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흑백사진]수인산은 저렇게 변함없는데
[나의 흑백사진]수인산은 저렇게 변함없는데
  • 강진신문
  • 승인 2004.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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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권<70. 전 병영면장>

▲ 김정권씨
나는 병영 수인산을 바라보며 어린시절을 보냈고,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도 매일 수인산을 바라보며 산다. 산은 저렇게 변함없는데 내모습은 세월속에 참 많이도 변했다.

35세때 병영조합장을 했고, 40대때부터 4년간 병영면장을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젊은 나이였다. 그후 지금까지 나의 삶은 고향을 위해 조그만 봉사를 해온 시간들이었다.

병영소도읍가꾸기 추진위원장을 시작으로 83년도에는 면사무소를 지을때 추진위원장을 맡아 전국의 출향인들을 만나러 다녔고, 병영초등학교 강당과 농협청사, 병영파출소 건립당시에도 역시 추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통일주체대의원도 해 보았고 병영발전협의회장도 4년 했었다.

돌이켜 보건데 나는 돈에 대한 애착은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는 인기가 없지만 주변 지인들에게는 인기가 꽤 좋은 편이다. 대도시에 가서 혹시 연락을 하지 않으면 친구들이 매우 섭섭해 한다. 고향을 위해 해 놓은 일들을 회상하면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여유로운지 모르겠다.

한 평생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세월이었다. 이렇게 살기까지 주변사람들의 도움이 늘 함께 했다. 고마운 분들이다. 부끄러움 없는 시간들이 여생에서도 고스란히 펼쳐지도록 나는 늘 기원하고 있다.

 

▲ 나는 29세이던 1964년에 마을일을 보며 지금의 발천마을~제2성남교까지 도로를 확장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적이 있는데 5년 후인 1970년 4월 마을사람들이 고마움을 잊지 않고 공적비를 세워 주었다. 당시에는 먹을게 부족할 때라 행사가 열리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곤 했다.

 

▲ 1947년 내가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던 사진이다. 앞에서 두 번째 줄 우측에서 다섯 번째가 내 모습이다. 저 어린 모습들이 지금은 모두 노인이 됐을 것이다.

 

▲ 1955년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결혼식을 했다. 일찍한 셈이다. 어른들이 10대 종손인 내가 결혼을 하지 않으면 대학을 보내주지 않는다고 으름장을 놔 작천 죽산마을에 장가를 들었다. 이틀동안 처가댁에 머물렀는데 어찌나 대접이 융숭하던지 지금도 당시 모습이 눈에 선하다.

 

▲ 나는 조상님들이 장례식 사진을 몇점 소장하고 있는데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내가 26세이던 1960년 아버님(김용제씨)이 돌아가셨다. 내가 결혼 후 5년 후에 돌아가신 셈이다. 상여가 지나는 곳은 병영성 북쪽 들로 보이며 멀리 보이는 산은 옴천쪽이다.

 

▲ 할머니는 아버님 보다 10년 뒤인 1970년 9월에 돌아가셨다. 할머님의 장례는 화려했다. 상여 앞뒤로 2명의 소릿꾼이 올랐고, 쌀 6가마를 들여 2층 상부라고 해서 32명이 메는 대규모 상여가 제작됐다. 병영시내를 지나는 모습이다. 여자들 머리에 쓰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 지금의 집자리인 병영택시부 자리다. 나는 당시 담배를 취급하는 점방을 했었다. 왼쪽 큰 아이가 지금 44살인 복희이고 어린아이는 복희의 동생 숙희(38)다. 좌측 평상에 뭔가 수북히 쌓여있고, 뒤쪽에는 아마 계란이 메달려 있는 것 같다. 오른쪽에 있는 담배 판매대 안에 담배가 가득했다.

 

▲ 어머니(좌측. 강양례씨)의 사진이다. 1930년대 사진이다. 나는 어머니의 사진을 볼때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사회생활을 할수 있는 모든 정신적 기반을 제공해 주셨다. 매우 당차시고, 아픔과 고통을 조용히 삭히시는 분이셨다.

 

 

▲ 1971년 내가 병영초등학교 육성회장일을 맡고 있을 때 운동회날 교장선생님과 연단에 올라가 인사를 받고 있다. 오른쪽 키큰 사람이 내 모습이다. 아이들의 모습이 활기차다. 당시에는 운동회날이 지역사회의 큰 잔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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