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은 다시 복원되어야 한다.
다산초당은 다시 복원되어야 한다.
  • 특집부 기자
  • 승인 2004.01.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 군의장.강진읍 팔영마을 이장>

다산로에서

일반 관광객들이 남도답사 1번지 강진하면 제일 먼저 다산초당을 떠올리며 찾아온다. 그런데 현재의 다산초당 본관 건물은 1956년 10월 26일 기관장, 유지 등 뜻있는 인사66인이 다산유적보존회(회원 221명)를 발기하고 귤동 마을의 윤재은(1894. 1. 29 - 1967. 2. 14)선생이 대표를 맡아 지역유지, 경향각지의 성금 등 3,989,474원(환)의 예산을 확보하여 고전순한국식와즙목조평가건(4간) 양식 14평 2합의 규모로 1957년 3월 7일 착공, 1958년 4월 25일 준공하였고 이를 계기로 문교부에서 1959년 1월 23일자로 ‘고적 제153호 정다산유적’으로 지정받았으며 동년 5월5일 낙성식을 그리고 1963년 문화재(사적 제107호)로 지정 받았으며 강진군에서 1975년 서암을 복원하고 천일각을 건립, 다시 1년 후 인 1976년 동암을 복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관광객이 이곳을 다녀가지만 볼거리가 단순하고 자료가 부족하여 늘 안타까워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 차의 재조명(1983년 최계원)’에 의하면 다산선생이 1812년 9월 22일(다른 기록인 성전면 금당출신 이효우씨의 2001년 발행 ‘백운세수첩’에는 1812년 9월 12일 임)성전면 백운동(현재는 월하리)의 무위사에 소풍을 갔다가 마침 그곳에 와있는 초의스님(후에 선사 및 다성으로 추앙)을 만났는데 초의스님이 화선지를 펴놓고 백운도를 그린 후 다산선생에게 제영을 부탁하므로 다산은 기꺼이 12승사지영을 지어 초의에게 주었고 술대접을 받아 흥이 난 다산선생은 다산도를 그리고 ‘누가 더 잘 그렸나?’하고 농담을 했는데 두 분의 그림에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고 했으며 이 때 다산선생은 51세, 초의스님은 27세였다고 하였다(다산도는 2001. 6. 8. 강진신문보도).

이 그림에 의하면 현재의 연못과 바로 밑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고 특이하게도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다산초당에 동암, 서암을 보호하기위해 길쭉한 담장이 있는데  이 담장 역시 우리 고유의 모습 그대로 흙과 돌로 만들어졌고 맨 위로는 짚으로 이엉을 얹어 눈과 비로부터 보호받게 하였다.

리고 1940년 일본인 차 연구가 이에이리가 쓴 ‘조선의 차와 선’ 이라는 책의 그림(정다산적거 그림은 2003. 9. 29. 강진신문보도)에도 지금의 서암 쪽에는 3채, 동암 쪽에는 2채의 초가가 있고 현재의 연못과 서암 바로 아래쪽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음을 볼 때 지금의 모습과는 상이하므로 강진군에서는 다산도의 원본이나 복사본을 찾아 고증을 거쳐 옛 모습을 그대로의 다산초당으로 다시 복원되어야 한다고 감히 제언하고 싶다.

물론 이런 일은 강진군이 주도하고 지역의 문화단체와 군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함께 해야 할 것이며 사업추진도 전문용역기관에 용역을 의뢰 철저한 고증과 증빙자료에 기초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며 용역결과가 나오는 대로 복원 조감도를 초당입구와 초당내의 적당한 장소에 볼 품 있게 게시하여 찾아온 관광객이 다산초당의 참모습을 가슴속 깊이 새기고 다산선생의 사상과 체취를 듬뿍 안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임무라 사료된다.

왜냐면 지금까지 우리 강진군에서는 그분들께 참모습의 다산초당을 보여주지 못한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산초당이 본래 모습으로 다시 복원되고 지금 유물전시관에 있는 거중기도 야외에서 관광객이 직접 사용해 볼 수 있도록 제작함은 물론 산책로라 명명하여 가꾸고 있는 길이 다산선생이 거닐던 곳이 아니라면 과감히 이를 시정하고 과연 어떤 길로 산책을 하였는지도 재검토하는 등 관광객 유치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강진을 찾는 관광객이 다산초당을 비롯 불교개혁의 산실인 천년가람 백련사에서는 동백 꽃망울에 심취하고 강진의 영랑생가에서는 모란꽃에 흠뻑 젖었다가 국보 제13호가 있는 성전 무위사로 이동 불가사의한 벽화에 또 한번 놀라고 다시 병영으로가 병마절도사의 집무실에서 1일 절도사가 되어 남도 군을 호령한 다음 비취색 영롱한 청자촌에서 선조들의 장인정신을 본받는 등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땅을 또 찾고 싶은 고장으로 오래 기억될 수 있도록 군민 모두가 더욱 친절한 관광요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옛 명성 그대로 동 순천 서 강진의 이미지를 되찾고 우리의 지명인 편안한 땅 강진을 만들어 가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