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족하진 않았지만 정이 듬뿍했던 옛날이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정이 듬뿍했던 옛날이었다.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4.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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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흑백사진들]작천 박병채씨

▲ 박병채씨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고향에 돌아온지 어느덧 10년이 됐다. 내일 모레면 70세가 되니 나도 이제 적지 않은 세월을 산 셈이다. 고향에 돌아와 새삼느끼는 것은 조상님들에 대한 존경심이다. 또한 기현 할아버지께서 동학혁명당시 동학군의 상황을 기록한 ‘강제일사’의 중요성이 새삼돋보이고, 강재일사를 보관중인 용정사를 지키는 것도 내 생애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많은 흑백사진은 아니지만 몇점의 사진을 보니 반갑고 즐겁기 그지없다. 과거는 나름대로 독특한 의미가 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정이 듬뿍했던 옛날이었다.<박병채. 69. 작천명 용정리>

 

▲26세이던 대학 3학년때의 사진이다. 나는 전남대 경제학과를 다녔는데 친구자취방에서 막걸리를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제일 왼쪽이 나). 상아래 막걸리 주전자가보인다. 나름대로 멋은 있었는지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며 전축을 듣고 있다.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였던 것 같다.

▲내가 18세(1953년)된던 해의 사진이다. 50년전 지금의 용정사가 있는 곳에서 제사를 모시는 장면이다. 지금은 건물이 지어졌지만 예전에는 비석만 있었다. 제관들의 모습이 보인다.

 

▲ 역시 1953년도 사진이다. 보성의 율포해수욕장이다. 사진속의 주인공은 여동생들과 마을이웃 아이들이다. 예전에 무슨 해수욕장을 갔을까 싶지만 당시에도 여름이면 우리마을 사람들은 주로 율포해수욕장까지 피서를 떠났다.

 

▲ 스물한살 때 여수에 여행갔을 때 여수앞바다에서 찍은 사진이다. 내가 중절모를 쓰고 있는데 예전에는 총각들이 여행하면 반드시 중절모를 썼다. 여수는 지금 천지개벽을 했지만 당시에는 저렇게 돛단배가 떠 있었다.

▲66년전 작천에서 행해지던 결혼식의 모습이다. 지금은 작고하신 고모의 결혼사진이다. 고모의 족두리가 매우 화려하고, 복장 또한 수려하다. 고숙의 복장 역시 고급스런 장식을 하고 있다. 앞쪽에는 종이로 만든 꽃이 보이는데 당시 풍습이었다. 뒤쪽에는 대나무가 장식돼 있다.

▲ 70년전인 1934년 사진이다. 할아버지(좌측 흰두루마기에 갓을 쓴 분)께서 작천초등학교를 방문해서 찍은 사진이다. 앞줄 제일 오른쪽 계신분이 작천의 초대 민선면장인 박희권씨다.

▲ 언제적 사진일까. 오래전 작천초등학교 소풍날로 보인다. 장소는 작천면 인근 산이었을 것이다.

사진의 설명은 소장자의 기억을 더듬어 적은 것입니다. 다른의견이나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인터넷을 통해 올려주시거나 전화 434-7771번으로 연락주시면 검토후 반영하겠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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