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5]다산과 차 그리고 강진
[논문5]다산과 차 그리고 강진
  • 강진신문
  • 승인 2004.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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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환<강진군수>
 

1. 들어가는 말 - 다산은 차의 중흥조이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다산 정약용은 영조 38년인 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9대를 연달아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에 들어간 진주목사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며, 시(詩), 서(書), 화(畵)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다산의 생애는 삶의 전환점이 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3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정조의 총애를 받다가 그의 나이 40세, 신유사옥으로 강진에 유배될 때까지 득의의 시절이고, 제2기는 강진유배 18년간의 적거시절로 58세까지이며, 제3기는 유배가 풀려 임종까지 유유자적하던 말년시절이다.

흔히 다산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중에 혜장선사와 초의선사와의 교유를 통해 차문화를 체득한 다인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강진에 유배되기 전 19세 때부터 40세까지 벼슬 시기에도 이미 차를 즐겨 마신 다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16편의 차에 관한 시가 있다. 철저하게 기록하기를 좋아했던 다산은 차에 관한 시 속에 당시의 차 마시는 풍습을 전해 주어 다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다산은 20세에 차를 좋은 샘물에 끓여 맛을 시험할 정도였고(이 때 초의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혜장은 10살이었다), 차가 나쁜 버릇을 다스린다고 여겼으며 혼자서 차를 즐길 줄 알았고, 다탕의 빛깔과 향기를 자세히 감상하며 즐기는 다인이었다. 22살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신 후 차를 마셔 술을 깨고 정신의 나태를 바로 잡았으며, 무더운 여름에도 차를 즐겨 찾을 정도로 생활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청년기와 중년기에 걸쳐 20년 이상 이미 다생활을 하였으며, 당시 왕실과 귀족 및 승려와 선비계층의 다문화를 체득한 다도의 대가로, 우리 차문화의 중흥조이다.

다산은 동다기(東茶記), 다암시첩(茶盒詩帖),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 등을 썼으며, 걸명소(乞茗疏) 등 47편의 다시(茶詩)를 남겼다. 다산의 차생활은 다암시첩과 여유당전서에 담긴 시문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18년 강진유배 생활 속에 남긴 「다신계절목」은 당시의 차 제조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다신계 계사(契事)를 위해 남겨 둔 유배지 강진의 보암 서촌의 밭은 다산이 손수 가꾸던 다원이었다.

다산은 우리의 차나무를 재배하고 잘 관리하여 중국의 말과 바꾸어 나라 살림에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다마(茶馬) 무역을 주장했고, 중국의 차세(茶稅) 전매제도를 역사적으로 고찰한 ‘각다고’를 남겼다. 그는 차를 말리는 배로와 차맷돌을 사용하였고, 주로 다조(차 화덕)에 차를 끓였다. 또한 상토지(桑土誌)에는 차나무 재배법까지 상세히 적어 놓았다. 이 중 동다기는 초의선사가 쓴 동다송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을 뿐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이러한 배경에서 다산을 우리 차문화의 증흥조로 보는 것인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다산은 강진 유배 전부터 차를 즐겨 마신 다인이었다. 둘째, 다산의 차에 대한 이론이나 지식은 혜장이나 초의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셋째, 다산은 차의 이론가로 그치지 않고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종다(種茶), 전다(煎茶), 제다(製茶), 음다(飮茶)에 소용되는 지식을 남긴 실천가이자 교육자였다. 넷째 해배된 후에도 유배지의 제자들과 차회를 맺고 차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 다생활을 계속 했다.

2. 유배지 강진에서의 차생활


1) 강진 차의 우수성

지금도 다산이 오르내리셨던 다산초당 마을 사람들은 다산초당 뒤편을 차동산이라 부른다. ‘다산(茶山)’이라는 정약용 선생의 호는 만 여 그루의 차나무가 자생하는 다산초당 뒤편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약용은 탁옹, 자하도인, 사암, 태수 등 여러 호가 있지만, 다산이라는 호는 강진에 유배 와서 차와 인연되어 쓰게 된 호이며, 75세로 영면할 때까지 가장 즐겨 쓰던 호였다.

다산은 우리 나라 차의 우수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특히 강진지역에서 나는 차의 우수성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진에는 우리 고유한 토종의 야생차 군락지가 각 지역에 대단위로 분포되어 있다. 다산의 적거생활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이 보성에 대규모 차밭을 조성하여 기계화 생산으로 사실상 강진의 야생차는 그 명성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다신계문화원 등을 중심으로 다산이 즐겨 마셨던 차의 명맥을 잇고, 다산의 제다법대로 재현하려는 노력이 뒷받침 되어 현재는 수제차를 만들어 가족 친지들과 나누는 다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다산은 동다기에서, “어떤 이는 우리 나라 차의 효능이 중국 월지방(절강성)에서 나는 차에 못 미친다고 의심쩍어 한다. 내가 보기에는 색, 향, 기품, 맛에 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다. 다서(茶書)에 의하면 육안차는 맛이 좋고, 특히 몽산차는 약효가 뛰어나다고 했는데, 우리 차의 맛과 약효가 모두 훌륭하다. 만약 당나라의 이찬황이나 육우가 살아 있다면 그들은 나의 말을 반드시 옳다고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산의 이러한 주장은 초의선사가 「동다송」에서 그대로 인용하였다.

다산은 손수 차나무를 재배하고 찻잎을 따서 만드는 법과 차를 끓이는 전다법에 숙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차의 분류는 보통 엽차(葉茶)와 병차(餠茶 : 떡차), 세차(細茶), 조차(粗茶), 곡우눈차(嫩茶)와 만차(晩茶) 등이 있는데, 다산의 제다법(製茶法)과 전다법(煎茶法)대로 만든 차를 「다산의 명다(名茶)」, 「만불차(萬佛茶), 「황다인 정다(丁茶)」 등이라고 불렀다.

초의보다 두 살 적은 이규경(李圭景)은 쓰기를 “만불차는 다산이 귀양살이를 하면서 찻잎을 쪄서 말려 작은 떡덩이로 만드는 법을 가르친 것인데, 이 차는 강진현의 만불사(萬佛寺)의 차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고종 때의 문신인 운양 김윤식(金允植)이 쓴 글에 의하면 “강진의 다산에는 명차가 나는데 정약용이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차의 품질이 좋다.”고 했으며, 강진의 「금릉월산차(金陵月山茶)도 다산의 제다법대로 만든 차라고 했다.

또 순조 때의 조재삼은 그의 문집에서 “해남에는 예부터 황다(黃茶)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오직 정약용만이 알 뿐이므로 정다(丁茶)라 이름 한다.” 즉, 그는 혜장 등으로부터 차를 얻어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제다법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의 이러한 면모는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실학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유배생활을 하므로 의식주를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대학자였으므로 많은 제자들과 동네 사람들의 도움이 매우 컸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의 생활이 곤궁했음은 추운 겨울에 손수 불을 지핀다든지 채마밭에 거름을 주는 일 등에서 알 수 있다.

다산은 특히 차와 관련된 일은 손수 하였다. 우선 그는 차나무 기르는 법을 개척했고, 다무책(茶務冊)을 짓기도 하였다. 실제로 정약용이 살던 다산에는 만 그루의 차나무가 있었다고 했는데, 관리는 다산이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리고 차를 끓일 물을 손수 길어왔고 차를 끓이기 위해 솔방울로 숯을 만든다든지 차맷돌을 손수 돌려 갈았다. 다산이 사용한 다구(茶具)는 여러 가지 화덕 외에 다정(茶鼎 : 차솥)과 차냄비(茶錠), 다병(茶甁), 다연(맷돌), 다종(茶鐘), 다구(茶臼), 다관(茶罐) 등이 있었다. 제다와 전다에 임하는 위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 다산이 인간살이에서 차와 다사(茶事)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2) 다산초당에 남긴 다산의 발자취

다산초당은 원래 단산정(慱山亭)으로, 강진읍에서 30리쯤 떨어진 귤동마을 뒷산 중턱에 자리한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尹慱)의 산정이다(모든 저서에 윤박(尹博)으로 잘못 기록되어 수정함. 필자의 6대 조부).

이 마을은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 집성촌으로 처사의 아들 윤규로(尹奎魯) 등 3형제의 아들들과 조카들이 다산초당에서 다산에게 글을 배움으로써 학자로 성장하게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다산학의 산실’이라고 하면 ‘강진의 다산초당’을 떠올리게 되었다.

윤단의 산정,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아늑하고 조용한 곳으로 풍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가까운 곳에 백련사가 있어 소요하기 편하고, 마을 앞에는 구강포(九江浦)가 있어 뱃놀이와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더구나 이 초당에는 1천여 권이나 되는 많은 책이 마치 다산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쌓여 있었다. 윤단은 다산에게 초당에 살도록 숙식을 제공하며, 수많은 저서를 완성하도록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다산은 초당에 머물면서 주변의 분위기와 풍경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가 전해지고 있는데, 심고 가꾼 꽃들이 피어나자 흥취를 이기지 못해 꽃노래를 읊은 것이다.


다산


다산초당은 아늑한 귤원 서쪽

천 그루 솔밭에 한줄기 시내 있네

골짜기 물 찾아올라 샘솟는 데 가게 되면

석간수 맑은 곳에 그윽한 집 있다네


초당


조그마한 못 하나 초당의 얼굴인데

그 가운데 세 봉우리 석가산이 솟았구나

온갖 꽃 사시장철 퇴 밑에 둘러 피니

물 가운데 얼룩얼룩 자고무늬 수놓았네

다산은 초당에서 지내면서 무너진 축대를 쌓는 등 초당의 구석구석을 고쳤다. 주변에는 나무도 심고 꽃도 가꾸었다. 초당의 동쪽 뜰아래 크고 작은 널찍한 돌을 운반해다 차상으로 쓸 다조를 놓고, 못을 파서 연지(蓮池)를 만들어 그 속에 잉어를 키웠으며, 연지 한가운데 괴석으로 석가산을 쌓았다. 연못 주위에는 여러 가지 꽃나무를 심었으며 초당 옆 바위에서 샘솟는 샘물 약천(藥泉)을 보수했다.

차생활을 하기에 적당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산초당 주변을 제자들과 함께를 가꾸고 이를 ‘다산사경(茶山四景)’이라 이름 하였다. 다조, 약천, 정석, 연지석가산을 일컬은 것인데, 일경(一景)마다 시문을 붙이고 시문 속에는 위치나 형상도 세세히 기록해 두었다.


다조(茶竈) : 차를 끓여 마시던 부뚜막


푸른 돌 평평히 갈고 닦아 붉은 글자 새겼으니

차 달이는 조그만 부뚜막이 초당 앞에 있구나

반쯤 다문 고기 목구멍 같은 아궁이에 불길이 깊이

들어가고

짐승의 두 귀 같은 굴뚝에서는 가는 연기 피어나네

솔방울 주어서 새로이 숯으로 삼아

매화꽃 걷어 내고 샘물 떠다 더 붓네

차 많이 마셔 정기에 침해됨은 끝내 농담이니

앞으로는 단로를 만들어 신선되는 길 배워야겠네

*茶竈在池亭之前(다조는 못가에 있는 정자 앞에 있다.)

약천(藥泉) : 약물이 나오는 샘


옹달샘엔 진흙이 없어 모래만 떠냈으니

한 바가지 떠 마시면 찬하보다 상쾌하다오

처음에는 돌 틈의 승장혈(물구멍)을 찾았는데

도리어 산중에서 약 달이는 사람이 되었네

길을 덮은 버들잎은 비스듬히 물에 떠 있고

이마에 닿는 작은 복숭아 거꾸로 꽃을 달고 폈네

담을 삭이고 묵은 병 낫게 하는 약효는 기록할 만하고

틈내어 차 끓이니 이 아니 즐거운가

*藥泉在池亭西北隅 始唯沮蘿 余鑿之淸泉自石中迸出(약천은 못가에 있는 정자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다. 처음에는 물이 촉촉이 젖어 있었던 것을 내가 직접 파니 맑은 물이 돌 틈에서 솟아 나왔다.)

정석(丁石) : 바위에 새겨 놓은 다산 친필


죽각 서편 바위는 병풍져 있고

부용성 꽃주인은 벌써 정씨(丁氏)에게 돌아왔네


학이 날아와 그림자 지듯 이끼무늬 푸르고

기러기 발톱 흔적처럼 글자는 이끼 속에 또렷하다


미로처럼 바위를 경매하니 외물을 천시한 증거요

도잠처럼 바위에 취했으니 제 몸 잊은 것을 알리라


부암과 우혈도 흔적조차 없어졌는데

무엇하러 구구하게 또 명을 새기리요

* 茶山之西 石屛蒼然 刻丁石二字 其不名 何名之 天湮雖不名 猶轟名之 旣湮難名 能獨秀乎 名與不名无與也 (다산의 서쪽에 돌 병풍이 창연하여 정석 두 글자를 새겼다. 그렇게 이름 하지 않았으면 무엇이라 불렀을까? 비록 하늘이 가리어 이름을 알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이름이 날 곳이다. 이미 가리어져 이름 알기 어려워도 능히 홀로 빼어날 수 있다 하겠다. 이름이 주어지되 제대로 된 이름이 아니면 이름 없는 것과 같다.)

연지석가산(蓮池石仮山) :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


바닷가의 괴석 모아 산을 만드니

진짜 산보다 만든 산이 더 멋있구나

가파르고 묘하게 앉힌 삼층탑 산

오목한 곳 모양 소나무 하나 심었네

뒤얽힌 묘한 모양은 봉황의 춤 같고

뾰족한 곳 얼룩무늬 죽순이 치솟은 듯

오줌 줄기 산 샘물을 끌어다 빙 둘러 만든 연못

물밑 고요히 바라보니 푸른 산 빛이 어렸구나

* 余始至茶山之明年 與文擧 步自池亭 至新婦埭 轉至䲐魚磯 從者 六七人 潮水之所齧 多恢譎奇詭之石 人拾數十枚 船載而歸 遂作石仮山 (내가 다산에 와서 처음으로 살게 된 다음 해에 문거(다산초당의 주인인 윤단의 아들 윤규로)와 함께 정자에서 출발하여 신부둑까지 갔고, 되돌아와서 농어낚시터에도 갔었으며 데리고 다니던 사람이 6-7명이었다. 조수가 닿는 바닷가에는 넓고 신기하게 생긴 돌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의 모습을 닮은 돌 수십 개를 배에 싣고 돌아와서 연지석가산을 만들었다.)


이러한 다산의 네 가지 경치 외에도 다산이 산골에서 솟는 옹달샘 물을 끌어다 만든 비류폭포가 있다. 이 폭포의 물이 연못으로 떨어지도록 하고서는 이 풍경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산골에 찬 물소리

대(竹)밭을 흔드는데

봄볕은 뜰아래

한 떨기 매화 가지에 스며드네

아름다운 풍악소리

그 중에 있건만

아쉽다 이 정(情)을

누구에게 말할 곳 없어

몇 번이나 앉았다 다시 일어나

이 뜰을 거니는고

이처럼 다산이 다산으로 옮긴 뒤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고 정비하는 일 외에도 동쪽과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글을 지었는데, 동암은 다산이 거처했던 곳으로 ‘송풍루’라 이름하기도 하였다. 모두 16편으로 된 송풍루잡시(松風樓雜詩) 중에는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여 차 달이기를 게을리 하여 화로에 먼지가 끼었다고 적고 있다.


일없이 산 속에 살며 일 없으나 청빈하지는 않아

외물에 얽매임 끊어 이 몸 하나 뿐이라네

타향은 내 땅이 아니라는 말 믿기지 않고

평지를 거닐면서 신선처럼 군다네

약절구는 자주 찧어 이끼 끼는 번거로움 없는데

차 달이는 일 드물어 화로에 먼지 끼었지

법희를 아내 삼으니 참으로 즐거울 수 있다는데

부처님 말씀 다 허망하니 이 말은 진실일러라


3) 혜장선사와의 교유

다산은 1801년 겨울 강진에 유배되어 강진읍 동문 밖 주막에 머물러 지내면서 궁핍한 생활을 하던 중 1805년 백련사의 아암 혜장선사(兒庵 惠藏禪師)를 만난다. 혜장스님은 원래 해남의 대둔사에 있었으나, 을축년(1805년) 봄에 강진의 백련사에 옮겨와 있었다.

혜장은 나이 30세에 두륜회의 주맹이 되었다. 이는 해남 대둔사가 있는 두륜산을 따서 붙인 이름인데, 쟁쟁한 학승들이 모이는 일종의 학술대회였다. 이 모임은 100여 명이 넘는 학승들이 모였는데, 이로써 혜장의 학문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은 44세, 혜장스님은 34세로 혜장이 10년 아래였다. 혜장은 연담선사로부터 다산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노라고 말했다. 혜장은 승려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역을 깊이 공부하였다. 주역을 공부한 이래 자신만큼 주역에 능통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혜장은 자신의 학문에 대하여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밤이 늦도록 다산과 주역에 대하여 논하던 혜장은 “산승(山僧)이 20년 동안 주역을 배웠지만 모두가 헛된 거품이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요, 술단지 안의 초파리 격이니 스스로 지혜롭다고 할 수 없는 일이군요” 라고 처량하게 탄식하였다.

이날 이후 두 사람은 의기가 상통하였다. 이때부터 혜장스님은 다산으로부터 역학을 더욱 깊이 있게 공부하게 되었고, 그 해 겨울 다산은 혜장스님의 도움으로 강진읍 북산 우두봉 기슭에 있는 고성암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가 거처하는 방을 ‘보은산방(寶恩山房)’이라 이름하였다. 혜장은 산방을 자주 넘어오고 다산도 백련사를 자주 찾아간다. 다산이 남긴 시에 그 정경이 잘 나타나 있다.



춘일유백련사(春日遊白蓮寺)


조각구름 흘러가며 흐린 하늘 개이고

냉이밭에 흰나비 펄럭이며 날 때

우연케도 집 뒷산 나무꾼 길 따라서

숲을 헤쳐 나가보니 보리밭 언덕이네

궁벽한 산촌 봄날 아는 노인 왔다면서

벗 없던 거친 동네 각승(覺僧)은 어질었다

더구나 도연명(陶淵明) 찾은 듯 보아주어서

나에게 산경표(山經表) 한두 권을 설명해 주네


다산은 보은산방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틈틈이 다도(茶道)를 즐겼다. 혜장도 그곳에 자주 와서 서로 차(茶)와 시(詩) 나누었다. 다산은 혜장선사를 위하여 13수(首)나 되는 시를 남겼으며, 차를 요청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혜장선사에게 차를 빌다


전해 듣건대 석름봉 위에

좋은 차나무들이 있다고 들었소

지금은 보리 거둘 시기이니

한 잎 두 잎 새 싹이 자란다오


오래도록 방안에 갇혀 지내니

냄새에 젖어 뜻조차 식었소

더군다나 어린 돼지와 영계 죽은

먹고 싶은 마음조차 사치스럽소


힘줄이 당기고 배가 아프니

때때로 술을 마셔 깨지 않기 때문이라오

바라오니 스님의 숲에 있는 차를

육우(陸羽)의 솥에 좀 채워 주시구려


베풀어주시면 내 병 물리치려니

쌓아 놓고 먹을 욕심은 없소

차 잎을 볶고 버무리기를 예대로 하면

색깔 곱게 우러날 것이외다

외로운 유배생활 중에 만난 아암과는 주역을 논하고 차생활을 즐기는 지기로서 정분이 두터웠다. 교유관계가 시작되었던 해 겨울에 혜장스님에게 차를 청하는 「寄贈惠藏上人乞茗疏」를 보낸 것만 보아도 다산이 얼마나 차를 즐겨 마셨는가를 알 수 있다.


나는 요즘 차를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차가운데 묘한 법은

보내 주신 육우 다경 3편이 통달케 하였으니

병든 큰 누에(다산)는 마침내

노동(盧仝)의 칠완다(七碗茶)를 마시게 하였소

정기가 쇠퇴했다 하나 기모경의 말은 잊을 수 없어

막힌 것을 삭이고 헌 데를 낫게 하니

이찬황(李贊皇)의 차 마시는 습관을 얻었소

아아, 윤택할진저

아침에 달이는 차는 흰구름이 맑은 하늘에 떠있는 듯 하고

낮잠에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물 위에 잔잔히 부서지는 듯 하오

다연에 차 갈 때면 잔구슬처럼 휘날리는 옥가루들

산골의 등잔불로서는 좋은 것 가리기 아득해도

자순차의 향내 그윽하고

불 일어 새 샘물 길어다 들에서 달이는 차의 맛은

신령께 바치는 백포의 맛과 같소

꽃청자 홍옥다완을 쓰던 노공의 호사스러움 따를 길 없고

돌솥 푸른 연기의 검소함은 한비자(韓非子)에 미치지 못하나

물 끓이는 흥취를 게 눈, 고기 눈에 비기던

옛 선비들의 취미만 부질없이 즐기는 사이

용단봉병 등 왕실에서 보내주신 진귀한 차는 바닥이 났오

이에 나물 캐기와 땔감을 채취할 수 없게 마음이 병드니

부끄러움 무릅쓰고 차 보내주시는 정다움 비는 바이소

듣건대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몰래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말고 베풀어 주소서


이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산은 이미 꽃청자 홍옥다완을 쓰던 당의 시인 노동과 그의 칠완다기를 알고 있었고, 또한 당의 재상을 지낸 한림학사 이찬황의 차 마시는 버릇에도 익숙해 있었다. 육우 다경 3편을 심독했으며, 제실어용(帝室御用)의 차였던 용단봉병을 거론하는 등 차에 대한 역사와 상식에 해박하였다.

또한 막힌 데를 삭이고 헌 데를 다 낫게 한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차의 약리적 효능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당나라의 재상인 이덕유의 다벽에 비유한 것으로 보아, 막힌 데를 삭힌다 함은 신체적 병을 낫게 한다는 것보다는 정신적 편안함을 지닐 수 있게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다산은 평소의 지론으로 ‘세상 사람의 속된 병은 삶과 함께 생겨나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의 병이 신체의 병이 됨을 의미하고 있다.

다산이 차를 많이 마셨기 때문일까? 차의 효험 때문일까? 다산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도, “내가 벼슬을 할 때 지은 시는 처량하고 기운이 막혀 있었으며, 장기에 유배되었을 때는 더욱 어둡고 비통했는데, 강진에 온 이후의 작품은 탁 트이고 막힘이 없는 뜻을 담은 것이 많아졌고 기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 뒤로는 근심이 거의 없어졌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강진에 온 이후로 근심이 없어졌다는 내용인데, 이는 크게 통하였다는 뜻이다. 다산의 시에서도 차를 마시면 적병(積病)이 없어지고 근심이 사라져 편안하다는 글들을 썼다. 이는 그가 중요시하는 다도의 실용적 가치라 하겠다.


4) 초의선사와의 교유

혜장스님의 동승이었던 초의는 혜장의 소개로 다산과 교유하게 된다. 유난히 까다롭고 제자 고르기에 엄격한 혜장이 소개하는 사람이었던 초의는 다산에게 장시 한 수를 보내고 가르침을 바랐으며, 그것이 초의집(草衣集) 상권의 첫 장 세 번째 시에 적혀 있다.

초의는 이 시에서 “이제까지 현인 군자를 두로 찾아보았지만 모두 비린내 풍기는 어물전에 불과했다.”고 술회하고, “하늘이 나를 맹자 어머니 곁에 있게 한다.”고 다산을 만난 반가움을 표시하면서, “덕업이 나라 안에 으뜸가고 문장이 빛나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라 했다.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암, 아암을 잃은 다산은 초의에게 정을 쏟았다. 다산은 초의에게 유서(儒書)를 읽게 했고 강학으로 유학을 가르쳤다. 스승과 제자 같은 사이였지만, 두 사람의 돈독한 교분은 초의선사의 시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비에 갇혀 다산초당에 가지 못함


내가 자하동을 좋아하는 것은

거기 화초와 함께 어르신(다산)이 계신 때문인데

마침 장마철이 되어서 가지 못하도다

행장을 꾸려 놓은 지 스무 날이 지났고

어르신께서 간곡히 불러 주셨는데

이 지경이니 뭐라 변명할 것인가

한밤에 별과 달이 사뭇 빛나고

머물던 먹구름이 새벽 되자 흩어지네

너무나 기뻐 지팡이 짚고 일어나 보니

물색들 정녕 신선하구나

장삼자락 걷어잡고 시냇물 건너고

머리 숙여 대나무 숲도 뚫고 지났다

가까스로 만폭교에 다다르니

하늘색 갑자기 찌푸려지는데

골짜기 바람에 나무는 휘청이고

그 기운 벼랑 깊이까지 미치는구나

바람 불고 물방울 수면을 튀어 솟구친다

그만 중도에서 돌아오고 말았으니

서글픈 심사 토로하기 어렵구나

열흘이 지나도록 이 지경이니

슬프다 칠 척의 이 한 몸뚱이여

가벼이 날고자 해도 방법이 없네


아암이 세상을 뜬 이듬해인 임신년(1812년) 다산은 제자 윤동(본명 종심)과 초의를 데리고 백운동으로 나들이를 갔다. 울적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다산이 각별히 사랑했던 윤동은 다산초당의 본래 주인인 윤단 처사의 둘째 아들 규하의 장남으로, 다산의 18제자 중의 한 사람인데 초의보다 8세나 손 아래였다.

다산이 모처럼의 나들이에 두 사람을 데리고 나선 것은, 초의와 윤동이 더 가까이 사귀게 되기를 원해서였다. 윤동은 사실 유학보다는 불법에 더욱 마음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삭발만 안 했을 뿐이지 마음은 불가에 가까이 가 있었다. 셋은 백운동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후부터 초의와 윤동은 자주 어울렸으며, 윤동이 글씨를 쓰고 초의는 그림을 그렸다.

다산은 유배가 풀린 후 고향에 돌아와 자신을 방문한 초의선사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조선 후기 쇠퇴해 가는 차문화의 맥은 다산에서 혜장과 초의로 이어진 것이다.


축 늘어진 남루한 옷에

풀어 헤쳐진 민둥머리라네

그대는 장삼을 벗어버리면

유생(儒生)의 본모습 나타나네

옛 거울 이미 마멸되었으나

무디지 않다네

밝음을 보고 깊이 깨달았으니

제자된 지 두 달만에 깨닫던 그대…



3. 유배 후의 차생활


1) 다산에서 맺은 다신계(茶信契)

다산은 강진과의 인연을 잊지 못해 18명의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를 조직하였다. 다신계는 그 동안 공부하며 호형호제하고 지냈던 제자들이 신의와 도리를 잊지 않고 서로 만날 것을 다짐하며 조직한 우리 나라 최초의 다회(茶會)이다. 이 모임의 규약 내용은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이라 하여, 현재까지 귤동 윤씨가에 소장되어 있다.

다신계 절목의 약조(約條), 즉 계칙은 전문 8조로 되어 있는데, 다산의 지시를 성문화한 것이다. 다산은 이 계칙에 이미 고향에서 노후를 보내면서 차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두 규정해 두었다. 기후나 토양상 경기도에서는 차가 자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계칙에 준거하여 다산의 제자들은 매년 청명 한식일이면 모여서 제다도 하고, 운을 내어 시를 짓는 일이 연례행사였다. 이 차회 활동은 1818년 다산이 떠난 후부터 1836년 다산이 영면하실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다신계의 전통은 귤동마을의 해남 윤씨가를 중심으로 상당기간 동안 계속 되었다.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신의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모여 살면서 서로 즐거워하다가 흩어진 다음에 서로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들 수십 명이 무진년(1808) 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여 지내면서 글공부를 하여 형제나 다름이 없으니, 이제 스승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우리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만약 막연하게 흩어져 신의와 도리를 배운 까닭을 생각지 않는다면 경박한 짓이 아니겠는가?

지난 봄에 우리들은 이 일을 미리 짐작하고 돈을 모아 계(契)를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한 사람마다 돈 1냥씩을 출자하여 2년 동안 이식(利息)을 치렀더니 이제 35냥이 되었다.

이미 흩어진 후에 돈을 출납하자면 쉽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선생께서 보암 서촌에 있는 박전(薄田) 몇 구를 떠날 무렵에 팔려고 해도 대부분 팔리지 않았다.

이에 우리들은 35냥을 행장 속에 넣어 드리고, 선생의 서촌 전답 몇 구를 그대로 계 자산으로 하고 다신계라 불러 후일 강신(講信)의 자산으로 삼았으니, 그의 조례와 토지 결부권을 아래에 자세히 적는다.


․보암에 있는 논은 이덕운이 관리하고, 백도에 있는 논은 이문백이 관리하여, 매년 추수되는 곡식은 봄에 돈으로 만든다.

․매년 청명 한식일에 계원들은 다산에 모여 계사를 치르고, 출제된 운(韻)에 따라 연명으로 지은 시를 편지를 만들어 유산(다산의 아들)에게 보내라. 이렇듯 모이는 날에 생선값 1냥은 계전(契錢)에서 지불하고, 양식할 쌀 1되는 각자 가져온다.

․곡우에 엽차를 따서 덖어 1근을 만들고, 입하에 늦차를 따서 떡차 2근을 만든다. 이 엽차 1근과 떡차 2근을 시와 편지와 함께 부친다.

․국화꽃 필 때 계원들은 다산에 모여 계사를 치르고 운자를 놓고 시를 짓되, 연명으로 서장을 만들어 유산에게 보내라. 이렇듯 모이는 날에 생선값 1냥은 계전(契錢)에서 지불하고, 양식할 쌀 1되는 각자 가져온다.

․상강날 햇무명 한 필을 사되, 그 굵기와 가늘기는 살펴서, 그 해의 곡식이 많으면 가는 피륙을 사고, 곡식이 적으면 굵은 피륙을 사라. 백로에 딴 비자(榧子) 5되와 무명을 함께 유산에게 보낸다. 비자는 윤종문과 윤종영 두 사람이 해마다 올릴 것이며, 이 두 사람에게는 차와 부역을 면제시켜 준다.

․차따기의 부역은 사람마다 수효를 갈라서 스스로 갖추되, 스스로 갖추지 못하는 사람은 돈 5푼을 신동에게 주어 귤동마을 어린이들을 고용하여 차따기의 수효를 채우게 한다.

․동암(東菴) 지붕을 잇는 이엉값 한 냥은 입동날 곗돈에서 지불케 하라. 귤동의 계원 여섯 사람으로 하여금 이엉 엮기를 감독하여 반드시 동지(冬至) 전에 새로 덮는다. 만일 동지가 지나면 이듬해 봄의 차 부역은 6인이 전담하게 하며, 다른 계원은 이를 거들지 않는다.

․이상의 여러 부역 비용 지불한 후에도 만약에 남는 돈이 있거든 착실한 계원으로 하여금 이자를 증식하도록 하되, 한 사람에 2냥을 넘지 못하며, 15냥이 차거나 혹 20냥이 되면 곧 논을 사서 곗돈에 붙이고 그 돈의 이자 증식은 20냥을 넘지 못한다.


다산은 여러 사람이 다신계의 일에 호응하여 같은 마음으로 일을 돌보도록 하고, 다시 남은 부탁을 덧붙인다.


․입하날 뒤에 잎차와 떡차를 읍내에 들여보내면, 읍내에서는 인편을 찾아 유산에게 부친다.

․상강날 뒤에 무명과 비자를 읍내에 들여보내면 읍내에서는 인편을 찾아 유산에게 부친다.

․다신계 전답에 만일 부속(負束)의 착오가 있어서 수습하기가 어려우면, 계원이 읍내에 들어가서 알리면 읍내에서 주선하여 보살핀다.

․수룡과 철경도 방외의 연고자이다. 그들의 전등계 전답에 만일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읍내에 들어가서 알리면 읍내에서 주선하여 보살핀다.

․다신계 전답의 세곡에 대하여는 매년 겨울에 계원들이 읍내 사람들과 함께 상의 선처하여 묵혀서 거칠어지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이 문안은 1818년 8월 그믐날 의논한 내용과 18제자들의 이름, 계칙, 읍성 제자 명단과 강진으로 귀양한 뒤의 약사를 적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한 사람이 아닌 듯하다. 전반은 제자 중의 누군가가 썼고, 후반은 다산 자신이 써서 합찬한 것으로 보인다.

계원으로서 18제자들의 이름은 여유당전서의 서간문 중에도 많이 나타나는데, 기록 순서는 나이로써 하지 않고 각기 형제끼리 쌍으로 적어 놓았다.


이유회(李維會), 이강회(李綱會), 정학가(丁學稼), 정학포(丁學圃), 윤종문(尹鍾文), 윤종영(尹鍾英), 정수칠(丁修七), 이기록(李基祿), 윤종기(尹鍾箕), 윤종벽(尹鍾璧), 윤자동(尹玆東), 윤아동(尹我東), 윤종심(尹鍾心), 윤종두(尹鍾斗), 이택규(李宅逵), 이덕운(李德芸), 윤종삼(尹鍾參), 윤종진(尹鍾軫).


읍성제생좌목으로부터 시작되는 후반부는 다산의 친필로써 다산이 강진에 처음 왔을 때, 주민들이 두려워하여 문을 찢고 담을 허물며 편안하게 접촉하는 것을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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