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 <7>
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 <7>
  • 강진신문
  • 승인 2015.05.2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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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樂 안락

편안할 안(安)
‘편안할 안(安)’은 ‘집(宀)안에 여인(女)이 있음’이다. 전쟁이나 사냥처럼 위험하고 힘든 일에서 해방되어 집에 있기 때문에 편안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현모양처가 있으니 온 집안이 편안하다는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현모양처에 마음이 간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현명한 어머니와 어진 아내’는 ‘남자들의 천성적 로망’이었다. 최초로 ‘편안함’을 표현할 글자를 구상했던 고대인도 마음속에 내재된 이 ‘로망’에 이끌려 집(宀)과 여인(女)으로 안(安)을 디자인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수많은 시간동안 파도는 그 모양을 바꿔왔지만 바닷물의 속성은 여전히 그대로이듯, 한 집안을 편안케 하는 메커니즘도 그 모양이야 시대마다 달랐을지 몰라도,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 없음을 느낀다. 사람이 태어나 안택(安宅)에서 안거(安居)하며, 안락(安樂)한 삶을 살고 싶은 소망 역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즐길  락(樂)
공자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거워하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고 했다. 아는 것은 머리로, 좋아하는 것은 가슴으로 하는 단계라면, 즐기는 것은 머리와 가슴이 혼연(渾然)히 함께하는 단계로 이해한다. ‘즐거움’은 양적인 시간개념이 상실된다는 차원에서 몰입(沒入)과 통한다. 

‘즐길 락(樂)’은 나무(木)와 실(絲)로 구성된 글자다. 줄이 있는 악기를 ‘줄 현(絃)’자를 써서 현악기(絃樂器)로 부르듯이 樂(락)은 바로 ‘현악기’를 상형한 글자라고 한다. 이후 금문에서 백(白)자가 추가 되는데 연주할 때 손가락에 끼는 ’골무‘라고 한다. 아플 때 먹는 ‘약(藥)’은 樂(락)에 ‘풀 초’를 더했다. 풀어보면 ‘즐거움을 주는 풀’이다. 약(藥)은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주니 결과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셈이 아닌가.

 

法則 법칙

법  법(法)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법(法)은 ‘물 수(水)’와 ‘갈 거(去)’의 합체자로 모름지기 ‘법집행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도 하지만 어느 공간에 있든지 항상 수평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 특징은 무엇을 함의할까. 공평한 법적용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법은 권세(權勢)의 유무(有無)나 유전무전(有錢無錢)에 따라 공평하지 못함이 늘 문제였다.  

금문 법(法)자의 오른쪽은 ‘해태 치(廌)’를 형상화한 것이다. 고대인들은 해태(해치)를 시비나 선악을 가릴 줄 아는 신수(神獸)로 여겼다. 사악한 자를 뿔로 들이받아 제거(去)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현명한 동물로 생각했던 것이다. 3,000여 년 전 고대인들의 ‘법 관념’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은 ‘해태’가 없는 법(法)세상이어서 그럴까. 자기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되레 법을 들이받는 사람들이 종종 등장한다.


법칙  칙(則)
‘법칙 칙(則)’자는 ‘조개 패(貝)’와 ‘칼 도(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금문을 보면 ‘조개 패(貝)’가 아니라 ‘솥 정(鼎)’임을 알 수 있다. 금문 칙(則)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청동기는 거푸집에 청동녹인 쇳물을 부어 만들었다. 쇳물이 굳으면 거푸집을 묶었던 줄을 칼로 끊어내야 하는데, 바로 그 모습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금문(金文)은 먼저 흙으로 빚은 틀(거푸집)에 글자를 새기고 그 위에 쇳물을 부어 만들었는데, 칼로 글자를 새기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는 것이다. 전자가 청동기 주조과정에 초점을 두었다면 후자는 글자를 만드는 과정에 비중을 두었다. 

청동금문에는 조상제사, 관직임명, 혼인, 계약, 소송에 이르기 까지 한 사회를 작동시키고 유지하는 규칙이나 법칙 등이 기록되어있다. 놀라운 것은 ‘법칙(法則)’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어떻게 단 두 개의 사물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그 창조적 발상이다.

 

取得  취득

가질  취(取)
‘가질 取(취)’는 귀(耳)와 손(又)으로 만든 글자다. 이 글자는 전쟁과 관련이 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다음은 논공행상(論功行賞)으로 시끄럽다. 그래서 전공(戰功)을 입(口)이 아닌 귀(耳)로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해서 나온 글자가 바로 取(취)다. 取(취)는 전쟁터에서 죽인 ‘적의 시체에서 귀를 취하는 손(又)’을 그린 것이다. ‘가지다’ ‘손에 쥐다’ 등의 뜻은 여기에서 나왔다. 

한자에서 ‘또 우(又)’자가 보이면 ‘손’을 의미한다고 보면 거의 맞다. 배를 한척 두 척 할 때의 ‘척(隻)’자는 새(隹) 한 마리를 잡고 있는 손(又)이다. 마찬가지로 ‘한 쌍’, ‘두 쌍’ 할 때의 ‘쌍(雙)’자는 새(隹) 두 마리를 잡고 있는 손(又)을 그려 표현했다. 이처럼 글자의 구성요소만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어렵지 않게 뜻을 알아차릴 수 있는 한자는 많이 있다.


얻을  득(得)
‘얻을 득(得)’의 갑골문 왼쪽은 ‘걸을 척(彳)’이요, 오른쪽 ‘(득)’은 윗부분은 ‘돈’을 상징하는 조개이고 아랫부분은 손(寸)이다. 길을 가다가 횡재한 모습일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돈을 들고 찾아나서는 모습일까. 둘 다 ‘얻음’을 설명하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면 得(득)의 또 다른 뜻 ‘깨닫다’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옛날에 형제가 길을 가다가 황금 두덩어리를 주워 나누어 가졌다.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별안간 아우가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다. 형이 그 이유를 문자 “내가 평소에는 형을 사랑하였는데, 금덩어리를 나누고 보니 형이 미워졌습니다. 따라서 이 물건은 상서롭지 못한 것이므로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형도 “과연 네 말이 옳구나.” 역시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다. 형제가 금덩어리의 유혹을 이겨내고 우애를 지켰다. 그 유명한 형제투금(兄弟投金)의 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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