸서 친정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용서 하십시오. 흑흑!"
"용서는 절대 있을 수 없소. 당장 떠나시오!"

귀생은 아내를 사랑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불효는 용서할 수 없었어. 아내는 짐을 싸서 친정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어. 귀생도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가슴 아파 하였단다.

어머니에 대한 귀생의 효성도 지극정성이었어. 귀생은 어머니의 말씀은 뭐든 따랐어.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주어도 두렵지 않을 정도였지. 그런데도 어머니의 나이만큼은 귀생도 어쩔 도리가 없었단다. 중국의 진시황처럼 불로초를 찾아 나서고 싶을 정도였지.

어머니는 정신이 쇠약해지면서 가끔 얼토당토 않는 음식을 드시고 싶다고 했어.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느닷없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어.

"오늘 따라 달착지근한 복숭아가 먹고 싶구나."
"한겨울에 복숭아를……."
"에휴, 어미가 주책이구나. 그냥 못 들은 걸로 하려므나."
"아, 아니에요. 어머니 당장 구해다 드릴게요."

귀생은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갔어. 하지만 초여름에나 나오는 복숭아가 있을 턱이 없었지. 그래도 지성이면 감천 아니겠어? 귀생의 효성을 하늘도 알았는지 한겨울에 복숭아를 구할 방법이 있었단다. 얼음을 보관하는 석빙고에 여름 과일을 저장해둔 사람이 있었던 것이지.

"어머니, 어서 복숭아 드셔요."
"세상에! 이런 귀한 복숭아를……아이고, 귀생 아버지 증공조참의 나리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이 세상을 뜨셨습니까. 천하의 효자인 아들 귀생에게 호강 한 번 안 받아보시고요. 흑흑!"

어머니는 귀생을 뱃속에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부르며 눈물지었어. 귀생도 어머니를 따라 얼굴 한 번 실제로 본 적 없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단다.

정신이 점점 쇠약해진 어머니가 덜컥 병에 걸리게 됐어. 원래 대대로 명의 집안이었기에 귀생도 의술이 몸에 배어 있었어. 온갖 약초를 구해와 달여 들이고, 효험이 뛰어나는 침을 써보고 조선팔도의 이름난 의원을 불러와 치료를 해봤지만 어머니의 병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어.

"이 사람아 지금 뭐하는 건가?"
어느 날 지나가는 동네 사람이 귀생을 보고 큰소리 쳤어. 귀생이 어머니 홑치마에 쌓인 똥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고 있는 게 아니겠어. 동네 사람은 달려와 기절초풍할 짓을 하고 있는 귀생을 뜯어 말렸어.

"귀생이 자네 미쳤네, 미쳤어. 먹을 게 없어 똥을 다 먹는가?"
"어허, 호들갑 좀 그만 떨게나. 어머니 병이 나아지는 기미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고 있는 것일세."
"뭐, 뭐라고?"
"원래 궁궐의 어의들은 임금의 똥을 맛 보고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고 있다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허어!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네, 효자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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