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가네 나는가네 북망산천으로 나는가네
가네가네 나는가네 북망산천으로 나는가네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4.05.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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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신문이 만난 사람]마지막 상부 김종수옹

어릴적 상여소리가 나면 친구들과 곧장 뛰어가 상여행렬을 구경하곤 했다. 빨간 깃발을 앞장세우고 긴 행렬이 이어졌고 구슬픈 상여소리가 핑경소리에 어울렸다. 상여뒤에는 눈이 퉁퉁부은 가족들의 통곡소리가 이어졌다.

그 행렬을 이끌고 가는 사람은 상여위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말을 탄 기수 같았고 고싸움놀이때 고에 올라탄 대장 같았다.

그 사람은 한손에는 핑경을 들고 무어라 딱 알아챌 수 없는 가락을 흥얼거렸다. 상여위 사람의 음정이 애절해지면 뒷따라가던 가족들의 울음도 덩달아 높아졌다. 아이들은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묘한 슬픔에 빠지곤 했다. 상여는 슬프디 슬픈 상여소리를 남기고 어느덧 먼 산모퉁이로 촘촘히 사라져 갔다.

칠량면 김종수(86)옹은 스무살때부터 상부소리(상엿소리)를 했다. 그의 소리를 들어본 사람들은 한번쯤 눈시울이 벌게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의 상여소리에 빠져든 사람은 여지없이 상주의 처지가 되어버리고 나도 언젠가 저 길을 가겠지 하는 생각을 들게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유순하게 만들고 만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각 마을에는 김옹과 같은 상부(相扶.상부상조의 준말로 추정됨.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화사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소리를 누가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장례절차가 급변해서 전통 상부소리의 연명은 사실상 끊어졌다. 김종수옹은 강진의 마지막 상부나 마찬가지다.

김옹의 주소는 칠량면 만복마을. 만복마을을 찾아가 김옹을 찾았을 때 한 주민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큰 4차선 도로 건너편이었다. 김옹은 마을과는 떨어진 도로건너편 외진곳에서 마치 섬사람 처럼 살고 있었다.
“나도 이제 갈 때가 된 사람인데...”

김옹은 5년전 할머니를 먼저 보내시고 혼자 살고 있었다. 7남매는 모두 출가해서 광주와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소개했다. 고혈압증세 때문에 서울의 병원에서 두달동안 입원해 있다가 기력을 되찾아 내려온지가 얼마되지 않는다고 했다.

김옹은 탁월한 목청을 가진 탓에 20살 때 처음으로 상여위에 올라가 상부노릇을 했

다. 상부는 상여가 집을 출발해 매장 장소에 도착하기 까지 모든일을 책임지는 총지휘자 격. 이 때문에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상부를 하는게 일반적인 관례였으나 그는 일찌감치 망자의 향도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김옹은 60년대 말과 70년대 초반까지가 자신의 최고 전성기였다고 소개했다. 전성기라는 것은 다른게 아니였다. 초상나면 사람 많이 몰려들고, 우는 사람들도 많고, 돼지도 서너마리를 잡는 시대가 그때였다는 것이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반은 강진에 인구가 가장 많던 시기이다. 그러다가 마을에 사람이 없어지면서 장례식도 절차가 없어졌다. 김옹은 “송장이 트럭에 실려나가는 것을 보면(요즘에는 마을에 젊은 사람이 없어 관을 트럭에 실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면 기가막힌다“고 혀를 찼다. 김옹은 그 때문인지 요즘에도 초상집에서 상부소리를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는다.

칠량 영풍마을 김영희(73)씨는 “상부소리를 부탁하면 젊은 사람이 죽으나 늙은 사람이 죽으나 정성껏 일을 봐준다”며 “여러 상부소리를 들어봤지만 종수씨를 따라가지 못하더라”고 말했다.

김옹에 따르면 상부소리는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망자를 위로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면서 산 사람에게는 액이 들지 말고 복만 들기를 기원한다. 상부소리는 이별의 슬픔과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도 담겨 있는 것이다.

김옹은 유족들이 많이 울면 상부소리도 더 애절하게 나오더라고 소개했다. 특히나 딸이 많은 집은 자신도 울움이 복받쳐 상부소리를 못한때도 있었다. 상부소리가 애절해 지면서 유족들은 더 많은 곡을 하게되고 덩달아 상부소리의 애통함은 더 깊어가는, 그래서 멀리멀리 슬픔이 울려퍼지는 그 소리가 바로 어릴적 아스라이 듣곤했던 상여소리였다.

상부는 보통 장례식 전날 상가집으로 들어간다. 밤이되면 유족들을 모아놓고 다음날 어떻게 일을 처리할지 구체적인 상의를 한다. 이어 경(更:하루의 밤을 5등분한 시각의 이름)을 친다고 해서 상주를 위로하고 유족들의 잠을 쫓아주기 위해 상부소리를 하며 마을주민들과 함께 집안을 한바탕 순회하는 일을 벌인다. 1경은 밤 10시, 2경은 11시, 3경은 12시다. 요즘에는 3경이 보통이지만 예전에는 5경이라고 해서 날을 꼬박 세우기도 했다.

「어널 어이가 넝차 어화라
북망산천이 멀다하니 저건너 앞산이 북망일세
어널 어널 어이라
가네가네 나는가세
북망산천에 나는가네
어널 어이가 엉차
명전곤포 앞세우고 북망산천을 나는가네
가네가네 가네 나는가네 숲속으로 나는가네
어널 어널 어얼얼차 어화널
-중략-  」

  
1경부터 시작되는 상부소리는 상주들을 통곡하게 했고 마을주민들이 눈물을 찔금찔금 흘리게 했다. 특히 김종수옹은 사설(私設)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일반적인 상부가사에 망자가 살아온 길을 가미하는게 사설. 김옹은 평소에 눈으로 보아놓고 가슴으로 느껴두었던 망자의 삶을 상부소리 곳곳에 넣어 망자가 젊었을 적 고생한 일등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그때마다 상주들은 복받치는 슬픔을 참지못하고 통곡을 하곤했다. 그렇다고 그것을 미리 외우거나 연습한게 아니었다. 상가집에서 그 분위기에 맞춰 자연스럽게 나오는게 김옹의 사설이었다.

김옹은 이 때문에 상부소리는 창(唱)을 잘한다고 해서 잘하는게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젊었을적 강진에 내려온 명창 임방울씨와 만난적이 있지만 창과 상부소리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유는 창을 하는 사람들이 ‘상부소리의 계제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죽은 자를 달래고 상주들을 위로하는 그 묘한 소리의 세계는 춘향전도 심청전도 따라오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었다.               

장례식날 아침, 상여가 출발하면 상부는 상여행렬의 총 지휘자가 된다. 상부는 구슬

픈 상부소리를 계속하면서 대매꾼(상두꾼.상여를 메는 사람)의 호흡과 발을 잘 맞춰주어야 한다. 특히 예전에는 도로가 좋지 않아 상여가 외나무 다리를 건널때가 많았다. 김옹은 대메꾼들의 발을 정리시켜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가지런히 발을 엇딛어가며 외나무다리를 건너게 지휘 하곤했다.

김옹은 요즘 초상집에 가면 곡하는 사람이 귀하다고 아쉬워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후손들은 무조건 슬퍼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망자의 삶을 되세겨보고 그의 떠남을 진심으로 슬퍼해야 하는게 후손들의 몫이라는 뜻이었다. 김옹에게 요즘 사람들의 마지막 길은 더 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60~70년대 강진지역 상여행렬의 순서

1.만장
2.방장수(귀신을 쫓아내는 사람)
3.영여(혼백상자. 망자의 사진과 소지품등이 들어있음)
4.혼백상자 수행자
5.명정(銘旌-붉은 천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이름을 적은 깃발)
  공포(功布-관을 뭍을때 관을 닥는데 쓰는 삼베헝겁)
6.상여
7.상인(喪人.고인의 가족들)
8.복인(服人.상복을 입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통 8촌이내의 친족이다)
9.손님들

 

 

70년대 초 장례준비 모습

장례풍습은 각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아 ‘이랬다’라고 설명하기가 난해하다. 요즘에는 3일장이 일반화됐지만 강진에는 1950년대만 해도 9일장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후 70년대 초반까지 5일장이 많았다. 장례기간이 길었던 이유는 당시 사회상과 큰 연관이 있었다.

요즘에는 장례용품이 모두 상품화됐지만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게 관례였다. 5일장 기준으로 당시의 장례용품 준비과정을 살펴보면, 장례 첫날에는 인편으로 부고를 띄우고 제일먼저 관을 짜기 시작했다. 보통 목수들이 소나무를 이용해 관을 짰는데 집안에 따라 검사절차가 까다로웠다. 어떤집은 명주솜을 이용해 관을 문질러 보았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솜이 걸려 대패질을 다시하게 했다.

상복도 직접 만들어야 했다. 상을 당하면 온 마을 여자들이 달려들어 밤을 세워 바느질을 했다. 또 한편에서는 상여를 만들기 위해 창호지에 물감을 들였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상주들은 3일안에 상복을 입어야 했다. 그때야 비로소 입관을 했다. 김종수옹은 “예전에는 상주법이 엄격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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