見 解 견해

보다  견(見)

   
 
'볼 견(見)'은 '큰 눈'과 '꿇어앉은 사람'을 그려 만든 글자다. 눈의 기능이 보는 것이니 눈을 크게 강조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나, 몸의 자세가 바르고 점잖은 것은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인간의 몸은 대상에 따라 다양한 자세를 취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몸의 주인인 마음이 이미 그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의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갑골문 견(見)은 인간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또는 배움에 임하여 스승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학자에 따라 見(견)은 단지 눈으로 확인 가능한 물리적 세계를 보는 것이며, 무릎 꿇은 자세는 집중과 시간의 개념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 한다. 오늘날의 견(見)은 단순히 '보다'의 차원을 넘어 '생각'의 뜻으로 널리 사용한다. 견해(見解), 의견(意見), 편견(偏見), 소견(所見), 선입견(先入見) 등의 단어에서 그 쓰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풀다/깨닫다  해(解)

풀 해(解)'는 두 손과 뿔(角) 그리고 소(牛)를 조합해 만든 글자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손이 칼 도(刀)로 변하여 지금의 글꼴로 정착되었다. 손으로 뿔을 뽑는 행위는 소 한 마리의 해체(解體)를 암시한다.
유명한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장자(莊子)에 나온다. 전국시대 양나라 사람인 유명한 요리사 포정(庖丁)이 문혜군이라는 군주 앞에서 소를 잡는데 그 솜씨가 하도 신기하여 물었다. 포정의 대답은 이랬다. "저는 손끝의 재주를 이용해 소를 다루지 않고 도를 통해 소를 발라냅니다. 처음에는 제 눈에도 소가 들어와 손놀림을 어찌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만 3년이 지나자 소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정신만으로 소를 다룹니다." 포정의 대답가운데 일부이지만 주는 메시지가 가히 압권(壓卷)이다.

 

反 省 반성

   
 
돌이키다/되풀이 하다 반(反)

'돌이킬 반(反)'의 갑골문은 '엄(厂)'과 '손'을 가지고 창작했다. 엄(厂)은 비탈진 지형을 나타낸다. 그러한 지형적 특징에서 '뒤 엎는다', '뒤집다' 뜻이 파생되었다. 反(반)은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 뒤집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反(반)이 품고 있는 '되풀이 하다', '뒤집다', '배반하다', '반대하다', '되돌아 보다' 등의 뜻은 이러한 글꼴에서 여물어져 나왔다. 여반장(如反掌)은 일이 손바닥 뒤집듯 쉬울 때, 객반위주(客反爲主)는 손님이 도리어 주인행세를 하여 주객이 전도될 때 쓴다.
어미까마귀는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오면 60일 동안 먹이를 물어다가 먹인다고 한다. 그 까마귀 새끼가 자라나면 역시 60일 동안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어 길러준 은혜에 보답한다고 한다. 反哺之孝(반포지효), 즉 자식이 자라나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사자성어는 이러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살필  성(省)/덜  생(省)

'살필 성(省)'의 갑골문을 보고 있으면 하나의 이모티콘을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무엇인가를 살피고 있다'는 생각이나 느낌을 이만큼 명쾌하게 표현해주는 그림이 또 있을까 싶다. 눈(目)위에 그려진 피뢰침 같은 모양, 그것이 상징하는 것이 눈에서 나오는 빛 안광(眼光)임을 알겠다(生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다'는 글귀가 떠오른다. 눈빛이 종이의 뒷면을 꿰뚫듯 그렇게 집중해서 독서한다는 말이다.
반성(反省)은 '(자기가 한 일이나 행동에) 허물이나 잘못은 없는지 돌이켜 살펴본다'는 뜻이다.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듯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꿰뚫어 살펴볼 때 비로소 반성의 역사는 시작된다. 바로 이것이 성(省)자를 창조한 고대인들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敎 學  교학

   
 
가르칠  교(敎)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있다. 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成長)한다는 말이다. 성장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동등한 입장이다. 가르친 이후에야 그 어려움을 알게 되고 배워본 이후에야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교학상장을 대할 때는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에서 취해야할 자세, 곧 겸손을 그 횡간 속에서 읽어내야 한다. 敎學相長(교학상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교육이다.
'가르칠 교(敎)'의 갑골문은 마치 손에 회초리를 들고 어린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는 '매를 때려서 가르치는 것'이 교(敎)의 본 뜻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손에 든 막대를 회초리로 보는 것은 문화적 고정관념이 낳은 해석일 뿐, '지휘막대' 또는 '횃불'로 보아야 한다는 학자도 있다. 가르치는 일을 자기성장으로 생각한다면, 교육은 '매'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언사일지도 모르겠다.

   
 
배울  학(學)

'배울 학(學)'의 고대글꼴을 보면 윗부분은 두 손이 효(爻)를 감싸고 있다. 아래 부분은 지붕과 아이(子)가 보인다. 효(爻)는 교(敎)나 학(學)에 동일하게 등장하는데 가르치고 배우는 내용을 지시한다. 학자들에 따라 '셈 막대' 또는 '문자'로 보기도 하고, '새끼줄로 지붕을 묶는 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듯 배움의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배움의 과정이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은 모두가 동의한다. 두 손이 주는 느낌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성스러움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공자는 논어 에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사리에 어둡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고 했다. 배움은 생각의 잣대로 헤아려 주어야 맹목(盲目)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각은 배움의 여과지로 걸러주어야 독단(獨斷)에 빠지지 않는다. 공자는 배움(學)과 생각(思)의 균형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