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2>
김우진과 배우는 갑골문자 이야기<2>
  • 강진신문
  • 승인 2015.03.1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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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 好 (우호)

벗  우(友)

고대인들은 '벗'이라는 문자를 두 손을 그려서 표현했다. 갑골문을 보면 두 사람의 오른손임을 알 수 있다. 왜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하필이면 두 사람의 손이었을까. 여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방과후 한자시간에 초등학생들에게 물었더니 답은 이랬다. '힘들 때 손을 잡아주라고요.' 벗의 의미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연암 박지원은 벗을 한 집에 살지 않는 아내요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라고 했다. 第二吾(제이오), 즉 제2의 나라고도 했다. 손잡고 강남 갈만한 벗이 있다면 세상이 어찌 팍팍하기만 할까. 

 

 좋을  호(好)

(갑골문)                    (금문) 

좋을 호(好)자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렸다. 사랑스런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 엄마를 향해 방긋방긋 웃음과 재롱으로 화답하는 아이. 둘이서 좋아하는 모습에 참다운 정이 가득하다. 이보다 좋은 모습이 세상에 또 있을까. 금문에서는 '엄마와 아이의 좋음'을 너무나 정감 있게 묘사했다.

아동심리학자들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랑받아야 할 것인가의 태도가 유아기 때 결정된다.'고 말한다. 또 정신분석학자들은 '개인의 성격바탕은 적어도 5세까지 거의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자녀의 양육과정에서 부모, 특히 엄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무게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에도 좋고 미래에도 좋게 하는 어머니의 지고지현(至高至賢)한 사랑을 '좋을 호(好)'자를 통해 느끼게 된다.

 

爲 民 (위민)

 할/위할  위(爲)

爲(위)자의 갑골문은 위는 손(    )이고 아래는 코끼리다. 코끼리는 코가 길다. 갑골문에서 보듯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4000년 전 중국 대부분 지역에는 꽤 많은 코끼리가 살았다고 한다. 당시 코끼리의 존재는 상나라와 촉나라 유적지에서 발견된 코끼리 뼈, 청동으로 만든 코끼리 모형, 그리고 조상 제사에 코끼리를 제물로 바쳤다는 갑골문 기록 등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한다.

코끼리는 영리하고 온순해서 사람에게 잘 사역되었는데 군대에서는 요긴한 운송수단으로, 농사철에는 사람이 하기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이처럼 '하다'라는 뜻을 가진 爲(위)자는 사람이 코끼리를 잡고 일을 부리는 모습에서 유래되었다. '위하다' '다스리다' 등은 그 후 파생되어 나온 뜻이라고 볼 수 있다.

 

 백성  민(民)

 民(민)은 힘없는 백성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갑골문을 보면 날카로운 송곳이 눈을 찌르고 있다. 전쟁에서 패배한 백성은 포로로 잡혀가 승리한 나라의 노예로 살아야 했다. 그들의 도주나 저항 또는 반란을 막기 위해서는 어떤 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한쪽 눈을 날카로운 도구로 찔러 시력을 빼앗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슬픈 이야기를 담은 글자가 바로 백성 민(民)이다. 노예에서 점차 천민, 평민으로 지위가 격상되고 이제는 시민, 국민으로 자리 잡게 되기까지 수 천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뿐이겠는가? 아마도 말 못할 수많은 희생도 따랐을 것이다. 民主(민주)라 함은 노예가 주인이 된, 나아가 백성이 주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民은 모든 권력의 원천이 되었으니 '백성 민(民)' 만큼 극적인 변화를 겪은 글자도 없을 것이다.

 

春 秋  (춘추)

봄  춘(春)

봄은 겨우내 움츠렸던 모든 생명이 활기를 띄는 때이다. 고대인들은 최초로 '봄'의 뜻을 가진 글자를 만들면서 수풀(林)과 새싹(屯) 그리고 따스한 햇살(日)로 디자인했다. 갑골문에서 보듯 그 중심에 놓여있는 그림이 바로 '새싹'을 의미하는 둔(屯)이다. 둔(屯)은 지금은 '진을 치다'의 뜻으로 쓰이지만 원래는 발아한 새싹이 땅 표면을 뚫고 나오는 모습'을 본뜬 글자이다.

봄이 오면 나무숲(林)에 물오른 소리, 새싹(屯)들이 땅을 밀고 올라오는 소리 그리고 따스한 햇살(日)로 언 땅이 풀리는 소리로 가득하다. 생명이 약동하는 春이 '남녀의 사랑' '정욕(情慾)'이라는 뜻도 함께 품음은 조금도 상스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짧은 봄밤의 시간은 천금의 값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春宵一刻値千金)고 했을까?

 

가을  추(秋)

갑골문을 보자 메뚜기 한 마리와 그 아래 불(火)이 그려져 있다. 메뚜기를 구워먹는 그림이다. 이 그림이 바로 최초의 '가을 추(秋)'자이다. 메뚜기와 불(火)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은 참으로 뜻밖이다. 사실 이 그림이 '가을 추(秋)'자로 밝혀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메뚜기와 불(火)을 중국민족인 한족의 시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가을에 메뚜기를 구워먹는 풍습은 동이족만의 고유한 문화라고 한다. 따라서 메뚜기를 구워먹지 않은 한족이 '메뚜기'와 '불'을 보고 '가을'을 유추해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글자는 그것을 창조한 민족의 세계관과 풍습을 자연스럽게 담아낸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가을 추(秋)'라는 글자는 동이족의 작품일 수 있다. 메뚜기는 주로 가을철 벼줄기에 잘 붙어있다. 그래서 벼 화(禾)자가 메뚜기를 대신하고 불 화(火)는 살아남아 오늘의 가을 추(秋)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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