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기행]밀양박씨
[성씨기행]밀양박씨
  • 김철 기자
  • 승인 2004.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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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신라 개국왕인 박혁거세를 시조로하고 있다. 박씨는 박혁거세를 비롯해 신라시대 10명의 왕을 배출하면서 중흥기를 누렸다. 그중 신라말기에 해당하는 경명왕은 9명의 형제를 두었는데그중 장남이 언침(彦沈)이다.

밀양박씨의 시조가 되는 언침은 밀성대군으로 불리었고 밀성은 현재의 밀양지역을 뜻한다. 언침을 중시조로 시작해 언부를 시조로하는 문하시중파, 언상을 시조로하는 도평의사공파, 언인을 시조로하는 복야공파, 양언을 시조로하는 밀직부사공파, 천익을 시조로하는 판도판각공파, 을재를 시조로하는 삼사좌윤공파 등 6개로 크게 나눠진다.

가장 많은 후손들이 번창한 문하시중파는 이후 규정공파와 사문진사공파, 밀직부원군파, 충헌공파등으로 나뉘게 된다. 문하시중파의 9대손인 현(鉉)은 고려중엽 사헌부 규정(종6품)벼슬에 올라 규정공파로 분파된다. 현으로부터 7대손인 중손(仲孫)까지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중손이 숭록대부(종1품)에 오르면서 밀산군이라 명해졌고 3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중 옴천과 마량은 둘째아들 미(楣)의 후손들이고 군동 석교인근은 셋째아들인 건(楗)의 후손들이다.
강진에서 가장 먼저 생활을 시작한 인물은 삼(參)이다. 삼은 고려말에 직장(중앙관서 종7품벼슬)을 지낸던중 고려패망과 함께 벼슬길을 버리고 낙향하게된다.

▲ 군동면 석교마을에 위치한 숭조관
성전면에서 생활을 시작한 삼의 후손들이 병영지로마을과 작천용정마을등에서 생활했다. 후손중에는 두명의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창현(昌鉉)은 무과에 급제한후 강진에 있을때 갑오동학란이 일어나자 의병 700여명을 이끌고 완주성전투에 참여했고 그해 겨울 병영성전투에서 수성군을 총지휘하다 순절했다. 또한 창현은 효성이 지극했다. 모친의 중병을 낫기위해 한겨울에 월출산에서 백일간의 기도를 드렸다. 동상으로 손가락 하나를 절단한 창현의 시신이 병영성에서 발견됐다는 전설이 후손들에게 전해질정도로 충효를 실천한 인물이다.

또 한명의 후손은 지방유형문화재 206호인 강재일사를 쓴 기현이다. 옴천에서 출생한 기현이 쓴 강재일사는 1891년부터 1903년까지의 향촌사회에 대해 일기형식으로 자세하게 적혀있다.

강재일사가 역사적의미를 갖는 이유는 동학혁명 당시의 동학군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역사적 자료이기 때문이다. 또하나의 자료가 최근 문화재지정을 앞두고 있다. 책의 이름은 금릉일지. 밀양박씨의 선조들이 기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금릉일지에는 병영성의 배치도, 면적, 길이등이 자세하게 열거돼 있고 당시에 사용했던 깃발의 모습들이 정확하게 그림으로 묘사돼 있다. 문화재의 가치가 높은 금릉일지도 강재일사와 더불어 용정사에서 후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군동면 석교마을에는 건의 후손인 인세가 정착했다. 인세의 후손들은 효행으로서 인근지역에서 유명했다. 어릴적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후학양성에 앞장섰던 노성, 아들 중규, 영모재를 건립해 종친들을 모이게하고 후학교육에 이용했던 종대, 형과 함께 지극한 효성을 보였던 종삼을 기리기위해 도로변에 효비가 새겨져있다.

여기에 후손 봉주는 자택을 개조해 숭조관이라 불리우는 개인박물관을 만들었다. 조상들이 사용하던 식기, 사진, 농기구등을 그대로 보존해 한곳에 모아뒀다. 조상을 생각하고 기리는 후손들의 효행을 엿볼 수 있는 한단면이다.

옴천면 월곡마을에는 미의 후손인 만기(萬起)가 처음으로 생활을 시작한다. 만기는 문과에 급제해 고산군수, 영광군수등을 역임했으나 연산조때 사화에 연루되면서 남하해 강진에서 생활을 하게된다.

현재 월곡마을에는 홍모재(弘慕齋)가 위치해 만기를 비롯한 선조들을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같의 미의 후손인 자철은 마량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자철의 아들 수명이 마도진에서 벼슬을 시작하면서 후손이 번창해 마량과 고금지역에 집단 세거했다.
밀양박씨의 시제는 장흥에 위치한 세덕사에서 매년 음력 3월10일 치러지고 있고 선현 23명을 모셔서 100여명의 후손들이 참여하고 있다.

▲ 군동 석교마을의 밀양박씨 효도비
밀양박씨출신으로는 전대 의대교수로 재직했던 박보한교수, 경기도지역에서 변호사로 근무하고있는 박종관씨, 광주에서 변호사로 근무중인 박도영씨, 한겨레신문 편집국 차장으로 근무중인 박경만씨, 신세기개발 박봉주사장, 향교 박종상 전교, 군청 박종민재무과장, 청자사업소 박재룡소장, 작천농협 박승용조합장등이 있다.

 

인터뷰-박인규씨

▲ 종친회 지부장 박인규씨
신라오릉보존회 박씨대종친회 강진군 지부장을 맡고있는 박인규(79)씨는 또한 밀양박씨의 종친회를 이끌고 있다. 박씨는 “강진에서 생활하고 있는 대부분은 귀정공파가 대부분일것”이라며 “각 마을과 지역별로 나눠져 있지만 뿌리는 하나”라고 밝혔다.

문중에 대해 묻자 박씨는 “작천의 용정사에 남아있는 강재일사와 군동 석교에 놓여있는 숭조관은 문중의 자랑”이라며 “조상들을 섬기고 효를 행하는 것이 밀양박씨의 내력인 것 같다”고 강조했다. 제각에 대해 박씨는 “장흥에 위치한 세덕사가 문중의 가장 중심”이라며 “50년이상 지난 노후된 세덕사를 수리해 조상을 기리는 것이 후손들이 할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씨는 “매년 시제나 종친회의 활동에 젊은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가는 것이 현실”이라며 “자식들에게 문중과 선조을 바로 알리기 위해서는 종친들이 더욱 관심을 가져할 문제”라고 덧붙였다.

문중활동에 대해 박씨는 “지난해 전세버스를 빌려 박혁거세가 모셔져있는 경주를 방문해 춘분대제에 참여한적이 있다”며 “후손들이 조상을 다시 찾아볼 수 있도록 문중행사의 참여도를 높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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