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다신계...후손들이 이어받다
다산, 다신계...후손들이 이어받다
  • 강진신문
  • 승인 2019.08.1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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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준 교수의 다산정차를 말하다 3]

 

가장 대표적 인물 윤재찬...다산과 다산학단 주변 사소한 기록 모아 필사

■ <다신계>의 후예
이러한 노력 끝에 1978년 <다산학보>가 창간되었다. 당시 연세대학교 초대총장이던 백낙준이 고문으로 참여하고, 전남도지사가 간행위원장으로 참여하고, 정채균 강진군수는 부위원장이었다. 백낙준 고문은 <다산학보>의 창간호 서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적복원회에서 다산선생의 유적(천일가, 동암, 서암)을 복원하고 유적비를 제막한 것은 전통문화를 보존하면서 새 문화의 육성에 임하려는 것으로 우리 문화계에 일대 규범적 성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산선생의 유적복원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다산선생의 학문을 이해, 체득, 실천, 계승할 수 있는 활동이 뒤따라야 비로소 다산 유업은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부터 다산학은 새로운 물고를 틔우면서 140년 동안 묻혀있던 다산의 사상과 정신이 되살아 나기 시작하였다. 윤재은과 윤재찬이 시작한 정다산유적보전회의 노력이 새로운 씨앗이 되어 피어나서 다산학 연구의 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윤재찬은 다산을 연구하려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자료를 제공하였다. 윤재찬이 소장하였던 <다신계절목>에 관련되어, 이을호와 박석무에게 자료를 제공한 것이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앞서 '<다신계>의 전승'에서 <다신계>가 우리에게 남긴 문화적 유산과 제다법이란 무형적 유산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장에서는 <다신계>의 문화적 유산을 물려받은 차인들의 활동과 다산학단의 저술을 보존하는 지역주민들의 노력을 중심으로, 제다문화의 무형적 유산은 <다신계>가 전하는 제다방법을 복원하고 재현하고자 하는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 성과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다신계》의 문화적 유산의 후예
강진에서 다산과 <다신계>의 정신을 전하는 가장 대표적 인물은 윤재찬이다. 그는 <다신계>의 계원이었던 윤종심의 3대손일 뿐만 아니라, <다신계절목>을 우리에게 전하여준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다산과 다산학단 주변에 관련된 사소한 기록도 놓치지 않고 모아서 필사를 하여
<낙천총서(樂泉叢書)>를 남겼고,

그 밖에 여러 책의 초서집인 <낙천부진(樂泉裒珍)>을 남겼다. <낙천총서> 제1집은 <귤림문원(橘林文苑)>인데, 그 가운데서 윤종민이 남긴 다산의 증언을 기록한 것은 윤재찬의 다산에 대한 존경심을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 정공은 자호가 탁수(籜叟)인데, 또 당호를 '초상조수지가(苕上釣之家)'라고도 했다. 그 문장과 글씨는 근고에 드물게 보는 것이다. 일찍이 귤동에서 지내실 적에 만필 몇 장이 있었다. 자획이 아름답고 글에 담긴 이치가 훌륭해서 내가 어렸을 적에 암기해서 외웠다. 지금 이를 적는다. 동치 무진년(1868) 단옷날 빗속에 금양 늙은이가 붓을 끄적여 써둔다.

소서 : 집안 중에 종민(鍾敏)이란 분이 계신데 호가 금양공(琴陽公)이시다. 다산 선생께서 남기신 몇 가지 글을 이 종이에 모아 기록하였다. 신해년(1851) 간에 우리 완당(阮堂) 석우공(石愚公)께서 당악(棠岳)의 백포(白浦)에서 집안의 탁사(濯斯)란 호를 쓰시는 승지공의 포상의숙(浦上義塾)에서 스승이 되셨을 때, 여가에 <유서최근(儒胥最近)>을 엮으시고 한 부를 베껴 써두었다. 상사(上舍) 금양공께서 남긴 글씨여서 끌어다 적어둔다.

이 두 기록은 다산을 대하는 세대 간의 이어진 존경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고, 당시 기록의 전승이 어떻게 이어졌는가를 살필 수 있는 부분이다. 금양 윤종민은 <다신계>의 계원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다산초당에서 보았던 다산의 문장을 암기해서 그것을 50여년이 지난 1868년에 기록으로 남긴다.

또 그것을 윤재찬은 <귤림문원> 편찬과정에서 다시 옮겨 놓아서 우리에게 전하여 준다. 어쩌면 한낱 쓸모없는 종이쪽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다산의 문장이 이렇게 세대를 초월한 암기와 기록으로 남아진 것이다. 다산은 제자들에게 초서와 기록을 학문의 기본으로 가르쳤다. 그 전통이 윤재찬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다산학의 깊은 뿌리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 다산초당 건물들에 걸려 있는 현판 '다산초당(茶山艸堂)'과 '보정산방(寶丁山房)' 은 추사의
글씨를, '다산동암(茶山東菴)'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해서 윤재찬이 각을 한 것들이다. 이에이리가 귤동을 방문했을 때 윤재찬은 38세, 그 당시 서예가로서 도장 새기기를 잘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정다산유적복원회에서 윤재찬이 그 복원사업에 얼마나 주도적 역할을 하였을지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낙천선생의 문서 보관 정신은 1975년 건립된 천일각(天一閣)이란 현판을 통해 잘 나타난다.

천일각은 다산초당 동암 쪽에 있는 정자로 다산선생이 흑산도의 형님을 그리며 다산이 서 있었을 곳을 추정하고 지은 건물이다. 천일각은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때인 1561년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을 지낸 범흠(范欽)이 천하의 모든 책을 소장하고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장서각이다.

그 정자의 이름을 빌려서 낙천선생이 직접 써서 각을 했다. 다산의 자료를 영원히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윤재찬의 뜻이 '천일각'에 그대로 담겨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양광식(梁光植, 1947- )이다. 호는 '청광(靑光)'이고 족보이름은 광승이다.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서 출생하여 1966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서 있었던 발굴작업을 하면서 우연히 주웠던 대일광(大日光)이란 명문이 쓰여진 파편하나가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1975년 <강진군지>를 한글로 번역하여 <강진향토지>를 발간할 때, 윤재찬을 만나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청자의 빛이란 뜻에서 따온 '청광'이란 그의 호에서 알 수 있듯이, 강진의 고려청자와 다산에 관한 자료조사와 연구로 일생을 살고 있다. 스승 윤재찬이 문중에 전하는 다산관련 자료를 정리하였다고 한다면, 제자인 양광식은 발로 뛰어 그 자료를 찾아내고 정리하고 있다. 

1960년대 강진에서도 차 문화가 진작되면서, 강진다인회가 창립되고 그 이후 강진차인회, 만경다설, 명인회, 월남다인회, 명원재단강진군지부등이 개설되었다.

특히 2007년 일지암에서 18년 동안 상주하던 여연스님이 백련사로 오면서 강진의 차 문화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어 만경다설(萬景茶說)이란 공동생산자조합이 만들어졌다.

2010년부터 준비한 강진 차인들의 숙원이었던 차단체가 2011년 정식으로 발족하여 강진차인연합회(1대 김광진, 2대 나종식, 3대 김한성, 4대 김상수 회장)가 결성되었다. <다신계> 200주년 기념행사를 치루면서 <다신계>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취지로 결성된 것이라 더욱 뜻이 깊다 하겠다.

다산유적복원일지는 다음과 같다.

1936.   4.        구 다산초당 해체(폐허화)
1957.   5. 25.   현 다산초당 복원
                    고 윤재은씨 주관으로 윤재찬씨와 윤씨문중,
                    그리고 강진군내 유지 성금으로 복원 
1975. 12. 30.    다산초당 기와공사 및 서암 천일각 공사 준공
1976. 10. 15.    다산유적비 건립추진위원회 구성
1976. 12. 30.    다산초당 동암 부대시설 준공
1976. 12. 31.    다산초당 주변 3개념 계획 수립
1977.   4. 10.    다산선생 141주년 기념 다산초당, 동암, 서암 준공 및 유적비 제막식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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