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천년 역사 이어온 '대구 용운리 정수사'
고려청자 천년 역사 이어온 '대구 용운리 정수사'
  • 김영미 기자
  • 승인 2015.08.1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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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고려 무명도공 삶 추모·청자축제 성공 기원

정수사, 도공들의 참선처·정신적 귀의처 역할

605년에 창건된 정수사에사는 고려시대 무명 도공들이 작품을 구상하거나 가마에 불을 지필때 찾아가 기도를 하였다.
오늘날 고려청자의 꽃을 피우게 한 강진청자축제의 주인공인 고려시대 무명 도공들의 귀의처가 돼 준 대구면 용운리 천태산 기슭에 위치한 정수사에서 고려 무명도공 추모제 및 제43회 강진청자축제 성공을 기원하는 기원제가 봉행됐다.

지난 31일 고려시대 무명 도공들의 위패가 안치된 정수사 도조사에서 봉행된 추모제는 강진의 자랑이고 자부심을 갖게 한 고려시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려 무명도공들의 얼과 숭고한 삶을 기렸다.
 
추모제에서 고려무명도공 위패 앞에 꽃을 헌화하고 있다.
고려 무명도공 추모제에는 도자기로 자아를 버리고 혼까지 불살라 한평생 도자로 삶을 살다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천혼문 축원이 있었다. 또한 도조사 경내에 고려 무명도공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세워진 혼불등에 정수사 주지 수현 스님이 혼불을 밝혀 9일동안 개최되는 강진청자축제의 성공을 기원하였다.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작품을 완성하고자 인고의 시간을 보냈던 고려시대 도공들의 장인정신을 기렸다.
 
추모제에는 청자축제의 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 강진원 군수와 관내기관단체장, 이막동 강진청자협동조합 이사장, 이용희 청자장, 군민, 도예작가들이 참석해 무명도공께 위패 앞에 차를 올리고 꽃을 헌다해 추모했다. 이와함께 세계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예술의 극치라 천년 뒤 우리는 큰 보람을 느끼고 정성을 다하여 뜻을 이어 가겠는 다짐이 있었다.
 
고려 무명도공을 추모하고 강진청자축제 성공을 축원하고 있다.
매년 고려 무명도공 추모제 및 청자축제 성공기원기원제가 드려지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정수사는 강진청자축제장과 약 6㎞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구면 용운리 천태산 자락에 위치한다.

정수사는 천년의 역사를 잇게 한 고려 도공들의 참선 처이자 정신적 귀의처 역할이 돼 주었던 곳이다.
 
구군지(舊君誌)에 의하면 정수사는 805년(애장왕 6)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이곳의 계곡을 중심으로 양쪽 언덕에 묘적사와 쌍계사 두 사찰이 건립되었고 묘적사에는 천불상을 봉안하였으나 중세에 이르러 왜구의 침략으로 모두 불에 타 소실되었다.

폐허가 되었던 것을 만력 2년 갑술년(1574)에 산인 사민이 옛절 그대로 중수하면서 정수사라 하였다. 지난 1991년 요사가 지어졌고 현존하는 당우로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로 지정된 대웅전 등이 있다.

행사에서 강진불교합창단이 찬불가를 부르고 있다.
정수사가 소재한 천태산 기슭 10리골 수백기의 가마에서는 도공들이 불을 지펴 도자기를 구울때 나는 연기가 하늘을 가리웠으며 자아를 버리고 혼까지 불살라 상감청자를 만들어 도자문화의 성지를 이루었다.
 
이에 고려 무명 도공들에게 500년간이나 안식과 지식을 전하던 정수사에는 조선후기인 1562년에는 내암이 26동, 외암이 25동이나 되었다. 이에 기거하던 스님들만 100여명에 달했던 큰 사찰이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강진고려청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수사는 도공들이 작품을 구상하거나 가마에 불을 지필 때면 찾아와 기도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고려청자를 만들던 정신적 귀의처 역할이 되어 주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정수사에서 3㎞ 떨어진 곳에는 고려시대 청자문화의 전성기에 도자기를 만들던 사람들이 살던 도요지 당전리가 위치한다. 당전리가 위치한 청자촌에서는 고려시대 청자의 맥을 잇기 위해 매년 강진청자축제가 개최돼 오고 있다.
 
정수사에는 자체적으로 50년이 넘는 시간동안이름 없이 스러져간 고려 무명도공들의 장인정인과 넋을 달래기 위해 지난 1961년부터 도공 추모제를 봉행해 왔다. 지역에서 강진청자축제가 개최되면서 군 축제팀과 군민이 함께 청자축제 하루 전날에 고려무명도공제를 봉행해 성공을 기원하면서 그들을 추모해 왔다.

정수사는 지난 97년 경내 도조사에 높이 80㎝ 넓이 35㎝의 무명도공들의 위패를 모셨다. 지난 2006년에는 도조사 앞에 연중 도공들의 청자에 대한 열정을 밝힌다는 의미를 담은 청자로 제작한 석등 높이 2m의 혼불등을 세웠다. 이 혼불등에는 청자축제 기간 불을 밝혀 축제성공과 도공들의 넋을 위로해 온다.
 
지난 2010년 정수사에서는 도조사 단청 외벽에 고려도공들을 오래토록 기억하고 전수 되도록 하고자 그 당시 도공들이 도자기를 빚던 과정들을 그려 넣었다. 외벽에는 도공들이 정수사를 찾아 기도하는 모습, 질흙 메치기, 가마에 굽기, 성형과 유약 작업, 완성작품 검토 과정 등이 테마로 그려져 그 시대 도공들을 연상케 하고 있다.
 
이와함께 정수사는 임진왜란때 염걸장군이 외병과 싸울 때 나라를 위해 싸운 승군을 수용했던 충절의 혼이 깃든 호국도량이기도 하다.

염걸장군은 1545년(인종 1년) 칠량면 율변마을에서 출생하였고 임진왜란때 구강포와 정수사 사 사이에 쳐들어오는 적을 두 아우 서와 경, 외아들 홍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섬멸했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고려청자는 통일신라시대 후기부터 고려시대 말까지 화려하게 꽃피웠지만 조선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가 지역 도예후예들의 손에서 다시 꽃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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