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병영성 마천목 장군을 기억하세요"
"전라병영성 마천목 장군을 기억하세요"
  • 김영미 기자
  • 승인 2013.04.1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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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focus] 전라병영성 마천목 초대병마절도사 후손들

조선 1417년 병영면에 병영성 이설, 초대병마절도사로 부임
장흥마씨 중앙종회, 병영성 축제기간 녹권·영정 전시

전라병영성축제에 500여년간 조선의 서남부지역을 방어하던 지방군사 조직의 요충지인 병영성을 이설하고, 초대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선왕조 좌명공신 마천목 장군이 조명되었다.
 
장흥마씨 중앙종회는 19대조 선조인 마천목(馬天牧) 좌명공신이 612년전 받은 녹권 영인본과 42세때 태종이 하사한 영정을 전시해 공훈을 선양하고 병영성 역사를 조명하였다.

고려말 조선초 사회적 변혁기에서 주목 되었던 인물인 마천목은 고려 공민왕 7년(1358) 장흥 모원촌(해촌면)에서 출생했다. 15세 되던해에 평산 신씨 시조 신순겸 장군의 외손인 어머니 고향인 곡성군 오지면 당산촌으로 아버지를 따라 이거했다.

마천목 좌명공신은 기골이 장대했고, 곡성군 섬진강에서 은어를 낚아 부모를 부양해 효성이 지극했다. 나이 23세때 우왕 7년(1381)에 산원이라는 정8품 무반직을 받아 관직에 진출했다.

무예가 뛰어나 군인으로 발탁돼 무관으로 활동하면서 1398년(태조 7)의 1차 왕자난이 일어났다. 이때 이방원의 휘하에서 활동하면서 1차 왕자난을 평정했고 공을 세워 종3품 근위장군이 되었다.

이후 1400년(정종2)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태종 방원을 도와 큰 공을 세웠고, 상장군이 되었다. 그 후 승진해 육군총수가 되었다.

당시는 왜구의 침입이 심했고 이에 마 좌명공신은 태종에게 서해의 적을 방어하는 성이 너무 멀리 있다고 진언하게 된다.

태종 17년(1417) 승낙을 받아 외적을 막기 위해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병영 축성의 임무를 맡아 광산구에 있던 병영을 병영면 수인성 아래로 이설했다.

당시 이설할 병영성터를 물색하던 그는 수인산 애기봉에 올라서 졸다 노인이 나타나 활을 쏘아 보라는 꿈을 꾸고 깨어나, 활촉이 떨어지는 자리에 성터를 잡겠다며 활을 쏘았다.

그 화살이 떨어진 곳이 전라병영성 한복판이었다. 그때는 한겨울로 눈이 뒤덮여 있었지만 활이 떨어진 주위는 눈이 녹아 '설성 雪城'이라 지칭됐다.

'유성'은 성터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유성이라 칭하여졌다. 이후 성을 축척 한 후 국가안위를 위해 지명을 '병영성'이라 칭했다. 이후 병영성 초대병마절도사로 부임했다.

병영에 병영성이 들어서면서 먹고 살 것이 많았고, 제주도에서 마량면을 통해 명마들이 윗 지방으로 올라가 상권이 몰려들었다. 병영성으로 인해 유명한 개성, 병영상인이 생겨난 것이다.
 
마 좌명공신은 나주판목사, 장흥부원군, 도축도감 등 무수한 관직을 지냈다. 70세가 다 되어가던 무렵 낙향해 곡성에 홀로 계신 노모를 봉양하려 했지만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노모와 가까운 곳인 병영성 병마절도사로 다시 부임하였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향촌에 거주하다가 세종 13년(1431)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시호를 충정이라 내려주었고, 그의 충성심과 올바른 삶을 의미하는 시호였다.
 
이번에 전시된 녹권은 길이 5m70㎝로 태종(1401)이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을 치하하며 좌명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리면서 내린 문서이다. 영정은 42세때 태종이 종문에 내린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마천목 좌명공신은 초기 조선왕조의 안정과 왜구 방어에 큰 공헌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효심으로 양반 관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국가로 부터 크게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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