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2]茶山의 초기(仕宦期) 산문에 대하여
[논문2]茶山의 초기(仕宦期) 산문에 대하여
  • 강진신문
  • 승인 2004.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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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영<연세대학교 교수. 한국한문학>

1. 다산 작가론과 초기(사환기) 산문

주지하다시피 정약용의 문장에 대한 견해는 매우 경직된 외피를 지니고 있다. 唐宋古文의 권위조차 부정하는 <五學論3>의 주장은 일견 문장 무용론에 가깝다. 문장이 긍정될 때에도 앞의 인용에서 보듯이 ‘文以載道’의 구도를 견고하게 유지한다. 당대에 유행한 명말청초의 소품문이나 소설체 등에 대한 배격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간의 연구는 정약용의 문학론의 성격은 ‘문이 도에 봉사하는’ 기본 사유 틀을 유지하면서, ‘도’의 실질적인 내용이 달라진 것이라고 정리한다. 물론 이때의 달라진 ‘도’의 내용도 “인간의 사회적 실천윤리의 가장 올바른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진지한 것임에는 변화가 없다. 문장론에 관한 한 정약용의 문학에선 가볍고 사소한 일상의 감각을 다루는 서정 산문이나 섬세하고 기발한 미의식, 문예미의 추구 같은 것은 들어설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의 실제 문장들은 대부분 모두 실용과 경세의 문장들이다. 학문적 관심과 현실적인 목적의식을 위주로 하는 무거운 글들이 정약용 산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자신의 문장론에 매우 충실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예문의 성격을 가미한 경우라도 고문의 법식에 충실한 글쓰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정약용 산문의 특징이라면 문학론에 대한 연구에서 지적되었듯이, 그 내용적 특성 - 즉 ‘도’의 내용이 달라진 것이지, 문장에 대한 이해 자체에 있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정약용의 산문은 각 분야의 연구 자료로는 대단히 유명해진 글들이 많지만, 문학 분야에서의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산문에 대한 연구가 일천한 까닭도 있지만, 그만큼 내용상의 가치가 문예적 가치를 압도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정약용 초기(사환기) 작품들 중에서 발견되는 경쾌한 단형의 산문들이다. 정약용의 산문 전체를 놓고 보자면 이런 계열의 작품들은 예외적이라 할 만큼 소수이고, 초기 사환기에 치우쳐 존재한다. 이 산문들의 ‘가벼운’ 특징은 ‘문이재도’를 표방하며 엄숙하고 진지한 정약용 산문 전체의 성격과 어긋나는 것이기도 하다. 본고는 바로 이런 점에서 이 산문들을 정리할 필요를 발견한다. 특정시기에 존재하는, 작가 자신의 문학론과 배치되는 성향의 작품들의 존재란 작가로서의 정약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2. 두 편의 그림자 이야기 : <菊影詩序>과 <漆室觀畵說>

이 시기 정약용의 산문들 중에는 그림자를 소재로 한 글이 두 편 있다. 촛불에 비친 국화 그림자를 소재로 한 <국영시서>와 초보적인 사진기의 원리를 다룬 <칠실관화설>이다. 이 두 편의 글은 그림자라는 독특한 소재를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제재를 다루는 방식에서의 미묘한 차이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 이 시기 정약용의 산문의 특징을 전체적으로 설명할 만한 단서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이 두 편의 산문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1)
<국영시서>는 죽란서옥 시절인 1794년 무렵의 작품이다. 촛불에 비친 국화 그림자를 감상하는 시회가 그의 집에서 베풀어졌는데, <南皐尹參議墓誌銘>을 통해 이 모임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옛날 선왕 甲寅年(정조 18, 1794) 9월 중순 南皐 尹公이 벗 5~6인을 데리고 백운대 꼭대기에 올라 마음껏 읊조리고 노래하되 곁에 마치 아무도 없는 듯하였다. 若鏞도 참여했었다. 돌아와서는 竹欄書屋에서 菊影의 촛불을 베푸니, 모인 사람이 8~9인이었는데 南皐가 좌장이었다. 술에 취하자 각각 시 수십 편을 짓되 성조가 격렬하기만 추구하였을 뿐 다른 것은 생각지 않았다. 先仲氏ㆍ한혜보ㆍ채이숙ㆍ윤무구 등이었다. 공을 추대하여 詞伯으로 삼았는데, 시 한 편을 지을 적마다 공이 흐드러진 목소리로 낭랑히 읊어 굽이쳐 맑게 넘어가니 온 좌석이 고요하게 말없이 공의 소리만 들을 뿐이었다.

<국영시서>은 이 시회에 붙여진 詩序 혹은 宴序다.

(Ⅰ) 국화가 여러 꽃 중에서 특히 뛰어난 것이 네 가지 있다. 늦게 피는 것이 하나이고, 오래도록 견디는 것이 하나이고, 향기로운 것이 하나이고, 고우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면서도 싸늘하지 않은 것이 하나이다. 세상에서 국화를 사랑하기로 이름나서 국화의 취미를 안다고 자부하는 자도 사랑하는 것이 이 네 가지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이 네 가지 외에 또 특별히 촛불 앞의 국화 그림자를 취하였다. 밤마다 그것을 위하여 담장 벽을 쓸고 등잔불을 켜고 쓸쓸히 그 가운데 앉아서 홀로 즐겼다.
(Ⅱ) 하루는 남고 윤이서에게 들러 “오늘 저녁에 그대가 나에게 와서 자면서 나와 함께 국화를 구경하세.”하였다. 윤이서는 “국화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어찌 밤에 구경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몸이 아프다 핑계하고 사양하였다. 내가 “구경만 한번 해 보게.”하고 굳이 청하여 함께 돌아왔다.(1)
저녁이 되어, 동자를 시켜 일부러 촛불을 국화 한 송이에 바싹 갖다 대게하고는, 남고를 인도하여 보이면서, “기이하지 않은가?”하였다. 남고가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자네의 말이 이상하군. 나는 이것이 기이한 줄을 모르겠네.”하였다. 그래서 나도 “그렇지.”라고 하였다.(2)
한참 뒤에 다시 동자를 시켜 법식대로 하였다. 이에 옷걸이ㆍ책상 등 모든 산만하고 들쭉날쭉한 물건을 제거하고, 국화의 위치를 정돈하여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한 다음, 촛불이 비추기 적당한 곳에 촛불을 두어서 밝히게 하였다.(3-①) 그랬더니 기이한 무늬, 이상한 형태가 홀연히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에 가까운 것은, 꽃과 잎이 서로 어울리고, 가지와 곁가지가 정연하여, 마치 묵화를 펼쳐놓은 것과 같고, 그 다음의 것은, 너울너울하고 어른어른하며, 춤을 추듯이 하늘거려서, 마치 달이 동녘에서 떠오를 제 뜨락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걸리는 것과 같았다. 그 중 멀리 있는 것은, 산만하고 흐릿하여, 마치 가늘고 엷은 구름이나 놀과 같고, 사라져 없어지거나 소용돌이치는 것은, 마치 질펀하게 나뒤치는 파도와 같아, 번쩍번쩍 서로 엇비슷해서, 그것을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3-②)그러자 이서(?敍)가 큰 소리를 지르며 뛸 듯이 기뻐하면서 손으로 무릎을 치며 감탄하기를, “기이하구나! 이상하구나! 천하의 절승이로다!”하였다. 흥분이 가라앉자 술을 내오게 하고, 술이 취하자 서로 시를 읊으며 즐겼다. (3-③)
(Ⅲ) 그때 주신ㆍ해보ㆍ무구도 같이 모였다.

이 시서의 독특한 점은 일차적으로 제재의 기발함 자체에 있다. (Ⅰ)에서 제시되는 국화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 네 가지는 국화의 생태적 특징이지만, 십중팔구 관념적 의론으로 전개될만한 소재이다. 국화를 관념적인 해석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익숙한 문화적 관습인 것이다. 화훼를 가꾸고 완상하는 취향이 범람하였던 당대의 문화적 분위기라면, 관념적으로 해석된 국화가 아니라 국화의 즉물적 아름다움이 충분히 완상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발견한 것은 ‘촛불에 비친 국화 그림자의 아름다움’이다. 국화꽃의 향기나 모양이 아니라 촛불에 비친 그림자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의외적이고 ‘기발’한 발상이다. 이처럼 국화에서 하필 그림자를 발견하는 기발한 발상은 관념적인 의미를 통해 대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대상으로 그 흥취를 향유하겠다는 태도로 연결된다.
남고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설득하기 힘든 이 기발한 흥취를 설득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독특한 글쓰기 전략이 채택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序’라면 글 혹은 시의  배경이나 의도, 혹은 시론 등을 진술하는 글이다. 이 글처럼 여럿이 모여 가진 모임과 그 모임에서 지어진 시를 두고 짓는 서라면 모임의 취지와 참가자들을 기록할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 방식으론 진술이나 의론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글은 주된 글쓰기 방식으로 서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 글에서 서술자의 개입은 최소로 자제되고 대신 대사에 해당하는 직접발화와 묘사로 구성된다. 서술자인 ‘나’는  인물로 서사적 장면 내에 편입된다.


이 글의 중심부인 (Ⅱ)는 1-2-3으로 진행되면서, 발단-전개-절정ㆍ결말의 서사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즉 (1)에서는 ‘국화 그림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가 제시되면서, 작품 내 서술자인 나와 주인공인 남고 간의 갈등이 발단으로 제시된다. 시간의 진행 축을 따라 서사적 장면이 진행되지만, (2)는 전개이면서 일종의 서사적 지연의 역할을 한다. 인물 간의 갈등이 고조되지만, 국화 그림자 감상에 시큰둥한 남고 측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절정이 지연된다. (2)에서의 이러한 지연은 (3)에서 순식간에 반전되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2)에서의 지연은 (3)의 절정의 느낌을 고조시키기 위한 응축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고문장 작법으로 바꿔 이야기한다면 억양과 파란의 방식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응축은 한 (3)의 ②에서 한 번 더 이루어진다. 국화 그림자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부분은 이미 절정부에 도입해 있으면서 절정의 직전에서 절정을 한 번 더 지연시킨다. 그리고는 ③에 와서 “奇哉 異哉 天下之絶勝也”라는 격렬한 감탄으로 폭발적인 절정인 동시에 결말을 맞이한다. 즉 이 글은 남고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시간의 경과에 따라 벌어지는 내면적 변화를 서사적 장면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매우 응축성이 강한 역동적인 장면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내세워지는 것은 서사적 경과 자체가 아니다. 응축성이 강한 글쓰기 방식을 통해 전경화되는 것은 절정 부분의 ‘흥분’ 그 자체이다. 즉 서사성이 강한 장면 제시적 방식을 채택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서정적 흥분이다.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3)의 ② 부분에 쓰이는 배비구와 대우구의 사용이다. 이 부분은 국화 그림자에 대한 섬세한 묘사로, 다른 부분과는 달리 유려한 율동감을 보이는 句法을 구사하고 있다.

於是 奇紋異形 ?焉滿壁 / 其近者 花葉交加 枝條森整 若墨畵之張焉 / 其次 婆娑彷彿 舞弄纖?  若月出東嶺 而庭柯之在西墻也 / 其遠者 漫?模糊 如雲霞之細薄 滅沒瀅? 若波濤之?? / 閃忽疑似 莫可名狀

이 부분은 ‘其□者 □□□□ 若□□□□□’의 문형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며 반복한다. 여기에 전체적으로 4자구가 중심이 된 배비구가 구사된다. 이러한 4자구와 동일한 문장 패턴의 반복과 변주는 이 부분에 매우 유려한 율동감을 부여한다. 절정이자 결말에 해당하는 ③에 이르기 전에 배치된 이 부분은 이러한 율동감에 힘입어 서사의 긴장을 잃지 않고 절정을 지연시킨다. 동시에 이 부분의 율동감은 서정적인 색채를 이 부분에 부여한다. 서사 속에 삽입된 이러한 서정적 지속은 서사적 경과의 절정에 있으면서 서사적 시간의 바깥에 존재한다. 한 순간의 깨달음과 환희를 음미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시적인 순간이다.


이 글은 일반적 서의 서술적 방식과는 다른 서사적 밀도와 서정적 밀도를 결합함으로써 절정의 순간을 일종의 미학적 열반의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고, 이런 순간의 흥취가 전경화되고 있다. 즉 소재를 파악하는 시선의 기발함에서 비롯되는 ‘기발한 흥취’를 설득하기 위해 인물의 내면적 변화를 드라마틱한 장면의 제시를 통해 보여주는 서사와 서정적 흥취를 결합하는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2)
역시 그림자를 소재로 하고 있는 <칠실관화설>은 소재를 탐구하는 <국영시서>의 시선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초보적인 사진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글이다. <伏菴李基讓墓誌銘>에는 附見閑話條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은 이 글에서 설명하는 사진기의 초보 원리가 실제로 실험되고 있었던 현장을 보여준다. 

복암이 일찍이 돌아가신 중씨 댁에서 캄캄한 방에 문구멍을 뚫어 유리를 붙여 놓고서 거꾸로 비치는 그림자를 취하여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밖에 앉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초상을 그릴 수가 없는데 공은 뜰에 설치한 의자에 해를 향해 앉아 마치 흙으로 만든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오래도록 있었으니, 이 역시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바였다.

이 글은 <국영시서>와 달리 ‘說’의 문체를 채택하고 있다.

(1)집을 산과 호수 사이에 지었더니, 아름다운 물가와 산봉우리가 양편으로 두르며 얼비추고, 대나무와 꽃과 바위가 떨기를 짓고 쌓여있고, 누각과 울타리는 죽 둘러 있다.
(2)맑고 좋은 날을 골라 방을 닫고는, 들창이라든가 창문같이 바깥의 빛을 받아들일 만한 것은 모두 틀어막아서 방안을 칠흑 같게 한다. 오직 구멍 한 개만 남겨놓고 돋보기를 하나 가져다 구멍에 맞추어 놓는다. 그리고는 눈처럼 하얀 종이판을 가져다 돋보기로부터 두어 자 떨어진 곳에 두어(돋보기의 볼록한 정도에 따라 거리는 달라진다.) 비치는 빛을 받는다.


(3)그러면, 아름다운 물가와 산봉우리, 여울과 산봉우리의 아름다움, 떨기를 지어 쌓인 대나무나 꽃과 바위들, 죽 둘린 누각이나 울타리들이 모두 종이 판 위에 와서 떨어진다. 짙은 청색과 옅은 초록은 그 빛깔 그대로요, 성근 가지와 빽빽한 잎사귀는 그 모양 그대로다. 짜임새가 분명하고, 위치도 가지런하여,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니, 실낱이나 터럭처럼 세밀하다. 고개지(顧凱之)ㆍ육탐미(陸探微)라도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니, 대개 천하의 기이한 볼거리이다. 애석한 것은 바람이 부는 나뭇가지는 흔들려서 묘사하기 어렵다는 점이고, 사물의 형상이 거꾸로 비치므로 감상하려면 어지럽다는 점이다.


(4)지금 어떤 사람이 초상화를 그리되 터럭 하나도 다르지 않게 하고 싶다면, 이 방법 말고는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뜰 가운데 진흙으로 빚은 사람마냥 꼼짝도 않고 단정히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묘사하기 어려운 것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說’은 기본적으로 설명문 혹은 의론문이다. 다산의 설은 모두 종두법이나 城制, 돋보기가 불을 일으키는 원리에 대한 건조한 설명문이거나, ‘誠’자의 의미에 대해 자신의 해설을 펼치는 <誠字說>과 같은 의론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說’이라는 문체에 대한 다산의 기본적인 해석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이 건조한 설명문들 사이에서 이채를 띠는 문장이 <漆室觀畵說>이다. <칠실관화설> 역시 기본적으로는 초보적인 사진기의 원리를 해설하는 설명문이다. 그러나 이 글은 다른 설들과 달리 서정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 글이 다른 글들과 달리 서정적인 감흥을 갖는 것은 대상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그것의 발현인 글쓰기의 특징에서 연유한다.


<칠실관화설>의 주지는 두 가지로 갈라진다. 그것은 암실을 만들고 빛을 응집시켜 볼록렌즈를 통해 투과시킴으로서 사물의 형상을 터럭 하나의 오차도 없이 종이 위에 받아낼 수 있다는 사실 - 즉 사진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부분과 그것이 ‘그대로 한 폭의 그림으로, 천하의 기관이다!’라고 감탄하는 미학적 진술이다. 이처럼 이중적인 글의 주지는 대상을 인식하는 작가의 이중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즉 대상을 인식하는 작가의 태도에는 ‘천하의 기관’으로 대상을 향유하는 미학적 태도와 과학자적 관찰의 시선이 혼합되어 있다. 이 글이 서정적 감흥을 갖는 것은 이처럼 과학자적 관찰의 시선이 미학적 향유의 태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이런 이중적 태도는 글쓰기의 특징으로도 실현된다. 일단 이 글이 ‘설’의 문체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진기 원리를 설명하겠다는 설명문적 의도에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 글의 실제 서술은 여타의 설명문(說)이 지닌 ‘건조한 투명성’이라는 문체적 특징과는 사뭇 다른 것을 보여준다.  


이 글은 (1)(3)과 (2)(4)의 문체가 갖는 성격이 다르다. 사진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뼈대에 해당하는 (2)(4)는 대체로 ‘지시적’ 성격의 진술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비해 (1)(3)는 사진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전체 구성의 한 부분이지만, 문체는 확연히 다르다. 사진기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하면 외물의 형상이 정확하게 종이판 위에 맺힌다. 다만 흔들리는 물체는 묘사하기 어렵고 상이 거꾸로 맺히는 점이 한계이다’라고 진술되어야 할 부분이다. 설명의 명징성을 위해서는 이런 서술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 글은 이 부분을 섬세한 문예적 기술들을 동원하여 묘사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즉 대상에 대한 개념적 설명 대신, 색채와 형태를 동원해 대상을 즉물적으로 제시하는 묘사의 방식으로 처리한다.
설명문으로서 (3)이 갖는 비경제성은 (3)부분이 정교한 문예적 장치를 채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2)(4)가 散句로 처리된 것과 달리 (1)(3)은 배비구와 대우구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3)은 전체적으로 다양한 자수의 배비구들을 산구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시적으로 보면 7자구를 중심으로 한 변주인 “洲渚巖巒之麗 與夫竹樹花石之叢疊 樓閣藩籬之??者”로 시작해서, “深靑淺綠如其色 疎柯密葉如其兮에서는 정교한 대우구 겸 7자의 배비구로 바뀌고, 다시 “間架昭森 位置齊整 天成一幅 細如絲髮”의 좀더 호흡이 짧고 여러 번 반복되는4ㆍ4ㆍ4ㆍ4의 배비구를 구사해 율동감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율동감이 가장 고조된 이 부분에 이 글의 文眼에 해당하는 “蓋天下之奇觀也”를 배치하고 있다. 그러다 ‘所嗟’를 두어 문장의 어세를 돌리는 돈좌의 기법을 구사하고, 다시 “風梢活動 描寫崎艱也 物形倒植 覽賞恍忽也”의 9(4ㆍ5)ㆍ9(4ㆍ5)의 배비구로 연결하여 좀더 완만한 율동감을 회복하며 마무리하는 방식을 구사한다. 이러한 율동감은 (3)의 전체적 분위기를 고조시켜 이 부분이 이 글 전체의 절정에 해당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즉 (3)은 돈좌의 수법을 사용하여 문장의 굴절을 의도하고, 배비구와 對偶句를 이용해 율동감을 형성하면서 정서적 고저를 형성하도록 배려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적 고려는 명백히 문예적인 것이고, 이러한 문예적 배려에 의해 마련된 정서적 고저와 율동감이 이 글을 단순한 정보 전달의 기능만을 지니지 않고 정서적 감흥을 지니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율동감의 최고조에 있는 미학적 진술이 자연스럽게 정보 전달적 진술 사이에 위치하도록 마련되는 것이다. 


결국 이 글에서 ‘설’의 문체를 선택하는 것은 과학자적 관찰의 결과를 보고하는 것에서 유래하지만, 문장의 구법에서 율문적 리듬감을 구사하면서 묘사적 진술을 주된 진술 방식으로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미학적 향유대상이기도 한 점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글의 가장 큰 특징은, 작가의 태도와 글쓰기의 방식에서 과학과 미학이 분리되지 않은 채 서정적 감흥 속에 통합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 글의 ‘서정’은  독특한 내용을 지닌 것이 된다. 즉 일종의 ‘과학적 서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점이 앞의 <국영시서>와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인데, 본고의 입장에선 양자가 서로를 보완적으로 설명한다고 보인다.

3)
<국영시서>와 <칠실관화설>의 분석 결과를 종합하면 이렇다. ⑴ 소재가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기상천외한 것이다. ⑵ 제재를 찾아내는 시선은 매우 섬세한 것으로, 기발하지만 과학자적 관찰의 태도와 연결된 것이다. ⑶ 대상을 대하는 태도는 관념적 해석의 태도가 아니라 감각적 향유의 태도다. ⑷ 기존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지만, 기성 문체의 일반적 관습을 일정 정도 변형하는 글쓰기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⑸ 치밀한 문학적 장치를 구사하여 대상을 서정적으로 환기하는 글쓰기 방식을 구사한다. 따라서 서정적 흥취 위주의 글이 된다. ⑹ 당대의 동인적 집단에서 공유되던 생활의 내용과 연관되어 있다.

3. 두 편의 산문과 다산 초기 산문

1)
그림자를 다룬 두 편의 글에 대한 분석의 결과는 대체로 정약용 초기 산문 중에 나타나는 ‘경쾌한 단형의 산문들’전체로 확대할 수 있다. 일단 이 두 편의 글이 보여주는 것은 의미를 추구하는 진지함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의 흥취를 추구하는 매우 가볍고 경쾌한 것이다. ‘文以載道’를 역설하는 엄숙하고 진지한 정약용의 얼굴과는 사뭇 어긋나는 것이다. 초기 사환기의 정약용의 산문들에선 이런 태도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에 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西池에서 연꽃 구경을 위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고, 세모에 盆梅가 피면 한 번 모인다.
모임 때마다 술ㆍ안주ㆍ붓ㆍ벼루 등을 설비하여 술 마시며 시 읊는 데에 이바지한다. 모임은 나이 적은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마련하여 나이 많은 사람에 이르되, 한 차례 돌면 다시 그렇게 한다.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품계가 승진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자제 중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한다.

명례방에 있었던 정약용의 집에서 주로 이루어졌던 竹欄詩社의 詩社帖에 붙여진 서이다. 생활 주변에서 마주치는 인간사와 자연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그 자체로 아취 있는 것으로 향유하는 태도가 두드러지는 내용이다. 짧은 귀향을 기록한 <遊天眞菴記> 같은 작품은 평범한 생활 속의 아취가 아름답게 표현된 글이다.
이처럼 사물에서 특별한 의미를 추구하지 않고 그 자체를 향유하는 태도는 사물에 대한 섬세한 심미안으로 연결된다. 그림자를 즐기는 기발한 향유는 대상을 관념적인 차원으로 이월시키지 않으면서 대상의 특별한 아취를 탐구하는 심미안의 결과이다. 당시 도성 사람들의 명승지였던 세검정에의 유람을 기록한 <遊洗劍亭記>도 그런 심미안을 보여준다.

세검정은 소나기가 한참 쏟아지는 속에서 구경하는 것이 가장 장관이라는, 지극히 심미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빗속에 세검정 유람을 한 기록이 <유세검정기>이다. 일종의 호사가적 탐닉으로도 읽히는 <유세검정기> 역시 <국영시서>와 같은 빠른 호흡으로 정서적 절정을 향해 치닫는 서술방식으로 심미적 흥취를 전경화하고 있다. 그림자라는 기발한 대상을 발견하는 시선은 <張天庸傳>에서는 파격적인 예술가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지인지감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이처럼 섬세한 심미안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매우 예민한 감수성으로 작용해서, 매우 섬세한 내면의 고백으로 타나기도 한다.

남고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을 때에는 신선처럼 까마득하여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다가도, 막상 오시면 모습도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고 말씀도 時用에 맞지 않아 전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가도 남고께서 가시고 나면 신선이 훌쩍 혼자 떠나버린 것 같아, 짝 잃은 학처럼 외로워지고 상갓집 개 마냥 기가 죽습니다. 마음은 쓸쓸해지고 기운이 없어집니다. 아아! 당신 자신도 그 까닭은 모르실 겝니다.

정약용의 사환기 척독들 중에는 이처럼 내면의 섬세한 정감들을 고백하는 글들이 있다. 극히 짧은 편지이지만 문학적 배려도 된 서정적 편지들이다. 앞의 척독의 경우, 사람 사이의 미묘한 그리움과 사모의 감정을 잡아내는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내놓고 있다. ‘상갓집 개(喪家之狗)’라는 속어를 서슴지 않는 그리움의 고백에선 감상적 과잉의 기미조차 느껴진다. 그 자신 다른 편지에서 “아, 우리 두 사람은 燕이나 趙의 悲歌를 부르던 선비들의 처지도 아닌데 그 氣味와 風韻의 어둡고 격렬함이 어찌하여 그처럼 심한 겁니까?”라고 직접적으로 고백하고 있듯이, 이런 편지들에서 깔린 것은 균형 잡힌 정서의 단정함이 아니라 정서적 과잉상태이다. 이런 정서적 과잉상태가 예민한 감수성과 함께 긍정적 대상이 되면서 이런 내면 고백적 글들을 산출한다. 


<국영시서>에 보이는, 장르의 일반적 관습을 위반하는 독특한 글쓰기와 효과적인 배비구의 응용은 다산 초기 산문에서 종종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국영시서>에 보이던 ‘흥취’라는 매우 서정적 주제를 전달하려는 목적을 지닌 문장에서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집약적인 장면화 방식을 사용하는 방식은 <題江陵崔君(秉浩)詩卷>에서도 볼 수 있다.

여름날 한가로이 있는데, 종제 공권(公權)이 시 1권을 부쳐 보내고 또, “이는 강릉 최군의 작품인데, 품평을 바랍니다.”하였다. 내가 남의 시집을 열람한 것이 백을 헤아릴 정도이다. 헐뜯을 것인가?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다. 그렇다면 칭찬을 해야 하는가? 이는 내가 싫다. 그러니 이 물건을 만나면 벌써 쭈글쭈글 주름이 잡히며 눈썹이 곤두선다.

 이에 시권을 천천히 당겨 흘낏 곁눈으로 보았다. 몇 편을 읽고 나자 눈썹이 펴지고 눈이 크게 떠지며, 나도 모르게 목에서 소리가 나오고 손가락이 뛰어, 흔연히 마치 능운부(凌雲賦)를 읽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사람됨을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급히 그가 묵고 있는 곳을 물어 손수 말을 몰아 찾아가서 보았다. 최군은 마침 여러 선비들과 모여 있었다. 모인 자는 모두 우아하고 빼어난 인물들이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만이 떨어진 갓에 해진 베옷을 입고서 거칠고 허술한 차림이었다. 물어 보니 과연 최군이었다. 그와 교제를 맺고 돌아와 그 시권에 이렇게 기록하여 돌려보낸다.

이 글이 선택하고 있는 ‘題’라는 양식은 ‘序’에 비해 형식적 구속이 약한 글이다. 그러나 정약용의 다른 題들이 그렇듯이 일반적으론 고증이나 평론, 해설 등이 위주가 되는 양식이기도 하다. 이 글 역시 서두에 보이듯 ‘품평의 글’이다. 그런데 이 글은 일반적인 ‘품평’- 비평문의 글쓰기 방식을 전혀 엉뚱한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 짤막한 비평의 글에는 시에 대한 비평적 논의는 한 마디도 없다. 대신 자신을 주인공으로, 독서의 진행에 따라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를 안면 근육이나 손가락의 미묘한 움직임과 침 넘어가는 소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제시한다.

 전체를 통해 평가적 단어는 ‘欣欣然’이라는 부사가 한 번 쓰였을 뿐이다. 이런 보여주기 방식을 통해 최병호의 시에 대한 자신의 감동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사마상여의 능운부와 최병호의 허술한 옷차림에 대한 묘사를 연결시켜 놓음으로써 시적 풍격까지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守吾齋記>에서도  부분적으로 운용된다.  
매우 집약적인 절정의 한 순간을 배비구를 사용하여 지연시키며, 운율감의 내용을 통해 대상에 대한 청각적 묘사를 제시하는 것도 그의 산문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수법이다. <유세검정기>나 <遊瑞石山記>, <羽化亭記> 등 주로 遊記에서 경물의 묘사와 함께 서정적 흥취가 최고조로 달한 부분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국영시서>나 <漆室觀畵說>, 척독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다.


배비구를 이용한 율동감의 효과를 절정의 부분에서 묘사와 겸하여 구사하는 방식을 아주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예로 <유세검정기>를 본다. 비올 조짐을 보고 출발해서 재빨리 세검정을 향해 달리는 동안 소나기가 점차 거세지고, 마침내 세검정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거센 소나기가 몰아치는 경과를 묘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 <유세검정기>의 서술이다. 서술의 경과에 따라 글의 정서적 긴장은 급격히 고조되는데, 세찬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 불어난 세검정의 장한 물살을 표현하는 부분이 이 글의 서술상ㆍ정서상의 절정이다. 이 부분은 연속된 4자구가 열 번이나 반복되는 구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리고는 그 끝에서 ‘凜乎 其不能安也’라는 감탄을 터트리며 절정을 이루고 있다.


한편 이 배비구의 자수는 묘사 대상의 성질을 율동감의 내용으로도 표현한다. <국영시서>가 4자구를 기본으로 다양한 변주를 보이는 구법을 사용하여 너울거리는 그림자의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면, 여기선 4자구를 계속 사용함으로써 물살의 급격한 흐름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물론 억양 돈좌의 포치법과 더불어 고문에서 자주 쓰이는 수법이지만, 다산의 초기 산문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즉 정약용 초기 사환기의 ‘경쾌한 단형의 산문들’은 일상의 인간과 사물을 의미를 중심으로 관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흥취를 중심으로 감각적으로 향유하며, 따라서 서정적인 지향이 전경화 된다. 나아가 기발한 흥취 - 낯선 것에의 취향을 보인다. 취택되는 제재는 매우 일상적인 것이지만 흔히 포착되지 않는, 섬세하고 예민한 관찰과 감수성에서만 포착되는 것이다. 글쓰기의 태도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장르의 글쓰기 관습을 부분적으로 위반하며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고, 운율적 효과 등을 통한 문학적 배려를 고수한다. 그리고 대체로 짧고 서정적 운용이 가능한 序, 題, 遊記, 尺牘 등을 중심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정약용 사환기 산문의 한 국면이다.

2)
이상의 관찰 결과는 일견 당대에 유행한 소품문의 특성에 접근한다. <문체책>이나 <爲李仁榮贈言>를 통해 극도로 배척한 ‘시인과 才子의 기이하고 청신한 작품들’로 ‘파리 머리나 모기 속눈썹 같은 자질구레한 언어ㆍ문자’에 접근하는 특성이다.
작가적 감수성이란 일정부분 생활적 토대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글들의 배경에 있는 것은 당대인들이 공유한 삶의 양식이다. 사환기 정약용의 생활방식이나 자의식이 경화 지향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췌언이 필요 없을 것이다. “都城 문에서 몇 십 리만 벗어나도 태고의 원시 사회”이며, 경화는 문명의 장소라는 것이 경화사족으로서 정약용이 갖는 자의식의 기저이다.


당대 서울의 도회적 발달상황과 경화사족층의 문화적 취향이나 생활양식에 대한 연구 역시 상당 정도 축적되어 있다. 여기서는 정약용의 입장에서 간단히 거론하는 것으로 그친다.

<국영시서>는 거칠고 졸렬하여 부끄럽습니다. 좋은 작품이 있다면 마땅히 바꿔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 남고 형제와 주신ㆍ이숙 등이 모두 이미 약속을 하였으니 형도 와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二陵의 여러 어른들이 흉내 내고자 하십니다만, 국화 화분이 대여섯에 불과하니 어찌하겠습니까? 만약 서너 집이 합하여 십여 매가 된다한들, 어찌 우리 집의 국화 그림자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싸늘해진 눈이 더워지지 않습니다.

그려서 보여주신 난초와 국화 한 폭은 그림 내용이 고상하고 정결하여 岐川의 老仙圖에 견주면 燕石과 拱璧의 차이가 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니 점수를 매긴다면 반드시 상등을 차지할 것입니다. 또 골동갱과 침수단으로 한 차례 배를 채우시겠습니다. 五沙께서는 언제나 광통교 위에 걸려있는 되지못한 그림을 사다가 社中을 제압하려 하시니, 이러한 사실을 시험관에게 알려야겠습니다. 껄껄.

첫 번째 편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정약용이 시작한 국화 그림자를 감상하는 모임이 당대 경화사족층에 유행으로 번져가는 현상이다. 호사가적인 기발한 아취를 추구하는 정열이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문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두 번째 편지는 그러한 문화적 정열이 상업 경제와 맞붙어 있음을 보여준다. 즉 광통교 위에서 파는 그림을 사서 몰래 그림 품평에 참여할 만큼, 일정 정도 발달한 도시의 상업문화가 예술품의 대중적(?) 유통까지 성립시키고 있는 시기였음을 말하고 있다. 즉 정약용이 경험한 것은 상업 경제의 발달과 맞물린 문화의 소재지로서의 서울인 것이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누누이 도성의 文華적 안목과 상업적 작물을 재배하는 근교농업을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경험 내용을 증명한다. 그 한가운데 정약용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정약용의 감수성이란 필연적 도시적 - 경화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품문이란 중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일정 정도 발달한 도시 문화를 전제로 자라난 것이다. 그만큼 도시적 서정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경화사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정약용의 문학이, 비록 다른 요인에 의해 견제되더라도, 소품적 경향을 일정정도 지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더구나 당대의 소품적 경향을 선도했던 작가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생활환경을 지니기도 했었던 것이 이 시기인 것이다.  

3)
<苕上烟波釣?之家記>는 ‘浮家泛宅’의 꿈을 서술하는 글이다. 그런데 이 글은 원굉도를 거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원굉도는 말하길, 천금을 주고 배 한 척을 사서 배 안에다 북과 피리 관현악 등 여러 가지 즐길 거리들을 갖추어 놓고 마음 내키는 대로 실컷 노닐다가, 비록 이것 때문에 패가망신한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이런 것은 미치광이나 탕자들이나 할 짓이지, 내 뜻은 아니다.

정조는 ‘?殺奇詭’한 明淸 문장의 대명사로 ?袁中朗集?을 꼽았다. 그만큼 원굉도가 당대 문단의 소품체 유행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다. 정약용의 원굉도 이해 역시 익숙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이용휴의 문학을 ‘奇?新巧하여 원굉도에 뒤지지 않는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문체책>의 정약용이 원굉도를 배척하는 것이야 이상할 것 없지만, 같은 시기에 지어지는 ‘소품적 기미’의 산문들과 원굉도 배척은 어떤 관계일까. 


이 글에서 거론하고 있는 원굉도의 글은 <?惟長先生>이다. 그는 이 글에서 인생의 다섯 가지 즐거움에 대하여 논하며, “천금으로 배를 한 척 사서, 배 안에는 북과 피리 한 부를 설치하고, 기첩 몇 사람과 한가한 몇 사람으로 더불어 泛家浮宅으로 노닐면서 장차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그러다가 “일신이 낭패하여 아침에 저녁거리가 없고 기생집에서 밥을 빌고 고아나 늙은이의 상에서 밥을 나누어 먹게 되어도”, 그러고도 전혀 태연하게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快活’한 일이라고 하였다. 일견 쾌락 지상주의의 패륜아의 발언처럼 들리지만, 원굉도는 극단적 환락을 통해 오히려 세속을 초월하는 경지를 묘사해내고 있다. 그러므로 ‘환락을 궁극에까지 밀고 갔으니, 七發에 비교할 수 있어, 사람의 정신을 상쾌하게 한다.’라는 평가가 내려지는 것이다.


원굉도의 태도가 극단적인 환락을 통해 오히려 일상과 세속의 초극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정약용이 구상하는 부가범택엔 기녀 대신 늙은 아내와 어린 아들이, 풍류악기 대신 부엌살림이 놓인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楊江遇漁者>의 내용을 통해 본다면 사정은 보다 확연해진다. <양강우어자>는 두 아들을 데리고 어로에 열중하고 있는 어부 일가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 시이다. 시의 말미가 “언젠가 두 아이를 데리고 초천으로 들어가, 한 젊은이와 한 동자로 삼으리라(會携二兒入苕水, 令當一少與一童)”이다. 즉 양강 어부의 삶은 그가 원했던 귀향생활의 모형이었다. 이 귀향 생활의 모형에는 가족이 포함되고 어로작업의 노동과 수확물을 시장에서 돈으로 바꾸는 생활이 포함되어 있다. 즉 삶의 흥취를 즐기는 경쾌한 태도가 그의 초기산문에서 드러나고 기발한 소재와 글쓰기에의 취향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일상의 윤리와 생활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기벽의 추구는 그의 몫이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張天庸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천용전>은 당대에 유행한 괴팍한 예술가의 초상을 보여준다. <장천용전>은 중요한 예술사적 정보를 제공하는 글이지만, 예속에서 벗어난 기인의 입전을 통해 기존질서를 비판하려는 의도는 감지하기 어렵다. 장천용이 관아에 들어오길 극도로 싫어한다고 하였으나, 정작 관찰사 이의준이나 부사 정약용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아무런 갈등이 없다.

이 점에서 하층민들의 입전을 통해 기존질서를 비판하려는 지향을 드러내는 다른 소품가들의 태도와는 다르다. <장천용전>의 경우엔 오히려 ‘奇’에 대한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소재로 취택된 것에 가깝다. 이 전의 경우에는 사평이 생략되어 있는 대신 쓸모없는 아내에 대한 장천용의 윤리적 헌신을 보여주는 서술이 짤막하게 덧붙여 있다. 장천용의 기행에 대한 서술을 그의 윤리성에 대한 찬사로 맺고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단락과 조응되어 앞서 서술된 장천용의 기행은 예술가의 유쾌한 일탈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게 된다.


<장천용전>의 이러한 구성은 <伏菴李基讓墓誌銘>과 附見閒話條의 구성을 연상시킨다. <복암이기양묘지명>의 부견한화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선중씨가 일찍이 충주(忠州)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丹川의 초옥(利川에 있다.)으로 공을 방문하니 공이 집에 없었다. 동자에게 물어 그 동자와 함께 그가 갔다는 이웃집으로 갔더니, 다 쓰러져가는 한 칸의 초가집에 비가 새어 부엌에 흙탕물이 가득하였다. 공은 그 부엌에 솥을 걸어놓고 미음을 끓이는데 나무가 물에 젖어 타지 않으니 다 망가진 부채로 부치느라 애쓰고 있었다. 중씨께서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복암은 인사할 것 없다 하고는 조금 뒤 미음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귀신 꼴을 한 노파가 알몸으로 누워 있었는데 똥오줌을 마구 싸대어 악취惡臭를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복암은 그 노파를 부축해 일으켜 미음을 먹이며 좋은 말로 위로하니 노파는 한숨을 내쉬어가며 팔자타령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복암은 노파를 달래고 비위를 맞추어 끝내 그 미음을 다 먹인 다음 자리에 눕히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중씨가 어떤 노파냐고 물으니, 복암이, “나는 본래 종이 없으므로 내가 병이 생겼을 적에 이 노파 덕으로 살아났다. 그런데 이 노파에게는 자녀도 친척도 없으며, 또 마을이 작아 가까운 이웃도 없기 때문에 내가 돌보아 주는 것이다.”하고는 크게 웃었다. 선중씨께서는 매양 이 일은 사람을 감복케 한다고 하였다.

신분과 지위, 학문과 예법을 뛰어넘는 한 인간의 진솔한 윤리적 실천이 결국 인간을 평가하는 최종 지침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의 <장천용전>에서는 이런 윤리적 실천을 전제로 예술가의 괴벽이 유쾌한 일탈의 수준에서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정약용의 소품적 경향의 산문들은 기이한 흥취를 추구하는 성향을 보이고는 있지만, 윤리와 생활의 범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제어되고 있다. 그러니 극단적 환락을 추구하다 ‘일신이 낭패하여 아침에 저녁거리가 없고 기생집에서 밥을 빌고 고아나 늙은이의 상에서 밥을 나누어 먹게 되어도 태연자약한’ 극단적 기궤의 추구는 배척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품문의 출현이나 유행의 배경엔 상업도시의 발달만큼이나 사상적 혁신의 조류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정약용이 받아들인 서학의 사유체계는 소품문의 기궤에는 유리하지 않은 것이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중심 지향적 사유체계가 서학적 세계관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학의 영향을 받아들인 정약용의 인간 이해에서, 정약용의 인간은 언제나 일상의 삶을 성화해가는 근실한 윤리적 인간인 것이다.


실학적 사유방식 역시 소품에는 유리하지 않은 사유방식이라고 할 것이다. <국영시서>에 보이는 기발한 발상은 충분히 奇詭의 추구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결국 <칠실관화설>에 보이는 ‘과학적 서정’을 본질로 한다. 정약용은 후일 정학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생계를 위해 양계에 종사하면서도 양계의 개선 방법을 연구해보고 때로 양계를 주제로 시를 짓기도 하도록 당부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을 ‘세속적인 일에서 맑은 운치를 간직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이 편지글은 학문과 문학을 생활에 통합하는 미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이 원굉도를 비롯한 공안파의 영향을 받은 본격적 소품가들의 소품문과 정약용의 초기 사환기 산문들의 거리이다.

정약용 초기 산문들의 방향을 제어하는 또 다른 요소는 엘리트 의식이다. 사환기 정약용의 문학 활동의 중심이 되는 죽란시사는 남인 엘리트 관료집단의 모임이다. 이 모임의 시사첩에 붙은 <죽란시사첩서>는 인생과 자연의 순간들을 향유하는 매우 경쾌한 흥취를 내보이지만, 뒷부분에 붙은 다음과 같은 덧말로 그 흥취의 방향은 통제된다. 

樊翁이 이 일을 듣고 크게 감탄하기를, “훌륭하다, 이 모임이여! 내가 젊었을 때에 어찌 이런 모임이 있을 수 있었으랴. 이는 모두 우리 성상께서 20년 동안 선비를 기르고 성취시키신 효과이다. 늘 모일 적마다 성상의 은택을 읊어서 보답할 방법을 생각해야지, 한갓 곤드레만드레하여 떠드는 것만 일삼지 말라.”하셨다.

현실에서 득의한 엘리트로서 기성질서의 핵심에 존재하는 작가가 기궤를 추구한다는 것은 사실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는 현실에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장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시기 소품문의 유행은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사대부 작가의 증갗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품의 유행은 기성사회를 전복하고 해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실제로 그러했던 것이다. 적어도 사환기의 정약용은 당대 사회의 ‘주류’였다. 남인이라는 출신이 그를 끊임없이 위협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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