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역사산책2-강진은 어떻게 오고 갔을까?
강진의 역사산책2-강진은 어떻게 오고 갔을까?
  • 강진신문 기자
  • 승인 2004.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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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만<성화대학 교수. 한국사>

 3월이 왔다. 계절상으로 봄이 온 것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봄은 왔지만 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때 아닌 폭설로 여러 지역의 길이 막혀 오고가던 차들이 꽁꽁 묶인 채 교통지옥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로 인해, 특히 충청지방의 폭설 피해는 더욱 막심한 모양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시절이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새로 개통되는 고속철도가 전국을 반일 생활권으로 만든다는 이 시점에서 자연재해인지 혹은 늑장 대처에 의한 인재(人災)인지 섣불리 얘기할 수는 없지만, 눈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다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통수단이 변변치 못했던 예전에는 얼마나 고생스럽게(?)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또는 저 고장에서 이 고장으로 옮겨 다녔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과거의 여정이 운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교통수단에 고마움을 표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폭설 피해와 무관하였던 강진은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도 결코 교통이 그리 원활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과거에 강진을 오고갔던 사람들은 어떤 루트를 통하여 다녔을까 궁금해진다.

 강진을 왕래하던 사람들의 이력(履歷)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으로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먼저 우리의 고전(古典)으로 손꼽히는 춘향전(春香傳)을 보면,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부모님 앞에 하직하고 즉시 전라도로 향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여정은 남대문을 지나 청파역(驛)에서 말을 잡아타고 남태령, 과천, 수원, 성환, 천안, 공주를 지나고 금강 건너 여산 땅에 도달한다. 그리고 길을 세 갈래로 나누어 ?너는 左道(좌도)로 들어가 진산?금산?무주?용담?진안?장수?운봉?구례, 이 8읍을 순행하여 아무 날 남원읍으로 대령하라.

그리고 중방과 역졸 너희는 우도(右道)로 용안?함열?임피?옥구?김제?만경?고부?부안?흥덕?고창?장성?영광?무장?무안?함평으로 순행하여 아무 날 남원읍으로 대령하라. 또 종사를 불러 익산?금구?태인?정읍?순창?옥과?광주?나주?창평?담양?동복?화순?강진?영암?장흥?보성?흥양?낙안?순천?곡성으로 순행하여 아무 날 남원읍으로 대령하라.?라는 명령을 내리고 어사또는 행장을 차려 남원으로 춘향이를 구하러 가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를 보면 강진은 가로로 화순과 영암을 경유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기록을 찾아보면, 네덜란드인 하멜(Hamel) 등이 제주도에 표류한 후 서울로 이송되는 과정이 나오는데 그 여로는 해남, 영암, 나주, 장성, 정읍, 입암산성, 태인, 금구, 전주, 여산, 은진, 연산, 공주를 거쳐 경기도를 지나 서울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후 이들에 대한 처리가 문제되어 다시 전라병영으로 이송되고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 여정은 예전에 서울로 올라갔던 때와 똑같은 길을 따라 똑같은 고을을 지나쳐 영암에 도착하였고, 이어 작천 혹은 전라병영에 인도되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보면 강진은 세로로 해남과 영암을 경유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열기하면, 다산(茶山)이 강진에 유배되어 오는 과정의 기록이 더욱 생생한 바, 이를 보면 다시 동작나루를 건너고 과천을 지나 금강을 건너서 노령(蘆嶺)을 넘어 형과 아우가 이별해야 하는 나주에 이른다. 이어 나주역 앞 광나루를 건너 영암을 거쳐 누릿재(黃峙)를 넘어 강진에 들어오게 된다.

그 입구인 월남리에는 월남원(院), 월남참(站), 월남역(驛) 등으로 불리는 쉼터가 있었으며, 성전 삼거리에 못미처 오른쪽 마을 원기(院基)에 석제원(院)이 있어 이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고, 이를 지나 강진읍에 도달하여 백금포에서 가까운 동문 밖 주막에 거처하게 되고, 다시 다산초당에 이르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보면 당시의 열악한 교통사정을 감안할 때 과연 그 머나먼 길을 어떻게 지나왔을까 고민해 보고 싶어진다.

여러 기록이 있어 옛날의 모습을 복원해 볼 수 있는데, 사람과 교통수단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던 기관으로 역과 원 그리고 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역(驛)은 육로를 이용하여 중앙과 지방을 이어주던 육상교통의 핵심기관이었으며, 원(院)은 역과 역 사이에 공용으로 여행하던 관원을 위한 숙소, 즉 여관이라 할 수 있으며, 참(站)은 원나라의 참적(站赤)제도에서 유래하였는데 역로(驛路)에서 거쳐 가다 쉬던 곳으로, 대개 황해?함경도 지역의 역을 참이라 하였다고 한다.

역이 30리마다 설치되었다고 하니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겠는가. 우리의 도로와 휴게소 시설은 현대화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인간미 넘치는 정감이 남아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뿐이다. 

 다시 날씨가 좋아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며 말이다. 다시는 자연에 의한 재해가 없었으면 한다. 현대 문명의 이기 속에서 불편함 없이 사는 요즘, 새로운 기상 이변 앞에서 속수무책인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면서 모두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상을 해 보고 싶다.

역사에서 근대화(近代化)라는 용어를 정의한 바 있는 칼 베커(Carl Becker)는 이를, 인간이 드디어 자연을 극복하고 이에 더하여 그를 이용할 수 있는 단계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과연 그러한 지적이 유용한 견해인지에 대해서는, 이번 폭설대란으로 인해, 다시 한 번 곰곰이 되새겨보아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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