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같은 미라를 집어 치워라
귀신같은 미라를 집어 치워라
  • 강진신문
  • 승인 2004.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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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석의 편지] 고향에 다녀와서

나는 비운의 인생이어서인지 고향에 갈 때마다 비와 인연이 깊다. 완향화백이 생존했을 때 병문안 갈 때도 억수같이 비가 오더니, 완향 화백이 천상에 가신 후 「금서당」과 「기념관건립」이 궁금해서 고향을 찾았더니, 또 비가 축축히 나리어서 내 마음도 후줄근히 비가 내렸다.

영랑생가에는 시조시인 양치중님이 안내인으로 봉사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구면이라 영랑과 현구와 완향의 「인간예술」이야기로 담소하면서, 「금서당」]으로 가기 전 이슬비 오는 고적함을 달래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은행나무가 더 늙어 품위가 있었고 한때 단발했던 대 삽 숲이 더 어울려 안심이 되었다. 장광 옆 부동산 벼락 부자같은 비석이 없어진 것은 여간 반가웠고, 자연석으로 시비를 사립문 밖에 세운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본채 뒷 울안에 수백 년 되는 동백이 더 당당해 진 것이 든든했다. 내가 영랑생가에서 제일 소름끼치는 것이 영랑이 집필하고 있는 「미라」인데, 제발 귀신 날 것 같은 이것만은 치웠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영랑 후손이 꽤 많은데 영랑 생가만 덜렁 복원해 놓고 유품하나 없는 이런 무성의한 생가는 나는 대한민국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강진만이 누리는 치욕인 것이다.

 나는 타지 사람들이 영랑생가에 다녀와서 비난과 조소를 해도 별다른 답변을 하지 못하고 묵묵부답한다. 오히려「금서당」에 가서야 이 비운의 화가에 대하서 동정을 하면서 군의 무관심과 안위함에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나는 장흥이 처갓집인데 천관산「문학공원」이야기를 문화원장 윤수옥 형과 작가 한승원 형과 하면서, 옛날은 강진문화가 장흥보다 훨씬 앞장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할 때 너무 부끄러웠다.

현재 장흥군 문화관광과 과장이 관산읍장이었을 때 천관산 문학공원이 조성되었다는데 처음엔 군민의 반응이 시큰둥하다가 이제는 전국적으로 명성이 알려져서 올해 외부 관광객 반응이 너무 좋아서 더 확장한다는 것이다.

내가 석문산 소공원에 시비공원을 만드는데, 내 마지막 인생을 투자하고 싶은 것은 만일의 경우 석문산 소공원에 시비공원이 세워진다면 틀림없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아담한 시비공원이 될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근에 다산초당과 백련사와 강진만이 있으니 관광지로서 최적격이고, 천혜적인 석문산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을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인 것이다.

현재 문화재청장 유홍준님 덕택에 강진사람들은 「무위사」나 「다산초당」이나 「백련사」나「고향청자」나 「병영성지」를 무위도식하듯이 파먹을 것이 아니라 별다른 자원이 없는 강진의 살 길은 자꾸 새로운 문화자원을 개척 개발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영랑생가 황토 돌담은 정겨웠지만 시멘트 문화 문명에 질린 도시인들이 고샅길을 시멘트로 범벅해 놓은 것을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영랑생각 앞에 고층 빌라를 보고 그 건물 허가를 내 준 군 관련부서의 식견에 대해서 뭐라고 칭찬하겠는가.

「금서당」으로 가는 길의 꿈같은 서정시 같은 정취도 이젠 찾아 볼 수 없고 「금서당」서까래는 썩어가고 이곳저곳이 물이새서 엉망이었다.

빽빽이 숨 막히게 진열해 놓은 그림 공간이 너무 좁아서 여백이 하나 없는 것은 “이건 너무 한다”는 한탄이었다. 군 문화관계자와 미망인 사이에 빨리 의견 접근을 보아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새벽 첫차에 강진 군내 마량 행 버스를 타고 가는 해안 길은 환상적이었다. 나는 인생이 고독하면서 아름다운 것은 우리들 삶의 골목골목이 예정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청자문화제」 때문에 조성된 꽃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비 온 뒤의 들녘과 산과바다와 꼬막 같은 섬들도 청량했다. 마침 안사람의 부탁으로 「반지락」을 사러가는 마량장이라 북적대는 선창의 시끄러움도 정다웠다.

선창가 배들의 수요보다 훨씬 더 많은 아침 갈매기들의 날개 짓과 등대 옆 방파제에 도시 낚시꾼들 원색의 유니폼, 횟집에는 살 오른 전어들이 싱싱히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선창가를 어정대다가, 시작(時作) 메모를 했고, 모든 절망한 것들이 천천히 날아오를 때 개펄이 만든 지평선을 보고 바다로 가는 따뜻한 바람처럼 신비하고 건강한 하늘 고요의 아침을 영접했다.

각종 나무숲에 숨은 선경 까막섬에 훌쩍 뜀박질음 하고 싶었고, 갯바람 속에 스민 삶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량에서 만난 눈빛 맑은 사람들하고 전어회로 아침 해장술을 하고 싶었다.

내일은 봉평「효석문화재」참가를 해야 하니, 오늘은 신협 임상호 이사장님과 전 의장 김남수 동생과 점심을 하고 내일부터 타향살이를 또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고향사람들이여, 다시 만날 때 까지 안녕입니다.

-가평 백림제에서
<정문석 시인은 강진출신으로 강진농고와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를 수학했으며 방랑농부등 수편의 시집을 발간했습니다. 현재 경기도 가평에서 창작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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