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함동정월(咸洞庭月)을 생각한다
기고- 함동정월(咸洞庭月)을 생각한다
  • 강진신문
  • 승인 2004.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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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병영 와보랑께 박물관장)

정부 여성부 산하 기관인 여성사전시관이 근현대 15인의 여성 선구자를 뽑으면서 우리지역 출신 함동정월(1917년~1994년)을 선정했다.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함동정월은 우리주위에서 모르는 분이 너무 많다. 추석을 앞두고 함동정월이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 해 보는 것도 의의 있는 일이라 하겠다.

함동정월(咸洞庭月, 본명:咸金德, 아호:昭芸)은 1917년 8월 25일(음력) 병영면 지로리521번지에서 아버지 함일권과 어머니 박양근 사이의 2남 5녀 중 여섯째(넷째 딸)로 태어났다.

함동정월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11세 때 광주 갑부 김창수의 양녀가 되었고 국악으로 돈을 벌기 위해 광주권번에 들어갔다. 이 때 함 명인은 그 권번에서 1년 6개월 동안 박모(朴某) 등의 문하에서 시조, 양금, 가야금, 승무, 검무 등을 배웠다. 그는 광주권번에서 수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12세 때 김복술 문하에서 가곡을 배웠다. 그리고 김군옥(김채만 제자) 문하에서 적벽가, 흥보가 토막소리를 배웠고 임공교(공창식 제자)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함동정월은 목포 사람 박준규를 만나 19세 때 첫 애를 낳았고 21세까지 목포에서 살다가 어머니의 말에 따라 서울 조선권번에서 잠시 활동했다. 이 때 서울 갑부 정모(某)의 다섯번째 소실로 들어가서 22세부터 27세까지 아들 셋, 딸 하나를 낳았고 27세 때 온양으로 이사하여 6.25 때까지 살았다. 함동정월이 최악의 인연으로 여긴 김수정은 이 때 정모의 네번째 소실이었다.

김수정(金水晶)은 가곡의 대가인 하규일(河圭一) 문하에서 가곡을 배웠고 일찌기 가곡, 춤으로 이름을 날려서 일본 콜럼비아 음반회사에서 스승인 하규일과 함께 <연락곡>, <화편>, <평조회상>과 같은 정가 유성기음반을 취입한 바 있다. 함동정월은 6.25 때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으나 둘 다 일찍 죽었고 6.25 전쟁을 겪은 후 38세 때 대전으로 이사하여 막내 아들을 낳았다.

대전에서는 국악원을 차려 원장을 하면서 이때부터 정모와 함께 살면서 놓았던 가야금을 다시 시작했고 나성엽과 김초향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그리고 41세 때 정모와 헤어지고 아이들과 함께 서울 신당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이 때 함동정월은 정악원에서 시조를 배웠고 박초월 문하에서 판소리를 익혔다. 그리고 53세부터 57세까지 명고수 김명환과 함께 살면서 음악 교류를 가졌다.

함동정월은 1970년대 초반부터 작고할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함 명인의 막내 아들 정보환을 비롯해서 김해숙, 이경자, 김일륜, 윤미용, 나현숙, 성애순, 김정자, 이재숙, 황병기, 황병주, 이영희, 박재희, 정회천, 김상순, 신영균 등이 함동정월 문하에서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함동정월은 1980년 11월 1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가 뛰어난 기량을 지녔으면서도 뒤늦게 인간문화재가 된 것은 공연, 방송 등에 별로 나서지 않고 묻혀 지냈기 때문이라 하겠다.

함동정월은 젊은 시절 겪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만년에 심한 피해 의식에 시달렸다. 남자들로 부터 버림 받고 극심한 경제고에 시달려야 했고 1977년 막내 아들의 자살, 1979년 교통사고, 1989년에는 [춤추는 가얏고]라는 소설과 드라마로 인해 더욱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만년에는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렸고 동네 사람들로 부터 욕쟁이 할머니, 심지어 미친 할머니라는 말까지 들었다. 용무있어 찾는 이들도(1989년) 겨울 함 명인을 만나러 갔다가 동네 아주머니들로 부터 그런 욕설을 들었고 함 명인의 며느리로 부터 만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문전에서 발 길을 돌려야 했다.

1994년 10월 12일 함동정월은 서울 면목동에서 향년 77세로 타계했다. 변변한 독주회 한번 제대로 갖지 못한 채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형편이 나아지면 고아원을 만들고 싶다던 그는 인간문화재 보유증서를 걸어 놓은 셋방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갔다. 우리나라 초기 많은 인간문화재들의 만년 모습이 그랬듯이 그도 또한 그랬다.

함동정월은 오늘날 가야금산조 명인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여러가지 악기와 민요, 정가, 무용을 두루 잘했다 한다. 이 콤팩트디스크에 복각된 그의 다양한 음악들을 들어보면 생전에 그가 한 말대로 그가 가야금산조뿐 아니라 가야금병창, 판소리, 남도민요에도 많은 애착을 가지고 공들여 수련했음을 알 수 있다.

병영에는 현재 전라병영성 공사 중이다. 아울러 하멜기념관 사업도 추진 중에 있는 것 으로 알고 있다. 이와 함께 함동정월 그 녀가 나고 자라고 배운 이곳에, 작은 기념관을 지어 각종 국악자료를 전시 해 놓은 다면 이 고장을 찾는 이들에게 더욱 뜻 깊은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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