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6>
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6>
  • 강진신문
  • 승인 2015.05.1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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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 畵 (서화)

글 서(書)

‘글/글을 쓰다 서(書)’는 위는 붓을 들고 있는 손이요, 아래는 먹물 그릇이다. 그런데 갑골문을 사용했던 은나라 시대에도 과연 붓과 먹이 있었을까. 은나라의 수도였던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묵서도편(墨書陶片)’은 이러한 의문을 불식시켰다. 고대인들도 짐승의 털을 모아 만든 원시적인 붓을 사용했다. 書(서)자에서 먹물 그릇을 지우면 ‘붓 율(聿)’이 되고 여기에 대 죽(竹)을 더하면 연필(鉛筆)의 ‘붓 필(筆)’이 된다.
‘康津(강진)’의 지명에도 -이하는 주관적 해석임- 붓이 두 자루나 들어있다. 康(강)과 㡽(강)은 동자(同字)이고 엄(广)은 집이다. ‘편안함’을 ‘붓이 있는 집’을 통해 표현했다. 여기에 ‘즐겁다’, ‘몰입하다’의 의미도 함께 담았다. 津(진)은 어떤가. ‘먹물을 가득 머금은 큰 붓’이다. ‘(마음이)풍요롭고 넉넉해짐’과 통한다. 한 고을의 이름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런 이름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이 존재한다. 그동안 덜 노출된 뜻을 전면에 세워 보니 그 이름으로도 강진(康津)이 감성(感性)고을임을 알겠다.

그림 화(畵)

‘그림/그리다 화(畵)’는 위는 붓 율(聿)이요, 아래는 붓 자국이다. 방금 지면(紙面)위를 휘감았던 붓이 응축을 위해 순간 멈춰선 듯하다.
문방사우(文房四友), 문방(文房)은 책과 글과 그림이 있는 방이다. 사우(四友)는 붓(筆), 종이(紙), 먹(墨), 벼루(硯)다. 선비는 문방에서 이들을 벗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벗들과 함께 학문과 예술의 세계를 넘나들었다.
벗 가운데 굳이 으뜸을 꼽으라면 단연 붓(律)이 아닐까싶다. 선비는 그의 혼을 붓에 싣는다. 안중근 의사는 글씨 34점을 유품으로 남겼다. 사형을 앞둔 마지막 40일 동안 쓴 글씨라고 한다. 일본인을 꾸짖는 내용에서는 필획에서 칼바람이 일었고, 동양평화를 갈구하는 내용에서는 장엄한 붓 그림자가 일렁거렸으며,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하늘의 뜻을 담은 내용에서는 초연하면서도 온유한 글씨체가 보는 이의 마음까지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붓의 一動一止(일동일지)가 모두 혼이었던 것이다.

 

兒 童 (아동)

아이  아(兒)

‘아이 아(兒)’는 ‘절구 구(臼)’와 ‘어진 사람 인(儿)’의 합체자이다. 인(儿)은 사람의 다리를 본뜬 글자다. 그러면 구(臼)의 처음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 알려진 설은 단단히 굳지 않은 ‘유아의 두개골’이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만지면 숨골의 박동을 느낄 수 있는 갓난아이의 머리를 형상화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의 발견 이후 흥미 있는 설이 하나 등장한다. ‘총각(總角)’의 상형이라는 설이다. ‘모아서 묶을 총(總)’과 ‘뿔 각(角)’, 글자 그대로 남녀 구분 없이 어린아이들의 머리카락을 두개의 뿔처럼 묶어 올린 고대의 머리모양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총각(總角)은 오늘날은 미혼청년을 지칭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혼인 하지 않은 남자, 즉 상투를 틀지 않은 남자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총각은 곧 어린아이’라는 등식이 사회통념으로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아이  동(童)

‘아이 동(童)’은 사실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갑골문을 보면 위는 경형(黥刑)을 행할 때 이마를 찢는 ‘끌’을 상형한 매울 신(辛)이요, 아래는 신(辛)으로 눈이 찔린 채 땅위에 서있는 ‘아이’다. 금문에 와서 발음부호로 동(東)이 더해졌다.
고대에는 전쟁포로를 노예로 삼을 때 한 쪽 눈을 찔러 시력을 빼앗는 악습이 있었다. 아무래도 두 눈이 온전할 때보다 행동에 제약이 따랐을 터이니,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반항은 막고 복종은 끌어내는 효과적인 통제수단이 되었을 법도 하다. 전쟁포로 중에는 성인뿐 아니라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도 예외 없이 한쪽 눈을 빼앗기는 슬픔을 겪어야했으니, 아이 동(童)’자가 품고 있는 또 다른 뜻 ‘종(從)’이나 ‘노복(奴僕)’은 이런 슬픈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 슬픈 역사로부터 수 천 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사회에는 아이들을 노예처럼 대하는 아동학대가 뿌리 깊게 남아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進 步 (진보)

나아갈  진(進)

‘나아갈 진(進)’은 추(隹)와 착(辶)의 합체자이다. 갑골문은 한 마리의 새(隹)와 발(止)을 그렸다. 금문은 여기에 ‘다닐 행(行)’이 추가 되었다. ‘辶(착)’의 윗부분 두 점은 ‘가다’를 뜻하는 ‘척(彳)’이며, 아랫부분은 ‘발’을 뜻하는 ‘지(止)’이다. 따라서 한자에 착(辶)이 있으면 일단 ‘움직임’과 관련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물러날 퇴(退)’, ‘길 도(道)’, ‘가까울 근(近)’, ‘멀 원(遠)’, ‘지날 과(過)’, ‘도망할 도(逃)’, ‘빠를 속(速)등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한 마리 새가 비상(飛上)을 위해 예비동작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일까. 아니면 땅에 내려와 먹이를 찾기 위해 걸어가는 모습일까. 어떤 모습을 모티브 삼아 ‘나아갈 진(進)’자를 창조했는지는 알 순 없지만, 그동안 습화(習化)된 감각을 버리고 오늘 처음 대하듯 이 진(進)자를 바라보니, 하나의 공간 안에 펼쳐놓은 시각적 이미지와 그것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나아가다’가 마음속에 들어와 선명하게 자리 잡는다.

걸음 보(步)
 
‘걸음 보(步)’는 다름 아닌 ‘두발’을 상형한 글자다. 좌우 옆으로 튀어나와 위로 솟아있는 선은 엄지발가락을 상징한다. 보(步)는 오른발 왼발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다. 모래사장이나 진흙 위를 맨발로 걸어본 다음 자신의 발자국을 뒤돌아보면 이런 모양이 아닐까 싶다. ‘그칠 지(止)’는 ‘발’을 상형한 글자이다. 따라서 보(步)는 지(止)자 두 개를 위아래로 포개서 만든 것이다. 보(步)의 아랫부분의 지(止)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 형태가 변했다.
건강한 왼쪽 오른쪽 날개가 새의 필수적 생존조건이듯이, 사람도 왼발 오른발이 모두 건강하면 보다 활력 있는 삶이 보장된다. 인류는 항상 건강한 사회를 꿈꾼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균형 있게 실현되는 그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그 사회를 향해 가는데 진보(進步)와 보수(保守)는 새로 치면 좌우 양 날개이며, 사람으로 보면 왼발 오른발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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