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역사산책 김희만(성화대 교수, 한국사)
강진의 역사산책 김희만(성화대 교수, 한국사)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4.01.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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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진에는 어떤 성씨(姓氏)들이 살았을까

 사람들이 왔다.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고 또 끝이 났다. 우리 고유의 설을 전후해 온 나라에는 그동안 각자의 터전에서 생활을 영위하다가 삶과 영혼의 안식처인 고향으로 모두들 만사를 제쳐두고 관습처럼 옮기기를 시작한 것이다. 조용하던 마을마다 집집마다 밥짓는 연기와 웃음꽃이 피어오르고 더불어 인심과 음식 냄새가 만방으로 퍼져 나갔다.
 

 너무 많은 눈이 내려 불편이 없지는 않았지만, 온 천지를 뒤덮은 백설은 그동안의 근심과 걱정을 한순간에 덮어 버려 모두들 평안하고 밝은 모습들이다. 원래 강진에 살았던 이웃들이 그렇게 저렇게 다시 돌아온 것이다. 손마다 보따리마다 하나 가득 담은 여유와 정성은 부모님과 친인척에게 무관심했던 저간의 사정을 대신해 마련한 것이리라. 그리고 불쑥 커버린 2세들도 다소 어색하지만 그 원형을 느끼면서 이곳저곳 얼굴을 내밀며 소속감을 확인해 본다.
 

매년 정월과 팔월에는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누구를 막론하고 이 대열에 빠질 수도 없으며, 빠져서도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부모 가운데 아버지의 혈육을 중심으로 그 맥(脈)을 잇기 위한 하나의 의식이 아닐까 한다.

동일한 성씨를 사용한다는 것은 같은 부계(父系)의 친족의식을 갖는 것이며, 따라서 성씨를 매개로 형성되는 친족집단은 자연히 각 집안의 성씨와 관련하여 그 조상들의 선계(先系)가 언급되고 결국 모두 훌륭한 가문이라는 공통점에 도달된다. 과연 이 시대에 우리가 추구하는 성씨 의식은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강진에는 어떤 성씨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하다. 사실 각자가 사용하는 성씨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실제 그 연원과 계보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자못 의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성씨가 사용된 것은 중국문화의 영향이라고 보고 있다. 성씨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으나, 아직 그 사용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

선시대에 만들어진 족보에는 많은 성씨가 삼국시대 혹은 그보다 더 일찍부터 있었던 것처럼 쓰여 있지만, 사실 이를 믿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다. 더욱이 족보라고 하는 것은 후대의 윤색이 가능하고 그 기재 내용 또한 사실로 확인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성씨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대개 그것을 왕이 하사(下賜)하면서부터였으며, 곧 성씨를 갖는다는 것은 사회적 특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씨의 사용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신라말?고려초의 사회변동 시기로, 각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들이 등장하여 저마다 성씨를 칭하기 시작했다. 이후 각 지역마다 여러 개의 성씨가 나타남으로써 그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게 되었다. 이후 고려는 수많은 지방세력들의 성씨를 국가적 차원에서 파악하고 정리하여, 오늘날의 본관(本貫)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성씨는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인물이나 집단에 특권이 부여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백성들은 성씨가 없이 그냥 이름만 지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씨 사용의 보편화 현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졌다. 처음에는 주로 지방의 유력한 세력가들이 성씨를 사용하였으나, 고려 중기 이후에는 일반 양민들도 성씨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 후기에는 천민층까지 성씨를 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것이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제정되면서 누구나 법적으로 성씨를 가졌으며, 그래서 현재 우리나라 사람으로 성씨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강진에는 주로 어떤 성씨들이 살았을까.『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강진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20개로 나타나는 바, 도강(道康)을 본관으로 하는 성이 넷으로 김(金)?조(趙)?황(黃)?임(任)이, 망성(亡姓)이 하나 있는데 표(表)가, 탐진(耽津)을 본관으로 하는 성이 여섯으로 최(崔)?조(曹)?유(兪)?안(安)?정(鄭)?하(河)가, 내접(來接) 성이 둘인데 행주(幸州) 강(康)과 영암(靈岩) 박(朴)이, 평덕향(平德鄕)의 망성이 하나인데 박(朴)이, 수운부곡(水雲部曲)의 망성이 둘인데 조(曹)와 오(吳)가, 영가부곡(永可部曲)의 망성이 하나인데 신(申)이, 대곡소(大谷所)의 속성이 하나인데 조(曹)가, 대구소(大口所)의 속성이 하나인데 서(徐)가, 칠량소(七良所)의 속성이 하나인데 백(白) 등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보다 80여 년 뒤에 완성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위의 사항이 다소 간소화되면서도  늘어난 26개인 바, 즉 성씨 조에 도강(道康)은 김(金)?조(趙)?황(黃)?임(任)?표(表)?박(朴)?현(玄)?허(許)가, 탐진(耽津)에는 최(崔)?조(曹)?유(兪)?안(安)?정(鄭)?하(河)와, 강(康)과 박(朴)〔병래?來〕이, 평덕(平德)에는 안(安)과 박(朴)이, 대구(大口)에는 서(徐)가, 대곡(大谷)에는 조(曹)가, 칠양(七陽)에는 백(白)이, 영가(永可)에는 신(申)과 김(金)이, 수운(水雲)에는 조(曹)?오(吳)?최(崔) 등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도강에 박(朴)?현(玄)?허(許)가, 평덕에는 안(安)이, 수운에는 최(崔)가, 그리고 영가에 김(金)이 새로이 추가됨으로써 성씨가 늘었으며, 특히『세종실록지리지』에서 향(鄕)?부곡(部曲)?소(所)로 분류되었던 평덕?수운?영가?대곡?대구?칠량 등이『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향?소?부곡 등으로 재편되어 기록됨과 동시에 도강?탐진과 동일한 지명으로 격상되어 기재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 역사상 성씨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조선 후기로, 1782년에 간행된『증보문헌비고』 씨성(氏姓) 조에는 전국에 무려 496개의 성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조선 전기의『세종실록지리지』나『동국여지승람』등에는 현재와 비슷한 250여 개나 277개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두 배 가까이 늘어났음을 알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천민층에 이르기까지 성씨의 사용이 보편화되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진정 특권이 부여되던 성씨에서 보편적인 성씨로 탈바꿈한 것이다. 또한 여러 변모를 통하여 현재 약 275개 정도의 성씨가 사용되고 있다니, 과연 성씨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왔다가 모두들 돌아갔다. 많은 시간과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웃으면서, 다음을 기약하면서 다시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떠나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결집력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만족하고 갔을 것이다. 과거의 건전한 가치관이 그대로 전수되고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

러나 불필요한 집단의식을 조장할 위험이 있는 관념은 사라져야 한다. 사회는 변하고 있다. 인식도 함께 변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사회발전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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