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 하는 날
공판 하는 날
  • 정몽규 시민기자
  • 승인 2004.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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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규<신전면사무소>

새벽부터 경운기들이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소리에 잠을 깨보니, 나락가마니 몇 포대씩 경운기에 싣고 동네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보아 오늘이 공판 날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共販인지? 公販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시골에서는 그냥 “공판”이라고 한다. 일년 내내 고생해서 거둬들인 곡식을 종자와 식량 할 치만  남겨놓고 적자든 이익이든  내다 파는 날이다.

시골에서 자랐던 사람들은 “공판“하면  생각나는 것이 많을 것이다. 온 가족이 자가 노동력으로 수확(收穫)한 곡식을 마당에 멍석을 깔고 3.4일 햇볕에 펼쳐놓고 발로 젓고 다니면서 건조(乾燥)시켜, 풍구(風具)로 조제한 곡식을 짚 가마니에 담아서  대칭(大秤)저울에 통나무를 끼워  어른들 둘이서 어깨에 메고 55kg 단위로 저울질한 가마니를 새끼줄로 쓸용자(用) 형으로 묶어서 정돈하여 쌓아 두면 작석(作石)이 끝나고 공판장에 싣고 나갈 일만 남는다.

옛날의 공판하는 날이면 요즘처럼 요란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았다. 차분히 지게나 소달구지, 리어커에 싣고 공판장까지 운반한다. 등급에는 그렇게 연연하지 않았다.  익히, “내 딸이 고와야 사윗감을 고른다”는 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검사원이 어쩌다 막걸리 값이나 하라고 1등 몇 가마니 때려주면 거기에 만족하고 공판장에 같이 갔던 사람들끼리 얼마씩 거출하여 막걸리 몇 잔 드시면 그 동안의 모든 피로도 다 잊는다.  또한, 옛날에는 요즘처럼 기계로 쉽게 운반하지는 않았다. 비록 지게로 힘겹게 짊어지고 공판장까지 몇 번씩 반복하여 운반했다 할지라도 마음만은 지금보다 훨씬 편했었다. 쪼들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옛날에 공판 날 뒤에는 달라진 것도 많고 해결되는 일도 많았다.  먼저 수발 황락한 할아버지 할머니 담배(봉초) 몇 보루 사드린 것은 필수적 이였고, 밥상 위에 갈치 꼬랭이라도 올라오곤 했다. 아버지가 드시는 소주도 평소에는 낱 병으로 사 드셨지만 이때는 상자로 한 상자쯤 들여 놓기도 한다. 아이들은 새 런닝샤스 라도 한 벌  얻어 입을 수 있었다. 형님, 누나들 기성회비도 해결할 수 있고, 비료값을 비롯하여 마을 잡부금도 해결한다. 이때나마 잠시 가정은 보람을 느끼며 가족의 귀중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불쌍한 것은 어머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뭐 한 가지라도 쓰인 곳이 없다. 항상 구정물 찍찍 흐르는 저고리 치마에  수건 덮어쓰신 어머니는 필요하신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말이니까 그렇지 농사를 지어서  공판까지의 과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가족 중에서 누구 한사람 놀고먹는 사람 없었고 온 가족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몫을 다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들에서 일할 때,  할머니 할아버지는 집 안 일을 하시고, 보통 가정집의 자녀수는  5남매 이상 이였기 때문에  조금 큰 아이들은 그 밑의  아이들(동생)을 돌봐야 했었다. 저녁식사 때는 3.4대가 모여 앉아  보리밥 한 수저라도 서로의 그릇에 떠 넘겨주는 훈훈한 정으로 배를 채웠다. 그러면서도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은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공판이라 하지 않는다. 정부에서 물가 조절용 또는 국가 비상시 비축용으로 양곡을 사들인다하여 “매상(買上) 또는 수매(收買)” 라 하고 그 날을 “매상날” 또는 “수매일“ 이라 한다. 시중 값이 더 비쌀 때는 수매를 기피 할 때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무제한 수매가 아니고 제한 수매를 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전량 수매와 가격 인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난리 법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매하는 날은 옛날 같은 분위기는 찾아 볼 수 가 없다. 한 포대라도 더 매상 하려고 아우성들이고, 한 등급이라도 더 올려 받으려는 여러 가지 유형을 살펴본다.1.검사원에게 갖은 아양을 떠는“아부형” 2.농사를 잘 못 지었다고 시인하면서 잘 봐달라는 “자수형”, 3.곡물만 출하해놓고 주막에 앉아있는“주당형“ 4.옆 사람 물건과 비교하는“시비형”5. 음료수를 권하는“물질공세형” 6.권력자의 배경을 이용하려는 “권력형” 7.저명인사의 곡물과 섞어서 놓는“얌체형”, 8.수매증 발급자에게 허위 작성을 요구하는“철판형” 9.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믿고 조용한 시간을 노리는“기회형” 10.사전에 미리 검사원에게 향응을 제공하는 “매수형” .

이렇듯 공판장에 나와서  속내를 내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약간의 얄미운 감도 있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그 속에는 그들의 철학이 있고,  이 시대의 한 장면이 있다. 한 등급이라도 더 올려 받음으로써  가족이 모여 앉아 수박 한 통이라도 더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되고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옛날에 비해  요즘이 먹고 살기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지만, 농가 부채는

 더 늘어만 가고  인심은 각박해지니 공판하는 날에 거는 기대 또한 옛날의 감정이 아니다.

나는 오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먼 허공을 바라보면서 앞에서 나열했던 열가지 유형이 하루빨리 사라지고 “이이고 감사하요”라고 말하는“감사형”농부들이 나올 그 날!을 기다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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